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에게 쓸모 있는 책을 정독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첩경이다. 그런데 좋은 책인지, 쓸모 있는 책인지는 대체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결국 많은 책을 읽어 보는 수밖에 없다. 쓸모 있는 책, 좋은 책을 고르는 탁월한 안목은 ‘많이, 그리고 골고루’ 읽지 않고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독(多讀)의 비효율성은 다독이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단언할 만큼 많은 책을 읽어본 사람만 주장할 수 있다.” 임사라 저(著) ‘내 아이를 책의 바다로 이끄는 법’(비룡소, 2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에머슨은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것을 아는 자가 아니라 쓸모 있는 것을 아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진리는 책에도 적용됩니다. 자기에게 쓸모 있는 책을 정독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첩경입니다. 그런데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쓸모 있는 책인지는 결국 많은 책을 읽어봐야 압니다. 5세기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유협이 쓴 ‘문심조룡(文心雕龍)’은 동양을 대표하는 최고 최대의 문학이론서입니다. 소설가 이문열도 초년 시절 ‘문심조룡’을 자신의 문학 수원지(水源池)라고 소개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문심조룡에는 독서에 대한 좋은 권면이 있습니다. “천 개의 곡조를 다룬 후에야 음악을
어느 신앙 월간지에서 헨리 그루버의 ‘세상을 걷는 중보 기도자’라고 하는 글에서 “현 미국을 이끌어 가는 70대, 그들은 성장시기에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추수가 끝난 들판에 남겨진 곡식을 거두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판매한 돈으로 용돈을 벌었던 이들이 국가를 이끌어 가고 있다”며, “그때에는 곳곳마다 부흥회가 열렸고 성령이 부어졌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안타까운 하소연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10여 년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젊은 세대의 신앙인들로 인해 마음 아파했던 생각이 났다. 그런 와중에도 근근하게 신앙을 지켜 나가려고 애를 쓰는 노년층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킨다면 기근의 때의 어려움은 축복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킨다면 재앙이 축복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그루버는 역전의 하나님을 소개한다. 영적으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가난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모습과 한국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남발하면서 나라를 비판하고, 개독교라는 소리로 교회를 손가락질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 왕의 꿈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했다. 열왕기상 3장 9절에 보면 그때 솔로몬은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하고 구했다. 그의 이런 간구함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지혜와 총명뿐만이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주겠다고 하셨다. 솔로몬의 간구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다. 성경은 여러 면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전해준다. 신명기 32장 4절엔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모세는 노래했다. 시편 33장 5절엔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하시는 것에는, 뜻과 일하심에는, 세계를 판단하고 심판하심에는 반드시 공의가 있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들에게도 공의가 있길 원하시는데 특히 재판관들에게 더욱 그렇다. 레위기 19장 15절엔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해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연차총회 시에 발간되는 의사자료집에는 <총회규약>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침례교회의 이상과 주장”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설하셨고 친히 머리가 되시며 그 입법자이다. 2. 교회의 교리와 생활에 대한 유일하고 권위 있는 표준은 성경뿐이다. 3. 교회의 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으로서 상징적 기념일뿐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4.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로서 이들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다. 5. 교회의 정체는 민주정치로서 행정만 할뿐 입법은 하지 않는다. 6. 교회의 회원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의 모임으로 구성된다. 7. 교회 회원의 의무는 신앙고백으로 침례를 받고 신약성서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8. 모든 교회는 행정적으로 독립적이나 복음전도 사업은 협동한다. 9. 교회와 국가는 상호 분리되어 있다. 10.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이다. 또한 최근 3~4년 전까지 침례신학대학교 교직원용 수첩이 발간되었는데, “우리 대학교의 신앙과 주장”이라는 일종의 신앙고백이 게재되고 있었습니다: 1. 성경 :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오류 없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하자. 책의 저자(著者)는 독자에게 있어서는 타자(他者)이다. 타자는 나를 넘어서는 영역, 즉 ‘다름’의 세계이다. 타자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독자는 독서를 통해 타자의 견해를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아니면 일부 수용하게 된다. 독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법을 길러간다. 독서를 통한 타자와의 만남, 타자와의 그 치열한 생각의 전투를 통해 독자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한재욱 저(著) ‘인문학을 하나님께’(규장, 3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독서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독서는 생각하는 힘을 길러 줍니다. 독서를 하는 중에 저자(= 타자, 他者)의 주장이 너무나 강력하고 감동적이어서 나에게 전적으로 수용되면 카프카가 말하듯이 책은 ‘도끼’ 가 되고, 니체의 표현에 의하면 ‘망치’가 되어 나를 깨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줍니다. 도끼와 망치 같은 책을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이렇듯 독서는 편견과 아집이라는 거대한 감옥을 쪼개고 새로운 집을 짓도록 해 줍니다.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의문을 품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 속에, 상상력을 주고 창의력을 주고, 수많은 대리 경험을 하게 합니다. 