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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마리아’ 김정숙을 격하시킨 김정은의 본심

정교진 박사의 북한 바로보기 - 17

김정은은 자신의 출생 및 성장과정과 하등 관계없는 ‘혁명의 성지’인 ‘백두산 장군’ 반열에 올랐다.
그것도 자신의 조모 김정숙(1917~1949)을 끌어내리고 ‘백두산 3대장군’에 등극했다. ‘백두산 4대장군’이라고 해도 될 법도한데, 굳이 ‘3대장군’에 맞추는 연유는 무엇인가. 2005년부터 줄기차게 ‘백두산 3대장군’이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이라고 세뇌 되어온 북한주민들은 이 같은 현실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1998년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적극적으로 표방하기 시작할 때 열성적으로 선전했던 인물이 바로 그의 생모 김정숙이었다. ‘혁명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로 불리었던 김정숙이 ‘군대의 어머니’, ‘선군의 어머니’로도 불리기 시작했다. 이미 전부터 항일투쟁당시 ‘백발백중 명사수’로 선전되었던 김정숙, 그녀가 총을 든 영웅화(1940년 대사하치기전투에서 김일성을 목숨으로 보위하는 김정숙 동지)와 ‘백두의 녀장군 김정숙 동지’(1997년 제작)에서 총을 든 김정숙은 ‘총대중시사상’의 중심 아이콘이 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선군사상으로 연결됐다.  또한, 김정일이 육성으로 자신이 어렸을 때 총을 쏘는 방법과 전술, 전법을 어머니로부터 배웠다고 하면서 김정숙은 ‘선군의 어머니’로 칭송받게 됐다.


북한은 김정일의 우상화에 앞서 김정숙 우상화를 선행했다. 그 방법에 있어서는 개신교 신앙보다, 로마 가톨릭의 전통을 모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개신교에서는 ‘마리아’의 존재는 단지 예수님을 낳으신 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은 ‘마리아’에게 신성을 부여해 구원의 ‘중보자’로까지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김정숙은 영웅화를 넘어 신격화됐다. 즉, 북한의 ‘마리아’가 된 것이다. 여성 대표 잡지 「조선녀성」(1946년에 창간)은 1998년부터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 동지를 따라 배우자’라는 고정코너를 만들었다. 또한 김정숙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매번 빠짐없이 수록했다. 김정숙을 영웅투사, 전사로 그린 ‘어머님의 총소리 영원하라’, ‘위대한 공산주의혁명투사 백두의 녀장군 김정숙 동지’(기록영화) 등 수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1999년부터는 인민학교 교과서(4학년용)에서도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 어머님 어린 시절’과 중학교 4학년용인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의 혁명력사’라는 교과서가 나왔다. 이때부터 김정숙은 김일성, 김정일과 더불어 ‘장군’이라고 불리어졌다.
2005년부터는 ‘백두산 3대장군’으로 적극적으로 선전되었던 김정숙이다. 이처럼, 김정숙은 북한전체인민들에게 ‘선군의 어머니’, ‘백두산 여장군’, ‘백두산 3대장군’으로 분명하게 각인된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백두산 3대장군’의 반열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의 친손자 김정은에 의해 … 김정은은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 김정숙의 위상을 격하시키고 말았다. 이는 유훈통치에서 벗어난 행위로 볼 수 있는 대목으로 자신의 친부 김정일이 심혈을 기울였던 김정숙 선전사업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김정일의 리더십 및 우상화의 배경이 김정숙에서부터 거의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1974년부터 김정숙의 우상화가 시작됐고 김정일이 후계자로 채택된 1980년 이후부터 김정숙의 우상화가 본격화됐다.
이때부터는 김일성의 친모 강반석에 대한 우상화 강도보다 더 높아졌다. 양강도 신파군을 <김정숙군>(1981.8.17)으로, 혜산제2사범대학을 <김정숙사범대학>(1981.8.17)으로 그 명칭을 바꾸기도 했다. 1983년에는 회령에 김정숙의 동상을 세우며 <김정숙혁명사적지>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백두산답사행군길’(천리행군, 고난의 행군)에 있어 ‘김정숙군’을 반드시 답사코스로 정하게 했다.  특히, 김정일의 ‘백두산 장군’도 김정숙이 김정일을 백두산 밀영에서 낳았다는 것에부터 출발한다는 점이다. 북한은 1982년부터 김정일의 출생연도를 1942년으로 바꿨고, 백두산 출생설(1942.2.16)을 공식발표했다. 김정숙이 1941년 6월부터 1943년 3월까지 이 귀틀집에 머물면서 항일조직을 지도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시기에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선전했다. 이는 김정일이 민족의 영산이요, 혁명의 본거지인 백두산의 정기를 타고난 위인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므로 혁명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출생에 신성을 더하기 위해 1987년부터는 김정일 관련, <구호나무>(항일빨치산파들이 김정일탄생시 칭송글을 나무에 새김, ‘2천만 동포여 자랑하라 백두산 하늘에 백두성 솟았다’ 등)를 대대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김정일 권력승계의 정당성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설이고, 그 핵심배경이 바로 김정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백두산 3대장군’ 반열에 김정숙을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2017.8.14) 김정은이 그녀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앉았다. 이제 북한은 여기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제시해야 될 것이다. 물론, 다 조작하여 선전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정당성을 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백두산과는 하등관계가 없는 김정은을 ‘백두산 4대장군’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문제인데, 김정숙을 끌어내리고 ‘백두산 3대장군’이 된 것에는 적지않은 리스크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백두산 3대장군’이 되고 말았다. 왜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재일교포인 자신의 생모인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처럼, 고영희의 존재는 김정은에게 있어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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