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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공관복음서 구원론 : 하나님의 나라/천국(7)


이전에는 주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적인 국면을 살펴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으로 표현됐다. 주 예수께서 행하신 치유 사역이 하나님의 그런 권능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근본 문제인 문제를 해결하시는 죄들의 사함의 선언으로 표현됐다.

 

중풍병자 치유 사역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마비된 신체를 치유해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게 하시는 신체적인 치유 사역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믿음으로 주 예수 앞에 나온 인간을 향하여 죄들의 사함을 주시는 영혼의 치유 사역이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해 그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통해 주 예수는 땅에서 죄들을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죄들을 사하시고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을 통해 나타났다. 주 예수의 치유 사역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특히 맹인 치유 사역을 통해 특징적으로 표현됐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 사건들이 있음에도 맹인 치유에 관하여는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라는 미래적 예언으 로만 나온다(35:5a). 맹인 치유의 기적이 세상의 창조 이후로 예수님의 사역에 처음으로 나온다는 것이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눈을 뜨게 된 후에 그의 고백을 통해 표현됐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9:32). 맹인 치유의 이러한 특별한 성격은 예수님이 자신의 치유 사역을 열거하는 명단의 맨 앞에 언급된 순서에서도 표현됐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11:5; 7:22; 두 구절에서 동일하게 맨 앞에 위치함) 맹인 치유 사역에 어떤 특별한 복음의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이렇게 예수님의 치유 사역 명단에 서 맨 앞에 위치한 것인가?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복음 곧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모습은 어떤 영적이며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맹인 치유 사역은 표면적으로는 육신의 맹인이 눈을 떠서 다시 보게 된 사건이다.

 

그러나 복음으로서의 맹인 치유 사역에는, 중풍 병자 치유 사건에서와 같이, 그런 표면적 사건 속에 심오한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복음의 사건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임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담고 있는 사건이다.

맹인 치유 사건은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즉 영적인 맹인인 사람이 주님의 은혜의 역사를 통해 영적인 눈을 뜨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영적인 사건이다. 맹인 치유 사건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의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을 나타내고 있다.

 

맹인 치유 사건에 담긴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이러한 영적인 의미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의 결과를 나타내는 동사를 통해 그 의미가 표현된다. 즉 맹인 치유 사건 들에서 사용된 핵심 동사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치유 사역 명단 맨 앞에 나오는 맹인이 보며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직역하면 올려다보다” “쳐다 보다혹은 다시 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동사는 주로 쳐다 보다혹은 다시 보다로 번역됐다. 이 동사는 표면적으로는 육신의 맹인이 눈을 뜨게 되어 시력을 회복한 상태를 나타내지만, 영적으로는 흑암에 눌려 있던 혹은 마귀에게 잡혀 있던 영혼의 눈이 열려 보이지 않던 영의 세계가 열리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영적인 개안의 의미를 나타낸다.

 

예수님이 행하신 맹인 치유 사역의 결과에는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13~14)라는 말씀과 동일한 구원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맹인 치유 사건들에는 이 다시 보다라는 동사가 집중적으로 사용됐다.

 

예수님이 행하신 대표적인 맹인 치유 사역은 여리고에서 맹인 걸인을 치유한 사건이다(10:46~52; 18:35~43). 마가복음에서는 그 맹인의 이름이 바디매오라고 언급된 반면, 누가복음에는 익명으로 나온다. 바디매오 치유 사건에는 다시 보다라는 동사가 2회 나온다. 그가 예수님께 뛰어왔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 맹인은 선생님이여 내가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에게 가라 네 믿음 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어예수님을 길에서 따라갔다. 예수님의 치유의 선언에서 네 믿음이 너를 치유했느니라라고 하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표현됐다.

 

예수님은 맹인이 눈을 뜨는 사건을 구원 사건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여기서 선언된 구원은 단순히 신체의 맹인이 눈을 떠서 시력을 회복하게 된 것 만을 말하지 않는다. 복음서들에서 구원은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의 역사 전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래서 그 구원에는 복음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든 구원이 담긴 용어인 셈이다. 예수님이 선언하신 구원이 그 맹인이 다시 보게 된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다시 보는 것은 단지 신체의 눈이 열려 시력이 회복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심오하게 영혼의 눈이 열려 영의 세계를 보고 경험하여 알게 되는 영적인 생명이 살아나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일어나는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바디매오의 간절한 외침은 표면적으로는 시력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외침이지만, 영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초월의 세계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세계를 보고 듣고 알기를 바라는 영적인 맹인의 간절한 외침이기도 한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언급된 이 맹인 치유 사건에는 이동사가 3회 사용됐다. 누가는 이 사건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주여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맹인의 요청에 대하여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에서 마가의 가 라라는 명령어 대신 다시 보아라라는 명령어를 사용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18:42). 그 말씀을 하시매 그가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라갔다” (18:43a). “다시 보아라라는 명령형 동사는 사도행전 22장에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 큰 빛으로 임하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다메섹으로 들어갔을 때,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와서 사울에게 말한 것에서도 나온다.

 

사도행전 9장에는 아나니아가 와서 사울에게 안수하여 기도한 것으로 나오는데, 22장에서는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명령의 말로 한 것으로 나온 다: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아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 보았노라”(22:13). 이 구절에서 쳐다 보았다라는 동사는 다시 보다라는 동사와 동일하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 사울이 아나니아의 명령 후에 그를 쳐다 보았다는 말은 그가 아나니아를 쳐다 보았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메섹으로 오다가 극적으로 경험했던 그 빛과 음성의 주인이신 부활 주 예수 그리스도다시 보게 된 것곧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를 그의 마음에 영접하고 믿는 믿음이 주어진 것을 나타낸다.

 

김광수 교수 / 한국침신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