사람을 위해 돈을 만들었는데 돈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됩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이 있는데 너무 좋은 옷을 입으니 내가 옷을 보호하게 됩니다. 사람이 살려고 집이 있는데 집이 너무 좋고 집안에 비싼 게 너무 많으니 사람이 집을 지키는 개가 됩니다. 이런 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니까 의미의 노예가 되고 행복하지 못한 겁니다.전도(顚倒)는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는 것이고 몽상(夢想)은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고 현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① 많은 것을 곁에 두고 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이상한 현대인(現代人) ② 미래의 노후 대책 때문에 오늘을 행복(幸福)하게 살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린 현대인(現代人) ③ 나누면 행복(幸福)이 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현대인(現代人) ④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현대인(現代人) ⑤ 늘 행복(幸福)을 곁에 두고도 다른 곳을 해매며 찾아다니다가 일찍 지쳐버린 현
“문장에 파란이 없는 것은 여인에게 곡선이 없는 것과 같다. 천하에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곡선이지만. 죽은 것들은 모두 뻣뻣하다. 자연계는 곡선을 좋아한다. 연기와 같이 피어오르는 안개, 뭉실뭉실 솜 같은 구름, 담을 넘어 삐죽 고개를 내민 꽃가지, 구불구불한 시내… 반면에 인조물은 직선을 좋아한다.” 임어당 저(著) 김영수 역(譯)“여인의 향기”(아이필드, 13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건축예술의 거장 안토니 가우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신이 만든 선이다.” 니체 또한 “진리는 모두 곡선”이라고 했습니다. 직선’은 ‘곡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에서 나옵니다. 산 능선에서 고요하고 은근하게 이어지는 어머니의 눈썹과 같은 곡선을 보십시오. 꽃은 모두 곡선이고 난초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의 귀는 곡선으로 생겼기 때문에 직선의 언어보다는 곡선의 노래가 더 잘 들어옵니다. 나무도 그러합니다.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나무가 더 멋스럽습니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는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새들도 곧은 가지보다 굽은 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고, 함
“마음이 설레지 않는 옷을 입고 행복할까? 설레지 않는 책들을 쌓아둔다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절대 착용하지 않을 장신구를 갖고 있는 것으로 행복한 순간이 찾아올까?(중략)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으로 채워진 자신의 공간과 생활을 상상해 보자. 그것이 바로 자신이 누리고 싶은 이상적인 생활이 아닐까?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과감히 버리자.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곤도 마리에 저(著) 홍성민 역(譯)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더난출판, 58~5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정리의 여왕으로 불리우는 일본의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통쾌한 선언을 합니다. 그녀는 두근거리지 않는 것들에 둘러싸여 많은 에너지를 빼앗긴다고 하며, 두근거림이 없는 물건들을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좋아하는 것들로 삶이 채워지는 체험을 합니다. 인생의 고통은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버리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많은 것을 얻은 자가 아니라, 의미 없는 것을 버린 자입니다. 어리석은 새는 반짝이는 것을 무엇이든 주워 모으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주워온 유리 조각 쇳조각들로 둥지가 엉망이
동내에서도 소문난 가정이 있다. 몇 십 년을 싸우며 칼부림도 나고 작은 마을 사람들이 다 듣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드디어 몇 달 전부터는 변호사에게도 여러 번 갔고 끝내는 법원 민원실까지 가서 서류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연세가 칠십을 넘기신 분들이시다. 진도에 내려와 전도 대상자로 지목하고 기도하던 사람들이었다. 선교지와 같은 마을에서 전도의 문을 열기 위해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분들을 지목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지난 달부터 더 심해서 이제 끝장이라는 상황에 우리 부부가 알게 되고 늦은 밤까지 찾아가기도 하고 찾아 오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땐 서로 숨기고 각자 찾아와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힘들면 끝내라고 말한다며 내일은 결정하겠다고까지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을 전해주고 싶다며 한번 도전해 보자고 울기도 하고 애걸했다. 