세종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2가지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첫째, 아무리 세상에서 잘 나가고,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살아도 죽어서 지옥에 가면 사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처럼 걸인으로 살아도 천국에 간다면 그는 복을 받은 자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이 세상에 벌거벗고 태어나도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노숙자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빌 게이츠처럼 수십조 원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천국에서도 큰 자가 있고 또한 작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는 자”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모든 비결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데 있다고 하시니 어린아이에 관한 연구는 반드시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1) 아주 먼 옛날,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반에
나와 아내 그리고 둘째 딸, 이렇게 세 사람은 한동안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큰 딸과 헤어진 뒤 30분은 족히 그랬던 것 같다. 난 그저 앞만 보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향해 운전만 할 뿐이었고, 아내와 둘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창밖 경치만 구경할 뿐이었다. 물론 이는 지난 두주간의 반가운 가족 해후(邂逅)에 깊은 정이 들어서이다.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저 재밌게만 떠들며 지내다 갑자기 또 가족 중 하나를 타국에 홀로 두고 와야 하는 미처 준비되지 못한 이별의 아쉬움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이다. 게다가 갑자기 자기만 남겨둔 채 세 명의 가족을 한꺼번에 보내야 하는 처지가 너무 황망하여 참았던 울음보를 그냥 터뜨리고야만 큰 딸의 역력한 허전함도 매몰차게 두고 와야 했음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 전 미국에서 있었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다. 물론 “뭘 그 정도 이별 가지고 그러시나, 더 큰 이별의 아픔도 있는데….”라 여기실 분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쉽게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어느 가족이든 타인이 알 수 없는 그 가족만의 역동과 말 못할 사연이 다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두 가지 생각이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들었다. 첫째, 그럼에
4. 본문의 신학 메시지 설명 신학적 고찰로 얻는 메시지를 통하여 풍성하고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있다. 성경 저자는 본문에 신학적 메시지를 담는다. 설교자는 본문에 등장하는 신학적 주제를 다양한 관점으로 연구하므로 청중들에게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있다. 특히 깊이 있는 신학적 메시지를 위해서는 세 가지 영역(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에서 연구하고 설명할 수 있다. 1) 성경신학 성경신학은 성경자료를 중심으로 본문 안에 있는 신학적 이슈를 연구하는 신학 방법이다. 먼저 주해자는 본문 연구 중 발견된 신학적 이슈를 그 본문이 속한 책의 신학적 입장에서 살펴본다. 가령, 빌립보서 본문을 연구한다면 빌립보서 전체의 신학적 입장과 선택된 본문에서 등장하는 신학적 이슈의 연관성을 살펴본다. 성경신학은 신약신학과 구약신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신약신학은 신약의 27권 안에서 강해자가 선택한 신약본문에서 발견된 신학적 이슈에 대하여 비교 및 대조해 메시지를 연구하므로 일치성과 다른 점을 연구하는 신학 방법이다. 또한 구약신학은 구약성경에서 강해자가 39권의 구약성경에서 발견한 신학적 이슈를 다른 본문과 비교 및 대조하여 연관성과 차이점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 남침례교인들이 신앙고백을 채택했을 때, 그 신앙고백이 인간의 양심을 구속할 수도 있는 신조로 잘못 사용될 위험성을 경계하는 내용을 그 서문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1925년판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에 표기된 서문이 1963년판과 2000년판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습니다.(1) 신앙고백은 크든 작든 어떤 침례교 단체 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 가운데 확실하게 공유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항목들에 관하여 우리 교단의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훈계하고 인도하기 위해서 작성되었다. 그것은 예를 들면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 즉 신약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단순한 조건들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첨가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 아니다. (2) 우리는 신앙고백을 우리의 믿음에 관한 완전한 진술로 여기지 않으며, 최종성이나 무오류성을 갖는다고도 보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그러하겠지만, 어느 때라도 지혜롭거나 편리하다고 여겨진다면, 침례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진술을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다. (3) 크든 작든 어떤 그룹의 침례교인들이라도,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여길 때마
“피아노 건반은 88개다(중략). 모두 똑같은 길이와 높이로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하모니가 아니라 소음이다.” 장문정 저(著) ‘사람에게 돌아가라’ (샘앤파커스, 4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베토벤이 힙합곡을 만들지 않았다고 해서 별 볼일 없는 작곡가라고 한다면, 수박이 호박을 보고 너는 왜 멋진 줄이 없냐고 한다면, 가로수들이 전봇대를 보고 너는 왜 나뭇잎 하나 없냐고 한다면, 짬뽕이 짜장면을 보고 너는 왜 얼큰한 국물이 없냐고 한다면, 코끼리가 돼지를 보고 네 코는 누가 베어갔냐고 한다면, 솔방울을 먹을 수 없다고 소나무를 쓸모 없는 나무라고 한다면 미칠 것 같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소인(小人)에게는 다름이 곧 틀림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이라도 생각의 다름이 있습니다. 다름은 다양성이고 각 개별체의 특별함입니다. 수박이 부럽다고 호박이 제 몸에 줄을 그을 필요 없습니다. 태양이 부럽다고 달이 제 몸을 불덩이로 태울 필요도 없습니다.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월든(이레
