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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기독론 : 로고스 기독론(5)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 (신약학)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로고스 찬미가를 통해 성육신하신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요한은 로고스의 신적인 존재성에 대한 선언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에 있어서 로고스의 주체적인 참여를 묘사한다.
요한은 나아가 성육신하신 로고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역사 현장에서 감당한 구체적인 사역을 이 어두움의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의 계시 사역으로 제시했다.


요한은 이제 그 참된 빛의 사역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먼저 말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다”는 것은 그 다음 구절에서 언급될 로고스의 성육신과 세상에서의 활동을 가리킨다. “알지 못했다”는 말은 그의 참된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고 그에게 적절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에서 ‘알다’라는 동사는 ‘보다’라는 동사와 동의어적으로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사건이나 사물에 관한 사람의 인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안다’는 것은 특별히 아버지와 아들에 관하여 아는 것 곧 그들 사이의 관계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아들의 사명에 관하여 아는 것을 집중적으로 가리킨다.
헬라 사상에서 ‘안다’는 것은 관찰과 객관성을 암시하고 또 그런 점에서 그것은 외적으로 보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러나 구약 사상에서 ‘안다’는 것은 인식의 개념 뿐 아니라, 신뢰와 순종을 포함하는 전인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안다는 것은 자기 백성을 선택하고 돌보는 것을 포함한다(암 3:2).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성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과 신뢰와 순종의 관계로 들어가는 인격적 행위를 포함한다(렘 31:34).
요한복음에서 ‘안다’는 동사는 이러한 구약적인 개념을 기초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아버지를 안다고 여러 차례 언급되는데, 그것은 사랑과 순종과 상호 연합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를 진정으로 아는 것을 나타낸다(10:15; 17:25; 7:29; 8:55).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관계를 전제로 해서 아는 것을 가리킨다(8:32; 17:8, 25; 10:4; 13:17; 15:15).


요한복음에서 가장 특징적 단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은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17:3). 따라서 영생의 활력은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연합되는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생동적이며 권능의 지식을 통해 표현된다. 또한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 1:21).


요한은 성육신하신 로고스의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는 것을 제시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 “자기 땅에 왔다”는 말은 로고스가 성육신하여 세상에 온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세계에 와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말한다. “자기 땅에”라는 우리말 번역은 원어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이것을 직역하면, “그가 자기 자신의 것들에게로 왔다”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것들”은 그 다음에 나오는 “자기 백성” 곧 직역하면 “자기 자신의 사람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세상에서 그 자신이 택한 백성의 세계로 들어온 것을 가리킨다.


“자기 백성”이란 어구에서 남성 복수가 사용된 것은 “너희가 열국 중에서 나의 소유가 되겠고”(출 19:5)라는 구약의 사상에 기초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기 백성도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영접하다’라는 동사는 요한복음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아들에 대한 열린 자세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자세를 말한다.


빛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활동에 대한 대다수 유대인들의 반응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요약적으로 나타낸다(12:37~41). 그러나 성육신하신 로고스의 사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다. 요한은 그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제시한다: “영접한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헬라어 원문에서 “영접한 자”는 단순과거 시제이며 “믿는 자들”은 현재 시제로 되어있다.


그래서 두 단어를 연결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며 그 결과로 그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라는 의미가 된다. “그를 영접했다”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뢰와 순종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전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1:12; 2:23; 3:18). 이름은 그것이 가리키는 존재 자체 혹은 존재 전체를 나타낸다.


신약성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부활의 예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라고 말함으로써 부활해 올리어지신 예수의 특별한 지위를 강조한다(빌 2:9).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강조했다(행 4:12).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전체 곧 그의 선재와 화육과 올리우심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재와 화육과 부활의 존재로서 지금도 살아계시며 하나님과 아버지-아들의 신비하고 완전한 연합의 관계 속에서 활동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요한복음에서 제시되는 구원론의 핵심적 내용이다(2:23; 3:18).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어구로 표현했다(갈 3:26; 롬 8:15).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단수 ‘아들’은 오직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중성 단어인 ‘자녀들’이 사용됐다. ‘자녀’라는 용어는 ‘백성’보다 더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연합의 관계를 나타낸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존재를 바로 이해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된다는 점에서 ‘자녀
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권세’라는 말은 권위와 권리 혹은 자격과 능력의 의미로 사용된다(1:12; 5:27; 17:2; 19:10~11). 이 말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에 대한 단서를 나타내기도 하며 또 이 복음서의 내용을 어떻게 읽어야할 것인가를 제시하기도 한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와 권위와 능력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20:30~31).


요한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새로운 출생의 기원을 언급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이 구절에서 혈통, 육정, 그리고 사람의 뜻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어떤 인간의 개입도 작용할 수 없는 순전히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주권적인 은혜라는 것을 강조한다.


혈통은 부모를 통한 자연적 출생을 가리킨다.  ‘육정’은 직역하면 “육신의 뜻”이다. 요한복음에서 육신은, 사도 바울이 육체의 의미로 사용한 것과는 달리(갈 5:16~21; 롬 8:5-8),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존재라는 중립적 의미를 갖는다(1:14). 그래서 이 어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인간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표현한다(cf. 롬 9:16). 셋째 어구인 “사람의 뜻”이라는 어구에서 ‘사람’은 성인 남자 혹은 남편을 가리키는 단어다. 따라서 이 어구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편이나 아버지의 주권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혹은 인간의 출생에서 남편의 주도적 역할을 가리킬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어구는 일부 사본들에서는 생략됐다. 이것은 둘째 어구인 육정과 거의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요한이 이것을 추가한 이유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표현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서 여성 제자들의 위치와 역할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가부장제 가정에서와 같이 아버지나 남편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다는 것으로서 남성과 여성의 평등성을 부각시킨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란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역사를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