성경의 하나님을 소개하며 시간이 흘러 두 분 모두 나중 더 힘이 빠졌을 때를 생각하고 이겨 보자고 당부를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고비를 넘기고 나서 지금은 만날 때 마다 “어떠시냐?”고 넌지시 물으면 미소를 지으시며 “좋아요.” 대답을 듣는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분에겐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신학대학교 동기로 졸업한 뒤 서울에서 이웃 지역에 각각 교회를 개척해 목회를 시작했다. 그런데 몇 년이 안되어서 선배 목사님의 친구가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목회를 떠나버렸다. 그럴 사정이나 이유를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기에 그땐 궁금하기도 했고 몹시 섭섭함도 있었다고 말해 줬다. 세월이 지난 후 선배 목사님은 미국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늦게나마 왜 이민목회를 떠났는지 물어봤다. 친구는 잠시 망설이더니 “자네 때문이었지”라고 충격적인 대답을 주더라는 것이다. 동시에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친구가 섬기는 교회는 별로 부흥이 없는 반면에 선배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선 계속 좋은 소식만 들려왔었다. 이에 친구끼리 자꾸 비교가 되고 열등감이 깊어지고 스트레스를 받음으로 선택한 것이 이민목회였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많지 않은 교인이지만 다른 목회자와 비교할 것 없이 목회를 하니 평안하고 행복하다고 알려주더란다. 목회를 하면서 선배 목사님의 친구처럼 다른 목회자나 다른 교회를 상대로 비교하다가 시험에 들거나 실망에 빠진 경험은 없는가? 특히 목회를 좀 더 잘해보겠다고 어떤 세
전깃줄에 참새 열 마리가 있었습니다. 포수가 총알 한방으로 다 사냥하려 했는데 열 번째 참새만 죽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참새가 “앗, 총알이다”하며 피했습니다. 두 번째 참새도 “총알!”하며 피했습니다. 그런데 아홉 번째 참새가 “앗, 콩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열 번째 참새가 입을 쩍 벌리며 “아~~”하다가 죽었습니다. 우리 옛말에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 그런 척 하면서 더 염장질하는 사람 말입니다. 중간에서 살짝 말 한마디 바꿈으로 천국이 지옥으로 바뀝니다. ‘서울시 체육회’를 중간에서 잘못 옮기면 ‘서울 시체 육회’가 됩니다. ‘부산시 장애인 복지관’은 ‘부산시장 애인 복지관’이 되고 ‘희망 의상실’은 ‘희망의 상실’이 됩니다. ‘당신은 무지개 같아요.’ 라는 말을 살짝 꼬으면 ‘당신은 무지 개 같아요’가 됩니다. 사탄과 사탄에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합니다. 왜 우리들은 참소하고 험담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을 좋아할까요? 그 이유는 험담과 불평이 죄로 인해서 오염된 우리의 성품에 만족을 주기에 그러합니다. 험담하고 불평하면 만족이 생깁니다. 어느 정도 위로도 받고, 기쁨을
또한 ‘동시적’이라 함은 중생이 우리 안에서 회개와 믿음이 완성될 때 완성되고, 회개와 믿음도 중생이 완성된 때에 완성된다는 뜻이다. 멀린스는 대그나 보이스와 같이 이 믿음은 오직 은혜를 인하여 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구속을 확보해 주는 공로적인 활동이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처럼 멀린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 관점에서 중생의 조건을 회개와 믿음으로 규정했다. 카너는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을 통해 중생의 조건을 제시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소생시키는 행위를 통해 발생한 중생이 믿음보다 앞선다고 주장한 반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구원의 조건인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카너는 믿음과 중생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영적 체험의 두 국면으로 규정한 후에, 인간은 믿음에 의해 중생하지만(갈 3:26; 요 1:12~13), 이 믿음은 하나의 중생적인 행위측면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카너는 구원의 순서가 “회개와 믿음을 통해 체험하는 죄 용서, 칭의, 화해, 양자, 중생, 그리고 성화”로 전개되는 하나의 실재에 대한 다른 묘사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카너는 믿음이란 파산한 죄인이 하나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 나오는 로고스의 화육과 화육하신 로고스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다루는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존재성을 제시한다(1:14, 18). 요한은 영원한 신성의 창조주인 로고스가 역사상의 한 구체적 인간이 되어 그들 가운데 함께 거주하셨던 사실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그 분의 유일한 존재성을 특별한 용어를 통해 표현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a).