(2) 여가와 친교의 장 노년기에 경험하는 소외감과 고독감, 그리고 역할 상실의 문제를 극복하도록 돕는 방법은 좋아하는 여가활동이나 의미 있는 일의 장을 열어줌을 통해 가능하다. 노인사역의 기회를 제공해 교회 내부 자원의 역량을 모아 노인들이 요구하는 여가활동의 기회를 마련하며 친교의 장을 만들어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노인들 스스로 의미 있는 사역에 동참함으로 역할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며 인생에서 보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이 교회에 보탬이 되는 내용으로 사역을 구성해 노인들의 욕구도 충족시켜 자기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며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게 함으로 역할 상실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3) 목양과 선교사역 노인사역은 일반 사회복지사업과 차별화되어 성경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한 사역이 요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인들의 중추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분야는 기도사역일 것이다. 기도는 젊은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이 여유로운 노인들이 집중할 수 있는 사역이며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더 깊어지는 특성이 있기에 오랜 신앙의 경험을 소유한 노인들이 매진함을 통해 효과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설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쉽고 정확하게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 설명 중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청중에게 이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본문 설명을 통해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본문 설명은 설교자에게도 유익하다. 알렌 박사는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말씀이 설교에 권위를 부여할 수 있다. 성경의 권위와 강해설교는 서로 연관이 있다.” 강단에서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할 때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권위를 경험하게 된다. 본문을 바르고 적절하게 설명할 때 설교자는 권위 있게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유익을 얻게 된다. 4.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위한 본문 설명의 특징 미주에서 본문이 이끄는 설교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알렌 박사는 설교에서 본문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설교는 성경의 본문에 기초를 두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본문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석해야 한다. 성경 본문은 단순히 설교의 재료가 아니다. 본문은 설교의 근원이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본문이 담고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으면 이단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습니다. 제가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처음 입학했었던 1980년대초에만 해도, 침례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공예배에서 암송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의 기독교계에서 (비록 일부 기독교지도자들에 의해서겠지만) 이단시 되기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글귀인 사도신경 그 자체가 이단분별의 잣대가 될 수 있습니까? 왜 꼭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만 고백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사건을 얼마든지 다양하게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저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저를 살리시기 위해, 저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그리고 저를 대신해서, 십자가 형틀에서 고통을 받으셨고 피를 흘리셨고 죽으셨습니다”라고도 고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형화된 문귀대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다고 그를 이단시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고백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침례교인들은 신조(신경)뿐 아니라 위대한 개혁가나 신학자
12세기 중국 송나라는 금나라의 확장에 밀려 멸망 직전이었습니다. 급기야 금나라가 공격을 하자 북(北)송의 휘종은 아들 흠종에게 제위를 넘겨주고 남쪽으로 피신했고, 흠종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수도 개봉을 포위한 금나라를 돈으로 회유할 생각만 했습니다. 이때 기막힐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부상서 손부(孫傅)가 도성의 방어를 도교 도사(道士)에게 맡기자는 제안까지 했습니다. 이때 곽경(郭京)이라는 도사가 도술을 부려 육갑신병(六甲神兵)을 부르기만 하면 금나라를 무찌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흠종은 기뻐하며 그를 불렀습니다. 도사 곽경은 출생일시가 육갑에 맞는 7,777명의 백성을 선발해 육갑신병을 구성한 뒤 성문을 활짝 열고 출병했지만 이길 리 만무 했습니다. 결국 금나라 군대가 성문으로 진입하여 쉽게 도성을 점령해 버리고 북송은 멸망했습니다. 금나라 태종은 잡혀온 송나라 흠종에게 중혼후(重昏候), 그 아버지 휘종에게는 혼덕공(昏德公)이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습니다. 이는 모두 정신이 혼미한 사람,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라는 모욕적인 칭호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을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 때 하나님이 아
이 글의 목적은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위한 본문 설명의 방법을 체계적으로 제시해 설교현장에도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먼저 필자는 설교의 기능적 요소를 설명하고, 본문 설명을 위한 자료와 효과적인 본문 설명을 위한 점검 사항과 본문 설명을 위한 기술을 제안할 것이다. 이 글을 통해 한국 침례교회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설교자들에게 본문 설명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돕고 다양한 본문 설명 방법의 기술을 소개하려 한다. II. 설교의 기능적 요소 설교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과 하나님의 계시된 메시지를 성령의 능력으로 잃어버린 영혼에게 전해 중생을 경험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아 풍성한 삶을 누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도록 안내하는 신성한 소통 행위이다. 이와 같이 전인격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설교는 청중의 다양한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쳐야 한다. 이러한 설교를 만드는 것은 마치 조립식 집을 만드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좋은 설교라는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한 기능을 가진 건축재료(설교의 기능적 요소)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각각의 기능적 요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