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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 요즘은 의 횡포또는 이라고들 한다. 오래전부터 소위 질은 있어왔지만 근래에 들어 우리 사회에 깊이 각인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 전반을 甲乙관계로 보는 조금은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시각들이 대세를 이룬듯하다.


이런 현상을 강준만은 대한민국을 갑과 을의 나라로 정의하면서 그는 질은 의 역할과 책임을 넘어 횡포를 부리는 것이며 이러한 오늘의 사회 병리현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조선 말기부터 있었던 관리는 높고 귀하며 백성은 낮고 천하다는 관존민비’(官尊民卑)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질의 뿌리 깊은 우리의 내상을 언급한다.


해방 이후 갈등과 대립의 핵심이었던 좌우익 사상의 깊은 민족의 상처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고통과 같은 것이다. 왜 이렇게 우리민족은 좋은 것보다는 좋지 않은 것들을 고스란히 내면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와 내 외면적으로 많은 변화를 이루어냈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어만 보인다.


얼마 전 모 국회의원이 ! 너 거기 안서.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내지른 한 마디는 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의식세계는 지극히 권위주의로 가득했다. 소위 서민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진보 정당의 소속 의원의 의식세계가 이러하니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의 의식은 어떨까 싶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으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대표들과 늦은 밤까지 술에 취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술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의식수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와 그 일행은 대리기사를 향해 폭언과 집단폭행을 했다. 그리곤 말도 안 되는 말들로 변명을 늘어놓으며 아직도 대리기사와 국민에게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지 않고 국회에 앉아있다.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던 사람이 국민을 향해 엄청난 죄를 짓고도 죄의식이 없다.


더 속상하고 슬픈 것은 수 백 명의 아까운 생명들을 세월호 침몰과 함께 바다에 묻은 유족의 대표들이라는 사람들도 어느 새 국민의 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세월호 사고 이후 온 국민은 함께 울었다. 내 자식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고 분노하였다. 모두 마음이라도 나누면서 함께 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아니지만 그 중 일부는 슬픔과 눈물의 현장에 정치를 끊어 들여 갈등을 조장하며 이 됐다.


그들을 안타까워하며 성금을 낸 대리기사가 그들에게 당한 폭행으로 병원신세를 지게 됐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자기 무덤을 파듯, 유족들을 돕겠다는 의원과 유족들의 대표가 을 향해 행한 폭언과 폭행은 그들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으며 국민의 가슴에 분노를 심었다. 어느새 많은 국민들은 그들에게서 지쳐가고 있다. 조금씩 마음들이 그들로부터 돌아서고 있다. 진정으로 다가갔는데, 그 진정이 무시될 때 진정은 길을 잃고 방황하다 소멸된다.


어디 국회의원뿐인가? 최근에 군대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의 횡포였다. 사단장이라는 사람이 성추행으로 긴급 체포되는가하면, 선임병들의 집단폭행과 각종 괴롭힘으로 모욕을 당하다 죽음을 당한 윤일병 사건은 에게 행한 더티(dirty)한 행동의 결과였다.


앞서 언급한 모 의원과 유족 대표의 대리기사 폭행 사건에서 사건 조사를 하던 경찰도 사회적, 경제적 약자였던 대리기사에게는 질 같은 처신을 했다. 피해자를 마치 가해자처럼 죄인 취급하는 태도는 에게 굽실거리는 비굴한 의 습성이었고, 그런 이 다른 약자에게는 이 되는 모순의 극치를 보여 줬다. 그들도 소리치지는 않았지만 폭행당한 에게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소리치며 피해자를 가해자처럼 다룬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질로 멍들고 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인권들을 들먹이면서 정작 들은 의 인권에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 남보다 작든 크든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남들 보다 조금 더 배웠거나, 남들보다 물질을 더 가지고 있거나, 남들보다 조금 더 건강하다면, 심지어 인물이 좋은 것까지 상대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청지기 의식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남 보다 조금이라도 더 낳게, 더 좋게, 더 많이, 더 높이를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청지기가 돼야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약자, 가난한 자, 소외 된 자들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다양한 분야의 부자로 만드신 이유이시다.


이런 소명을 망각하고 신분, 물질, 지식, 건강, 종교 등으로 가난한 이들을 향해 , 내가 누군지 알아목소리 높이며 소리 지르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그 소리를 나 자신을 향하여 질러야 한다. 다른 이가 아닌 나 자신을 향해 , 너 네가 누군지 알아라고 크게 외쳐야 한다. 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격언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예수에게 속한 자로 우리의 신분, 소명,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라고 외쳐야 한다. ‘너 누군지 알아’, 좀 더 격하게 말한다면 자신에게 ! 너 네가 누군지 알아라고 물어야 한다. 최근의 일들만은 아니었지만 근래에 들려오는 소리들을 들으면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더욱 심각하고 속상한 것은 같은 모양의 문제들이 쉴 새 없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 리더의 한 사람이었던 김홍0 목사는 2년 실형을 받고 법정구속이 됐고, 여의도의 조용0 목사도 징역 2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그런가하면 최근 삼일교회 전혁진 성도들이 쓴 숨바꼭질이 화재가 되면서 홍대0교회 전병0목사의 성추행 사건이 다시 세간의 화재가 되면서 한국 기독교의 부끄러운 치부들이 세상에 여과 없이 폭로되고 있다. 더 나가 부결되기는 했지만 로마 카톨릭은 동성애와 이혼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무장해제하려 시노드라 불리는 세계주교대위원회를 열어 투표까지 자행했다.


교회는 정죄를 판단하거나 정죄의 기준을 정하거나 변경한 권한이 없다. 교회는 성경이 말씀한 대로 순종할 의무만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동성애자들도 기독교 공동체에 헌신할 자격과 은사가 있다고 말하며 검은 음모를 시도한 것이다.


물론 동성애자들도 오늘 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인권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인권은 죄인이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예수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들의 말대로 기독교 공동체에 헌신하고 참여시키려면 성경에서 금한 죄의 삶으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헌신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헌신, 즉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어떤 이유로든 잘못된 것이다.


비록 그들에게 어절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문제가 있다 하여도 그것이 정죄함에서 면죄 받을 수 없다. 다만 교회는 그들에 대한 배척만이 아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과녁을 벗어난 삶을 바르게 인도하는 일에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이번 시도는 무산되었지만 카톨릭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보다 상황윤리에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아닌 본질이 문제다. 진리가 현실을 이루어야지 현실이 진리화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토론이 아닌 본질, 즉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그 진리에 맞게 교회나 신자는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 목회자, 신자들은 세상에 발을 담그고 세상의 풍류를 즐기는 듯하다.


어느 의원이 세상에 질하며 질러댔던 !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우리 자신에게 질러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만이 다시 새로워지는 길이고, 스스로를 성경으로의 삶을 사는 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지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031일은 루터의 종교개혁 497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직도 미완의 종교개혁을 자신 안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오늘 나를 향하신 주님의 준엄한 뜻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 자신에게 크게 외쳐라.


! 너 누군지 알아


계인철 목사

광천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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