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최현숙 교수의 문화나누기>가을의 상념: 슈베르트의 방랑자 판타지와 함께

가을이 오면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내면이 차분해지고 감상적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은 현대인에게는 더욱 가을이 주는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먼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지진 때문에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과 만나기도 하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기근의 소식들로 불안감이 더해진다. 그래서 올해 가을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가을의 차분한 감성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다. 이런 가을의 감성 충전을 위해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의 피아노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가곡, 노래의 대가인 슈베르트는 기악 작품에서도 편안한 노래가 이어지는 소품들이 많다. 그러나 가끔 예상치 않은 대규모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방랑자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25세에 작곡된 곡으로 젊은 기운으로 충만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슈베르트 하면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의 음악가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슈베르트와 대면하게 되고 그것은 뜻밖의 에너지를 경험하는 기회가 된다.


판타지는 원래 자유로운 형식의 기악곡을 의미하는 이론적인 단어이지만 환상, 꿈과 같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현실을 조금 벗어나 꿈과 환상을 통한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판타지는 그래서인지 작곡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악양식이기도 하다. 슈베르트가 판타지 형식을 빌려 삶의 여정에 대한 꿈과 고뇌,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방랑자 판타지’는 음악적 규모와 기법도 뛰어나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적 의미로 인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지금은 고유한 제목으로 굳어진 이 작품의 제목은 작곡자인 슈베르트가 붙인 것이 아니라 후배 작곡가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에 의해 붙여진 제목이다. 리스트는 슈베르트가 슈미트의 시에 음악을 붙인 그의 가곡, ‘방랑자’의 주제가 사용된 것을 발견하고 이 작품을 ‘방랑자 판타지’라고 불렀는데 이 제목은 단순히 주제의 출처를 명시하는 것을 넘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슈베르트는 삶의 여정을 본향을 향해 끊임없는 여행을 하는 방랑자에 비유하여 생각했다.


푸르름의 나라, 꽃피는 나라, 되살아나는 나라 등을 찾아서 방랑하는 한 나그네를 노래한 가곡 방랑자는 인생이 갈망하는 이상향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가곡뿐 아니라 슈베르트의 음악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는 방랑자의 여정이다. 삶의 불확실성, 인생이 가지고 있는 숙명적 한계에 대한 고뇌는 슈베르트가 고민했던 가장 중요한 탐구의 대상이었다. 이 작품에 나타난 나그네의 여정은 때로는 뜨거운 열정으로 번뜩이고 또 때로는 한없는 고독에 쓸쓸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빛을 만나는 희망으로 환희와 희열에 차게 되고 이것은 마지막 4악장에서 위풍당당한 결론으로 진술된다.


이 가을의 우리들의 삶의 태도가 이 음악을 닮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며 본향을 향해 가는 방랑자의 열정과 고독, 그리고 꿈과 희망을 오롯이 끌어안고 묵묵히 좁은 길을 걸어가자. 그러나 조용하게 앞을 향해 가는 그 걸음걸음이 슈베르트의 음악만큼 당당하고 분명하면 좋겠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옳지 않음에 대해 분명한 입장으로 대항하는 진정한 정의로움을 실천하는 열정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참기 힘든 억울함에 분노하기도 하고 혼자 삭여내기 어려울 만큼 고독해지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빛의 길을 만나는 희망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우리들의 간증이 되면 좋겠다.

/최현숙 교수 침신대 피아노과



배너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