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실천은 세 가지 국면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첫째는 “무엇을 실천하는가?”와 관련하여 진리(복음)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며, 둘째 “누구에게, 어디서 실천하는가?”에 관해서 상황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와 관련해 방법론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실천적 신학이란 인간실존이 지니고 있고 해결을 위한 문제에 대해 응답하는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와 생활과 세계의 근본적 변혁을 향한 진리의 생동하는 역사가 교회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와 그 다양한 기능들(예배, 설교, 상담, 봉사, 교육 등등)을 통해 역사 속에서 현재적으로 어떻게 실현되고 있으며 어떤 개혁이 전개되고 있는가에 대한 사실을 규명하고 복음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추구하는 신학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결국 교회와 교회의 활동이 기독교 실천의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앙이 1차 체험이고, 신학은 2차체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둘의 순서가 바뀌면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된다.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신학은 최종적 가치가 없다. 신학은 진리를 알고 구현하기 위해서 단순히 이론적 앎만 가지고는 안 되며, 실천이 있어야 한다. 만약 신학이 적용과 실천에 무관심하고 이론에만 안주하게 된다면 그것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신학과 실천신학은 불가분리적 관계 속에서 상호 자극하고 통합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이론성과 실천성을 함께 담보하도록 해야 한다. 침례교인들은 신조를 주장하기보다는 신앙고백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신앙고백은 교회의 자기성찰과 신앙과 실천 강령의 선언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침례교인들은 시작부터 자신이 깨닫고 믿는 진리를 실천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었다. 믿는 바를 따라 순전하게 실천하고자 했던 그들의 믿음의 삶은 역사적으로 항상 도전을 받았고, 그 결과 고난과 시련이 점철된 여정이었다.
침례교인의 특징은 앎에 있다기보다는 그들의 삶과 행위에 있다고 본다. 제도나 체계적 메카니즘이 삶과 행위를 부자유케 할 때 침례교인들은 용감하게 그것들을 비판했고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한국침례교 신학의 정립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며, 특히 무엇보다도 영혼구원을 위한 신학, 세상을 향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신학, 세계선교를 위한 신학을 형성하는 데 한국의 침례교 신학자들이 어떤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것인지도 진지하게 고만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실천신학은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이 제공하는 성경적, 신학적 메시지를 교회가 처한 특별한 상황 가운데서 실제 생활에 적용하여 표현하고 전파하는 이론과 실제를 연구하는 신학의 한 분야로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인간의 중생, 성화, 교화, 교육, 그리고 봉사에 적용하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실천신학은 교회의 신학으로서 가장 종합적인 신학이며 교회의 성패는 실천신학의 향방에 달려있다.
2. 한국침례교회의 실천신학적 평가
1) 동아기독교에 대한 실천신학적 평가
한국에서의 침례교 사역은 펜윅(Malcolm C. Fenwick)에 의해서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침례교 선교사로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1889년 교단적인 배경이 없이 독립 선교사로 한국에 온 펜윅이 입국하므로 침례교 사역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민경배는 펜윅의 선교사역을 한국 교회 역사에 결코 사라지지 않는 별이라고 극찬했다.
펜윅은 어린 시절 그의 집에 동거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목사 맥킨토쉬(Donald M. McIntosh)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사회생활을 위해 집을 떠나던 날 주일성수할 것을 강조하면서 “보통 실패하는 자들은 그 실패가 언제나 안식일을 기억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충고를 마음에 담았다고 간증했다.
중생체험을 한 펜윅은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평신도 전도자로서 복음을 증거했다. 그리고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했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과 먼 곳에 있는 믿지 않는 자에게로 가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을 갖게 됐다. 그리고 자신이 비록 “녹슬고 찌그러진 깡통”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구할 물”을 가져다주기로 작정하고, 칼을 들어 기슭에 묶여 있던 밧줄을 끊는 결단을 내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