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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보는 민립대학 설립운동

도한호 목사의 목회와 상식-153

우리나라의 신교육기관은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대부분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사저(私邸)에서 시작한 조그마한 공부모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학당(學堂)이 되고, 과정과 수학 연한에 따라 전문학교와 대학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동아일보가 창간 90주년을 기념해서 펴낸, 한국 근대사에 나타난 변화 100경(景)을 수록한 “이고위감(以古爲鑑)”에는 구한말인 1923년에 일어났던 민립대학(民立大學), 즉 사립대학 설립운동에 대한 회고 기록이 있다.
구한말 조선의 민족지도자들은 1919년 3월 1일 만세 사건을 경험한 후에 국민의 자각과 민족자존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대학 설립 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923년 3월 29일에 전국 각지에서 462명의 인사들이 종로의 청년회관에 모여서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기성회(期成會) 창립 발기대회를 가졌다. 이에 앞서 1921년에는 월남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등이 대학 설립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서 국내는 물론 만주의 간도와 하와이에도 지부가 설립될 만큼 여론이 조성되었다. 민립대학 설립취지에는, “생존을 유지하며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의 설립을 사(捨) 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
추진본부에서는 천만 국민에게 1원씩을 기부 받아 천만 원을 모금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3・1 만세사건과 대학 설립운동을 지켜본 일본은 서둘러 경성제국대학 설립을 추진해서 1924년에는 오늘의 서울대학교가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는, 이에 앞서, 이미 1880년대에 아펜젤러는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 오늘의 배재학원을 세웠고, 언더우드는 제중원(濟衆院)을 토대로 세브란스병원과 연희전문학교를 세웠고, 미국 북감리교의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1922d.) 선교사의 아내 메리는 명성황후로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서 1886년에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웠다(137회 참고).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세운 교육기관은 1886년 경신학교에 이어 정신여학교, 정의, 배화, 숭의, 호수돈, 보성학교 등등 수백여 개에 달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설립자와 소속 선교회의 선견지명과 희생정신이 이와 같은 역사(役事)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5500만 인구에 400개가 넘는 대학을 가진 한국의 대학을 생각할 때, 선조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과 결연한 의지에 비해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일부 사립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단의 횡포와 임원들의 이합집산과 교원들의 악성 붕당은 교육뿐 아니라 나라의 장래마저 위태롭게 한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먼저 각성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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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에 응답하는 목회자 자녀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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