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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한 사람’


많은 화제를 뿌리며 현재까지 상영되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은 관객이 무려 1,200만을 넘기며 한국영화 역사상 5위 안에 드는 위업을 자랑할 듯하다.


그런 가운데 영화의 중심 현장이었던 꽃분이네가 영화 후광을 넘어 후유증을 겪으면서 점포 주인의 지나친 권리금 인상 요구로 가게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온다. 참으로 기회를 이기적으로 활용(?)하려는 탐욕의 자화상을 보는 듯 하여 영화 흥행이 또 다른 질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무조건 반갑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그 감동이 여운으로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특히 한 아버지의 아들로 가족의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희생이라는 덕목으로 감당해 내는 모습들은 영화 속 주인공의 자식들이 살아가는 오늘날의 밑거름이 되었기에 더욱 훈훈한 감동이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장면들은 주인공이 살아낸 삶의 이야기들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끝 장면으로 갈수록 주인공의 삶이 일부에서는 라는 단어도 쏟아냈지만 공감이 견인한 감동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영화의 시작은 국제시장이 아닌 흥남부두였다.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그 해 30만의 중공군 개입으로 1224일 흥남부두를 마지막으로 철수하게 된 메드리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에서 당시 민사고문관인 현봉학 박사가 군함의 함장 알몬드 장군에게 피난민을 구하자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사람보다 귀한 무기가 어디 있겠는가라며 배 안의 모든 무기를 버리면서까지 하여 47명이 정원이었던 배에 지금까지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운 배로 기네스북에 오르는 기록적인 14,000여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떠난다.


 대부분의 관객이 기억하는 첫 장면일 수 있지만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 두 사람에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우리는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통해 유대인 1,100명 정도를 구한 쉰들러에게 열광했지만 우리 한국인의 그 보다 더 많은 생명을 구출한 사람 현봉 학박사와 함장 알몬드 장군을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이 오늘을 사는 이들이 갚아야 할 채무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가치, 한 사람이 가진 생각, 한 사람이 꿈꾼 비전이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고 역사를 새롭게 쓰게 하곤 한다. 노예해방선언이 인도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이었지만 당시 리더로서의 링컨의 선언은 그가 평소 가지고 있었던 노예관이 기독교적이지는 못하였다 할지라도 수많은 노예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이 되었고 그 결과 ‘I have a dream’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거처 400년 전 흑인 노예였던 존 펀치의 11대 후손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아직 인종차별은 남아있지만 흑인들은 더 이상 백인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틴 루터의 이신득의의 깨달음과 함께 시작된 종교 개혁은 2013년 현재 439백 만 여명에 이르는 개신교 신자를 이루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1517년 이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성경이 들려 지게 되었고 카톨릭으로 정복당하였던 독인은 지금 국민의 98%가 루터교회 신자들이다.


신앙 감정론’, ‘부흥론’, ‘구속론등으로 잘 알려진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에 의해 18세기 청교도 정신의 이완과 영적 쇠락을 거듭하던 물길을 다시 돌리는 영적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이렇듯이 한 사람 또는 작고 미세한 것에 의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뿐이 아니다.


로스 쿠퍼 존스턴은 그의 저서 엘니뇨 역사와 기후의 충돌’(El Nino)에서 19124월의 타이타닉 침몰, 명나라와 청나라를 몰락시킨 대가뭄, 550만 명을 희생시킨 인도의 대기근, 1812년 나폴레옹의 군대와 1941년 히틀러 군대의 운명을 가른 스탈린그라드 전투 실패의 원인이 엘니뇨로 인한 기상이변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의 나비효과는 이러한 사실들을 잘 설명한다.


이처럼 아주 사소한 것 하나가 지구의 환경과 사건을 역사화 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아주 내성적인 사람이라도 평생 동안 평균적으로 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어느 사회학자의 말이 공감된다.


오늘날은 영웅이 없는 시대다. 홍수 보다 더 큰 쓰나미 같이 내 중심으로 밀려오는 헤아릴 수 없는 정보 속에 어느 특정한 영웅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웅이다 싶으면 사람들은 인정사정 없는 독한 댓글로 여지없이 사살해 버린다. 지금까지 각 종교를 비롯하여 진리로 믿어왔던 것들, 전통이라고 여겨 왔던 것들, 고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도 포스트모더니티들은 더 이상 그 권위와 자리를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신적인 권위를 부정하며 무시하는 무신론의 시대에서 영웅이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존재이다. 너도 하면 나도 해야 하고, 나도 하면 너도 해야 하는 불법의 시대다. 이런 시대의 심리에는 부정을 통한 긍정을 꿈꾸는 강한 욕망이 불길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반발하며 대적한다. 영웅이 되고 싶은 스스로의 욕망을 과거와 같은 대리만족으로는 더 이상 충족될 수 없기에 존재 또는 공존보다는 제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기독교 안에도 영웅이 없다. 물론 우리가 소망하는 영웅은 세속적 가치의 영웅이 아니다. 루터 같은,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웨슬리, 웨일즈의 부흥운동을 일으킨 이반 로버츠 같은, 평양의 부흥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길선주 장로, 1903년 원산에 성령임재로 내적 변화를 일으키며 원산부흥운동을 일으킨 하디같은 영적인 거장들을 찾는다.


1897년 황해도 소래에서 한 사람의 회개를 시작으로 성령이 일으킨 부흥의 불길이 소래마을 태우며 이웃마을로 옮겨갔던 부흥을 이끈 말콤 C.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6) 같은 한 사람을 찾는다. 거창하게 소리치거나 큰 교회를 담임하거나 교계의 거물인 사람이 아닌,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오직 복음으로 사람에게 향하고, 그리스도예수의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섬기는 사람, 예수생명으로 숨 쉬는 예수제자, 자기 죄를 스스로 고백할 줄 아는, 늘 말씀 앞에서 삶을 이루는 그런 사람을 찾는다.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는 사람보다 스스로의 허물을 회개하는 다윗 같은 사람, 믿음만 말하는 사람이 아닌 믿음과 삶이 하나 된 사람을 찾는다. 많지 않아도 된다. 의인 열이면 되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은 오늘도 유효하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전 지금은 교회를 구원해야 하고, 목사와 교인을 구원해야 한다.


교회와 목사, 성도는 많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없다. 주님은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제자를 세우셨다. 제자만이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와 목사, 교인만 있을 뿐 제자는 없는 것 같다. 나 자신이 그 한 사람, 그 제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자신을 예수로 복음으로, 십자가로 변화된 그 한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세상은 그 다음이다. 주님이 찾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너가 아닌 나부터, 아니 나만이라도.

 

계인철 목사

광천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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