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성서해석에서 텍스트와 독자의 연관성에 대해-1

  

성서 텍스트와 성서 해석자인 독자는 이해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텍스트와 저자의 연관성에 초점이 되어 있어서 독자는 이해의 구성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는 독자를 해석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일 경우에 발생하는 텍스트의 이해와 저자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전통적인 해석적 논의에서 독자 (reader)가 이해의 주요 요소에서 배제됐다.

 

그럼에도 이해의 기술로 정의되는 해석학에서 문제가 되는 구성요소는 저자였다. 전통적으로 저자(author)는 텍스트의 생산자이면서 테스트 자체를 통제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텍스트에 선행하는 입장을 취하고 독자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독자의 위치나 자리를 이해의 구성요소로 수용할 수 없었던 저자는 결과적으로 독자를 무의식적으로 배제함으로써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구분하게 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성서해석에서 문제가 되는 주된 쟁점이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이해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가 텍스트에 개입하거나 참여하는 경우에 텍스트의 이해가 원의미로 읽혀지지 않고, 나아가 독자의 행위에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텍스트와 독자의 명확한 구분은 텍스트를 왜곡시키는 해석상의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서 해방하는 힘이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쟁점이 텍스트 이해에서 독자를 해석적 구성의 요소로서 수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독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한 것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비판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서 성서해석은 텍스트와 독자라는 두 가지 구성요인을 통해서 성서의 의미가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이 텍스트와 독자와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는 중요한 해석적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Anthony C. Thiselton이 밝히고 있듯이, “해석학 문제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은 텍스트와 해석자(독자)가 역사 속에서 부여받은 자리가 그 둘을 규정하는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다음에 텍스트와 독자의 연관성은 더욱 의미론적 해석에 도달하기 위한 이해의 두 가지 결정적 조건이 어떠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전개하게 될 것이다.

 

I. 저자의 의도에 관한 문제

해석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평이하고도 단순한 이 질문은 매우 복잡한 해석의 구조를 드러낸다. 하지만 해석의 궁극적 목표에 대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의는 크게 두 가지 차원인 것 같다. 한편에서는 전통적인 차원에서 실에이르마이어(Schleiermacher), 허쉬(Hirsch), 그리고 가다머(Gadamer0는 해석의 목표를 이해의 기술로 정의하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리퀘르(Ricoeur)와 스타우트 (Stout)가 해석의 목표를 의미의 발견으로 정의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날카롭게 구분하는데, 자연과학은 설명’(explanation)을 목표로 하고, 인문과 학은 이해’(understanding)를 목표로 한다.

 

해석학은 인문과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해를 목표로 한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에는 대체로 의미론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이해를 의미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해석에 대한 이 두 가지 정의가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정의는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의미가 실제로는 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지향하는 방향은 결국에는 텍스트 본성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이해와 의미를 저자의 의도로 환원시킬 경우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의미가 저자의 의도에 한정하게 되는 문제를 일으킨다. 그 결과, 텍스트는 열린 텍스트가 아니라 닫힌 텍스트가 될 수 있다. 닫힌 텍스트는 저자에 의해 규정된 의미 개념에 집착한다.” 따라서 닫힌 텍스트는 텍스트 그 자체에게 우선권이나 자율권을 제공하지 않고 단지 텍스트의 이해나 의미가 저자의 의도에 따라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독자가 텍스트를 읽을 때 저자의 의도를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것은 텍스트가 이미 열린 상태로 독자에게 다가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텍스트는 열린 텍스트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이미 저자의 의도를 초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글을 읽는 독자를 향해 개방하고 있는 상태다. 이는 시간적 거리감인 소격화’(distanciation)와 현재의 언어로 텍스트를 이해해야 하는 전유성’(appropriation) 때문이다. 저자가 정확히 어떤 의도로 글을 썼다는 것은 시간적 거리감으로 인해 텍스트의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이해를 방해한다. 분명히 저자와 독자 사이에는 과거와 현재를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또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독자는 동시대를 통해서 그 자신이 차용한 언어에 의해 이해하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에 방해를 받는다.

 

이런 근거에서 텍스트의 이해는 저자의 의도와 독립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비록 해석이 안고 있는 복잡한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텍스트와 독자와의 관계가 상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해석적 구조에서 독자가 텍스트의 이해를 통제하게 되면, 텍스트의 이해는 주관적으로 또는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다. 따라서 독자는 그 텍스트를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게 될 것이다.

 

이와는 달리, 독자 (reader)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있는 자기 자신보다는 저자에 일차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은 텍스트의 생산자가 저자 (author)이기 때문에 텍스트에 대한 이해는 독자보다는 저자의 의도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독자가 저자의 의도를 따른다는 점에서 그는 텍스트에 의해 통제된다. 이처럼 저자와 독자의 관계가 단순히 이해의 구성요소로서 이 두 가지를 단순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둘의 관계는 엄밀한또는 객관적이해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하나의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Ricoeur는 저자와 독자의 관계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저자와 독자는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리퀘르 (Ricoeur)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저자와 독자 사이에는 어떠한 종류의 교환이 없다. 저자는 독자에게 응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텍스트가 글쓰기 행위와 글 읽기 행위를 완전히 양편으로 분리한다. 이 양편 사이에는 아무런 의사소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글쓰기 행위에는 독자가 부재한다. 그리고 글 읽기 행위에는 저자가 부재한다.

 

그리고 텍스트는 저자와 독자를 이중적으로 소멸시킨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과거의 텍스트를 만든 사람이지만, 미래에 누가 자신의 텍스트를 읽을 것이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반면에 독자는 과거의 저자가 그 대상이 누구인지 정확히 어떤 의도로 글을 만들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과거의 저자는 현재의 독자를 소멸시키고 있고, 현재의 독자는 과거의 저자를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에 저자와 독자는 이중적으로 소거된 상태로서 텍스트만이 존재한다.

 

성서의 한 본문을 예로 들어보자. 이단으로 규정된 집단에서 기독교와 기독교 지도자를 공격할 때 즐겨 쓰는 구절이 이사야 599-12절의 말씀이다: “들의 모든 짐승들아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아 와서 먹으라.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정승태 교수 한국침신대 신학과(종교철학)

 

위 기고글은 성서해석에 나타난 텍스트와 독자의 연관성에 대한 주제로 발표한 논문을 요약 발췌했다.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