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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기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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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침례교 전통의 주의 만찬의 이해

주의 만찬에 대한 침례교 전통은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할 수 있는가’란 추상적 논쟁보다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례전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가 아니면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용돼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둔다. 침례교 전통은 주의 만찬을 열린 주의 만찬과 닫힌 주의 만찬으로 구분해 실행한다.

 

열린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만찬에 참여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복음주의 교회의 회원들을 어떤 교리나 교회 의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게 한다.

 

반면에 닫힌 주의 만찬은 물에 잠기는 침례 의식을 받은 사람들만이 참여하게 한다. 어떤 의식 절차보다도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결단하고 고백하는 것을 믿는 구원의 증거로 여기는 침례교 전통은 오직 침례(세례 또는 영세)를 받은 자에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게 하는 다른 교회 전통과는 달리 열린 주의 만찬에 문을 열어 놓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의 침례 의식을 행한 자들에게만 허용하는 닫힌 주의 만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기능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체로 본 침례교 전통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를 어떤 종류의 것으로 선택하고 사용하는가 하는 목회적 관점에 더 관심을 보여 왔다. 빵(떡)을 선택할 때 누룩을 넣은 것으로 하느냐 안 하느냐에 관해 개혁교회 전통처럼 침례교 전통 역시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누룩이 들어간 것을 사용했다.

 

그 근거는 예수가 주의 만찬을 제정할 때 특정한 종류의 빵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빵을 지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예수가 유월절 만찬에 사용한 무교병에 착안해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경부터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남침례교회들은 누룩 없는 빵을 주의 만찬에 사용하게 됐다.

 

누룩이 들어간 떡에서 누룩 없는 떡을 사용하는 것으로 전환된 침례교 전통은 포도주에 관하여서는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을 사용하는 것을 지지한다. 미국에서 침례교회들이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을 사용하게 된 배경에서는 1820년경 술로 인해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비참한 결과들을 경험한 것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반작 으로 술을 마시는 것을 거부하고 주의 만찬에 사용하던 포도주를 대신해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으로 대치시켰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발효된 포도주 를 사용한 것처럼 발효된 포도주를 사용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유대인의 관습과 후대 교회의 전통에 포도주에 물을 섞어 사용한 점에 착안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를 가져오게 한 여러 전통은 “그 리스도의 몸이 어디에서 현존할 수 있는가”란 한 가지의 질문에서 시작됐다.

 

가톨릭 전통과 루터교 전통은 그리스도의 몸은 주의 만찬에 실체로서 현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면, 개혁교회 전통과 침례교 전통은 승천하신 부활의 그리스도는 천상에 계시고 주의 만찬의 참여자들은 지상에 있음으로 공간적인 분리로 인해 그리스도가 주의 만찬과 일치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에 대한 의미 해석에 대한 침례교 전통은 종교개혁 당시의 쯔빙글리와 그의 추종자들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의 재침례교도들의 상징적 기념설에 동의한다. 쯔빙글리에 의하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피는 그의 혈관에 흐르고 있었지 제자들을 위해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쯔빙글리는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그러므로 이 잔은 언약의 피가 아니 었고 그것 자체가 언약도 아니었고 그러나 그것은 언약의 상징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쯔빙글리가 화체설이나 임재 설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주의 만찬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본 것만이 아니라 부활 후 승천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이 물리적으로 이 땅에서 시행되는 주의 만찬에 임재할 수 없다는 것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자연적이고 문자적이어야 하고 한 장소에 참된 오감(sense)이 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립한 성서에 의존해 논증하기 위하여 나는 이 주제로 되돌아온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리석게도 그리고 불경건하게 우리의 몸도 역시 여러 장소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것의 본질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이 실물 그대로 그리고 진짜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과 그것이 주의 만찬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과 아버지의 보좌로부터 그리스 도를 끌어내리는 상반된 것을 가르치는 우리의 반대자들의 허용을 우리는 틀어막아야 한다.

쯔빙글리에 의하면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이 물리적으로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거나 현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쯔빙글리는 주의 만찬의 문자적 해석은 천상에 존재하는 그리스 도의 몸을 이 땅으로 끌어 내릴 수 없는 것만이 아니라 재림의 약속과도 모순된다는 것을 이렇게 주장한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본문을 지적함으로 바울은 마지막 날까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실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거기에 앉아 계시다면, 그는 여기에 존재하실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그가 여기에 계실 수 있다면, 우리는 그의 다시 오심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오셨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약 그가 떡에 현존하신다거나 또는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마지막 날은 이미 도래한 것이다. 그가 이미 현존한다면, 그는 이미 심판의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마지막 날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면, 그는 육체로 현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물리적으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수 없다는 쯔빙글리의 논리는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문자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하는 가톨릭의 화체설과 루터의 공재설의 성서 해석학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또한 쯔빙글리의 상징적 기념설은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와 시간과 공간적 간격을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실체적 임재를 강조하는 칼빈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침례교 전통의 뿌리는 ‘떡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상징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쯔빙글리의 상징설에 두고 있다. 침례교 전통은 쯔빙글리보다는 그의 후계자였던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의 기념설에 더 큰 기반을 두고 있다.

불링거는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침례교 전통은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예수의 제정 명령을 문자적으로 이해함으로 주의 만찬을 시행하는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속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눅 22:19; 고전 11:24~25). 그러나 기념설은 “이것은 나의 몸이다” 또는 “이것은 나의 피다”는 예수의 선언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상징적 선언으로 받아들인다.

 

최선범 교수 한국침신대 신학과(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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