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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 - 6

석종준 목사
서울대 캠퍼스 선교사
상대원교회 협동목사

생명이다.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일은 무조건 옳다.
얼마 전 대학생 딸이 유기견 센터에서 죽기 직전의 작은 개 한 마리를 데려와서 집에서 키우게 됐다. 보호소에 갇힌 개들은 일정기간이 지나도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안락사를 시킨다고 한다.  처음에 이 외모 멀쩡하고 귀여운 개가 왜 버림을 받았을까 궁금했는데, 한 가지 혹시나 하고 짐작해 보는 대목은 있다. 전 주인이 베풀어준 정관 수술이 잘못됐는지, 이 개는 반가움을 표현할 때마다 오줌을 싼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거실에서 풀어놓고 키우려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묶어 놓되 가끔씩 산책을 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신을 죽음 직전에 살려준 것을 안다는 것인지, 볼 때마다 반갑다고 오줌을 싸고, 먹을 것을 달라고 애걸하고, 가끔씩은 당당하게 짖어댄다. 이 개를 보면서 생명의 의미를 생각해 봤다. 구출당하지 않았다면 벌써 생명이 끊어졌을 운명. 마찬가지로 캠퍼스의 수많은 청춘들이 아파하고 있다. 죽어가고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낙오된 영혼들이 방황하고 신음한다. 한 때는 하나같이 치열한 입시 전쟁에서 이겨 영광스런 합격의 감격을 누렸으나,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기를 잃은 청춘들이다.


매주 화요일마다 새벽 수년째 함께 관악산을 오르는 교수님이 있다. 이번 주에 털어 놓기를 요즘 자신이 지도하는 석사과정 한 학생이 우울증 때문에 자주 학교를 못나온다고 했다. “아이는 착하고 머리도 명석한 학생”인데, 스트레스를 못 이겨서 마음의 병이 생긴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면서 “목사님이 가끔씩 만나서 상담도 해주고 기회가 되면 성경공부도 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한다.


그날 아침 운동을 마치고 학교 후문을 나서는데, 낯익은 한 형제가 학생들 틈에 섞여서 힘없이 출근하고 있는 모습이 옆으로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서 멘토링을 해주고 있는 자연대 박사과정 남학생이었다. 전화를 했다. “000 형제” “네. 목사님, 어쩐 일이세요.” “기운 내요.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보여요?” “목사님 어떻게 아세요. 최근 갑자기 연구실이 일이 너무 많아져서, 출근할 때 매일 전쟁터 끌려 나가는 기분이에요. 중보기도 부탁드립니다.” “그렇군요. 기도할 테니, 파이팅하시다. 축복합니다. 000 형제”


또 최근 나와 울먹이며 전화통화를 한 학생도 있었다. 수년째 석사과정을 마무리 못한 상태인데, 결국 이번에도 논문을 마치지 못하고 학업을 그만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대학교회에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여러 차례 성경공부도 했었던 한 여학생이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최선을 다한 결과이기에, 조언의 방향은 분명했다.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혼자만의 장점과 달란트를 다시 확인시켜주고, 축복하며 기도해 줬다. 놀랍게도 단 한 번의 위로와 축복의 기도에 온 천하 보다 귀한 한 영혼이 다시 소생하는 모습을 봤다. 연구실 생활을 하는 캠퍼스의 대학원생들은 남모르는 비슷한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개인적으로 학생들의 말을 주로 듣는 처지라서 객관성에 일정의 한계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갑질”이라는 어떤 부당한 일의 희생자가 된 안타까운 청춘들이 주변에 종종 있다.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생각해 보시라. 수년 동안의 고생 끝에, 수고한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그토록 자존심 강했던 청춘들이 느낄 상처 깊이를. 물론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한 결과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으로 승리했다는 영혼들의 간증도 종종 듣는다.  얼마 전 대표적 기독교 원로인 손봉호 장로(전 서울대 교수, 81세)의 신간 북 콘서트 장에서 한 학생을 오랜만에 만났다.


수년 전 캠퍼스에서 몇 번의 상담을 해주었던 교육학 석사과정에 있던 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올 8월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현재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는 내용, 당시 상담 중 내가 전한 어떤 말들을 생생히 되살려 주었고, 그 조언이 계기가 되어서, 힘든 시기를 다시 추스를 수 있었고, 마침내 오늘의 좋을 결과를 맞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는 감사의 표현을 받았다.


“유추프라카치아”라는 이름의 아프리카 식물이 있다. 이 식물은 무심코 스치는 손길에는 시들어가지만, 진정한 사랑으로 보듬는 손길에는 아름다운 꽃까지 피워 선물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시굴의 이름을 “유추프라카치아”, 즉 “사랑을 주세요”라고 지었다. 이 시대 너무 많은 청춘들이 진정한 사랑을 목말라 하고 있다. 다시 살기 위해서이다. 무엇이 그들을 살려 낼 수 있을까? 오직 조건 없이 주는 진정한 주님의 사랑뿐이다. 그 사랑의 자리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다시 살려낼 무조건 옳은 살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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