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말씀이 ‘육신’ 곧 ‘인간’이 된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신성의 존재가 인성의 존재로 변형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또 그 영원한 신성의 존재가 살과 피를 가진 인성의 존재가 되어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온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 ‘육신’이란 단어는 아주 드물게 나오는데, 신체 곧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존재라는 중립적 의미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도 그의 기독론적 성찰에서 화육과 관련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롬 1:3);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롬 8:3);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셨다(딤전 3:16). 이러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며 보내는 사람에겐 불행한 하루가 되고, 감사하는 사람에겐 행복한 하루가 된다. 자주 들어 귀에 익은 ‘감사’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입만 열면 불평하고 비판하며 심지어는 욕이 입에 붙은 사람도 있다. 감사한 마음이 없고 불평불만이 가득하면 감사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불평불만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시계의 배터리가 다 닳으면 시계바늘이 몇 번 째깍째깍하다가 딸깍 멈추듯이 우리 인생도 어느 날 정해진 시간을 다 사용하고 나면 숨이 째깍 멈추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만큼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처럼 정해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가족에 대해, 직장 상사나 사장에 대해, 정부에 대해 늘 불평불만을 하며 불행한 시간만 보내다가 인생의 시계가 멈춰버린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인가? 필자의 주변에도 30~40대의 젊은이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있어서 참으로 인생은 내일 일어날 일을 모르고 산다는 것을 절감한다. 우리의 인생이 생각보다 짧은 인생일 수도 있으니 매사에 감사하며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렘 20:12) 하나님께서 늘 제 마음을 보실 때에 그리고 제가 시험을 당해 저의 마음의 깊은 곳을 보실 때에도 죄를 범하지 않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사는 것이 제 생애에 유일한 목표이며 또한 평생 기도 제목이기도 합니다. 마치 욥이 그 큰 시험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예전에 서해바다에 1만2000여 톤의 기름 유출 사건이 있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참사랑교회에서 봉사하러 현장에 갔을 때는 이미 120만 명 정도의 자원 봉사단들이 다녀감으로 말미암아 현장이 너무나 깨끗한 상태여서 정말 기름 유출 사건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현장 감독 되시는 분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삽과 물통과 융과 같은 종이를 주면서 한 팀은 삽으로 모래사장을 파고, 한 팀은 바닷가에서 물통으로 물을 담아와서 웅덩이에 부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팀은 모래 속에 스며들어 있는 기름들이 물 위에 뜨면 닦아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염되어 있는 기름들을 제거함에 있어서 먼저 바닷물에 떠있는 기름부터 시작해서 모래사장 속에 베여있는 기
“가방을 새로 사면 가죽에 힘이 들어가 있어서 각이 살아 있죠. 그게 보기엔 좋은데, 막상 들어보면 몸에 착 붙질 않아서 불편합니다. 그럴 땐 가방을 일부러 문고리에 며칠 걸어두는 거예요. 가죽이 약간 늘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모양이 잡히도록. 힘을 빼야,더 멋있는 것도 있거든요.” 강혜정 이고운 공저(共著) ‘오프닝&클로징’ (프런티어, 19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힘이 들어가야 아름다운 것이 있고, 힘을 빼야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 모든 운동의 기본이고, 머리에서 생각을 빼는 것이 모든 평안의 기본이 됩니다. 좋은 연기를 하려거든 감정에서 힘을 빼고, 좋은 노래를 부르려거든 목소리에서 힘을 빼야 합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분의 색이나 선을 덜어낸 넉넉함, 한 색 빼기를 하여 그 간격이 만들어 내는 리듬이나 여백이 고요함을 느끼게 합니다. 움켜쥔 손의 힘을 빼고 손바닥을 펴는 순간 무한의 공간이 손바닥에서 열립니다. 대중 민요 ‘갑돌이와 갑순이’에 얽힌 유머입니다. 서로 갑으로만 살았던 이 둘은 먼저 사랑한다고 하면 손해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끝까지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갑돌이는 ‘을순이’에게 장가
