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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성”(2)

장희국 목사의 복음 이야기-22

장희국 목사
문화교회

둘째로 일관성이란 오른쪽에서 왼쪽까지 균등하게 적용됩니다.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성경의 해석과 법의 적용에 있어서 일관성(균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혜나 무시가 없을 때 분파가 생기지 않고, 지역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과부나 세리 또는 죄인의 영혼이나 서기관 혹은 제사장의 영혼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든 유다든 사마리아이든 어느 땅이든지 간에 균일하게(일관되게) 실천하신 예수님을 봅시다.


세리의 집에 유하시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까? 남의 자녀는 접시 하나만 깨도 부주의한 녀석이 되고 내 아이는 장독을 깨도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장독이나 된장은 또 사면 되는 것이니까”하는 식의 적용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는 기독교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톨스토이의 이야기 중에 “빵을 보상한 작은 악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악마 두목이 승진을 기다리는 작은 악마의 능력 시험을 위해 농부를 화나게 해주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농부는 여느 때처럼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낮이 되어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열었으나 빵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작은 악마가 먹어치워 버린 것입니다. 농부는 허기졌으나 심성이 착해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가져갔나 보다”라고 하면서 일을 계속했습니다.
악마 두목이 화가 났습니다. 작은 악마는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해 농부의 집에 머슴으로 변장을 하고 들어갔습니다.


머슴은 주인에게 땅이 질고 물이 많은 곳에 씨를 뿌리게 했고, 그 해는 가뭄이 들어서 다른 집은 흉년인데 너무 많은 수확을 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언덕바지에 씨를 뿌리게 하여 장마로 다른 집은 흉년인데 주인은 많은 수확을 했습니다.


곡식을 다 처리하지 못하자 주인은 술을 만들었고, 첫 잔에 흥이 나서 여우처럼 꼬리치며, 둘째 잔에 이리처럼 으르렁대며 싸웠고 셋째 잔에 돼지처럼 질서 없이 방뇨하고, 물웅덩이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부자들과만 친구가 되고, 가난한 자에게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때리고 무시했습니다. 일관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헌금 많이 하는 장로에게 목줄이 메인 교회가 있다니 한심스럽습니다.
현대교회는 산촌, 농촌, 어촌 두루 다니시던 예수님은 잃어버리고 만수산 계곡을 산책하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칡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미래의 지도자여 교회의 저변을 보십시오. 변두리의 누각에는 38년 된 병자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인색해져 가는 세대를 무엇에 비유하겠는가? 그물은 씨줄과 날줄이 성하게 잘 짜여 있을 때 만 풍부한 고기를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일관성이 균형을 잃으면 분쟁이요, 싸움이요, 찢기는 아픔을 앓게 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요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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