손님 대접하기를 즐거워하는 어느 여인이 공원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집에 들어오셔서 따뜻한 차 한잔 하시지요?” 노인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함께 집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요?” “내 이름은 부(富)이고 저 친구의 이름은 성공(成功)이고, 다른 친구의 이름은 사랑(Love)입니다. 집에 들어가셔서 가족과 상의 하세요. 우리 셋 중에 누가 당신 집에 들어가기를 원하는지를….” 부인은 집에 들어가서 노인들이 한 말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남편은 매우 즐거워하면서 말했습니다. “우리 부(富)를 초대합시다. 그분을 안으로 들게 해서 우리 집을 부(富)로 가득 채웁시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여보! 왜 성공(成功)을 초대하지 않으세요?” 조용하던 집안이 소란해졌습니다. 며느리가 시부모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사랑을 초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싸우지 않고 사랑으로 가득차게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부인이 공원으로 나가서 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분이 사랑이세요? 저희 집으로 드시지요.” 사랑이 일어나 집안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두 노인(부와 성공)도 일어나서 사랑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이 놀라서
세계적인 암센터에 31년간 근무한 “김의신” 박사는 하나님을 찬양함이 암치료에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고 소개하면서 교회성가대원들과 일반인들을 비교해 연구해 보니 성가대원들의 면역세포수가 일반인보다 몇 십 배도 아닌 무려 1000배나 많은 것으로 측정됐다고 발표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성가대원들의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 신체의 면역체계를 강화시켜 준 것입니다. 또한 1998년 미국 듀크 대학병원의 “헤롤드코니히”와 “데이비드라슨” 두 의사가 실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매주일 교회에 나와 찬양하고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평균 7년을 더 오래 건강하게 산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처럼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면 신체의 면역체계가 강화되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유지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찬송 받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 병이나 고난을 통하여 우리들을 연단하시거나, 믿음을 성장시키시거나, 인격을 만들어 가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비록 아프고 힘들고 어려움이 찾아올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양
“어느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다가 숨이 막혀 죽었다고 한다. 이유를 알고 보니 악보에 쉼표가 없었다고 한다. 쉼표는 노래의 여백이다. 여백 없는 악보, 쉼표 없는 악보는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질식하게 한다.” 한재욱 저(著) “인문학을 하나님께”(규장, 26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글도 그러하고 그림과 사진도 여백이 있는 것이 넉넉하고 좋습니다. 여백은 독자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창조의 공간입니다. 흔히들 동양의 미학을 ‘여백의 미’라고 합니다. 넘침보다는 모자람을 선택한 것입니다. ‘없음’으로 인해 ‘있음’이 빛납니다. 흰 여백은 감상하는 사람이 들어갈 공간입니다. 이론도 그러합니다. 웃을 수 있는 여유와 여백이 없는 이론은 복수와 증오에 불타오르는 이론입니다. 100의 출력 능력을 가진 오디오 기기를 70정도로 해 놓고 음악을 들으면 가장 편안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여백이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틈이 없고 매끈한 유리 같은 사람에게는 이웃의 눈물이 스며들지 못합니다. 넉넉한 무명천같이 여백이 있는 사람은 이웃의 눈물을 흡수하며, 소통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머리에 기억되지만, 배려의 여백이 있는 사람은 가슴에
얼마 전 섬기는 캠퍼스에서 젊은 영혼들과 함께 성경말씀을 나누며, 상담을 하며 또 다시 화제가 된 방탄소년단(BTS) 이야기를 많이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방탄소년단의 소속 회사의 대표가 섬기는 캠퍼스 동문이기 때문에 관련 이야기가 미디어에 노출되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며 확인한 것은 이전 지구적인 열광과 반향은 결코 우연이나 일시적 스캔들이 아니며 놓쳐서는 안 될 값진 교훈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최근 발표된 BTS의 앨범이 폭발적 반응과 함께 영국과 미국 매인 차트에서 동시에 1위를 차지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매우 진귀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이 번 노래가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이란 엄청난 철학적 성찰의 자리로 모든 청중을 초대하는 메시지라는 점이다. 앨범은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심리철학계의 거장 칼 융(Carl Jung)의 사상이 담겨 있다. 그래서 제목도 지난 30년 이상 융을 연구한 한 저자의 책 제목에서 그대로 빌어 왔다. “영혼의 지도 : 페르소나.” 가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Ego)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융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전쟁을 하는 페르소나와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