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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중에 거둔 승리(삼상 14:1~52)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15


 


 

병거 3, 마병 6000, 군사가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블레셋에 고작 600명의 병력으로 맞선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석류나무 아래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것으로 믿었고, “여 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다.”고 확신하며(6) 소년 병사 하나와 단 둘이 블레셋 진영으로 침입 한다. 큰 바위로 둘러쳐진 요새라 난공 불락(難攻不落)으로 보였지만 믿음으로 들어가 싸운다.

 

거룩한 전쟁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먼저 어느 나라를 침략하며 전쟁을 벌이는 나라가 아니다. 너무 약했기 때문에 누구를 공격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전쟁이 방어 전쟁, 이스라엘은 그때마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기에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었다.

 

이번 전쟁도 마찬가지, 제사부터 드린 거룩한 전쟁이었다. 제사장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개입을 기원한 것이다. 또 이 전쟁은 법궤가 동원된 거룩한 전쟁이었다(18). 사울 왕이 법궤 동원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전쟁은 금식하며 치른 거룩한 전쟁이었다(24). 이 역시 사울 왕의 명령인데 사실 전쟁 중에 금식 선포가 말이 되나? 고대 전쟁은 온종일 싸울 수도 있었기에 군사들이 먹지도 않고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만큼 절실했던 것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전쟁 중인 군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에게 전쟁은 단순한 방어 전쟁이나 약탈 전쟁이 아니다. 그들은 마치 천군 천사처럼 하나님의 심판이나 역사를 대행하는 전쟁을 치른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지금은 거룩함을 위해 싸워야 할 때 아닌가. 코로나19가 거룩 회복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사인이기 때문이다.

 

혼선에 빠진 전쟁

일사불란해도 이기기 힘든 전쟁이 금식 때문에 혼선에 빠진다. 왕이 금식 명령을 내렸지만 듣지 못했던 아들 요나단이 야생 꿀을 찍어 먹고 만 것이다.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24)이라는 왕의 선언 대로라면 요나단은 저주의 대상이다.

 

급기야 요나단이 한마디 한다.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29~30) 군인들이 배만 고프지만 않았다면 승기를 잡고 더 몰아붙일 수 있었는데 배가 고파서 그렇게 못했다는 말이다.

 

지금 금식이 중요한가? 승리가 중요 한가? 어찌 보면 사울의 금식 강요는 하나님의 개입을 억지로 짜내려는 불신앙일 수 있다. 지금 같은 초비상 상황 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되지 굳이 금식하는 것은 무리 아닌가. 다윗 일행도 사울에게 쫓길 때 너무 배가 고파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성소에 진설하던 떡, 제사장들만 먹는 떡밖에 없었기 제사장 아히멜렉은 그 떡을 준다(삼상21:4). 계명보다 생명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사울과 하나님 사이에 자꾸 엇박자가 난다. 자신의 금식 명령을 아들 요나 단이 어긴 것도 엇박자, 달아나는 블레 셋을 밤새 추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도 엇박자다. 묻는 다고 무조건 잘하는 게 아니다.

바보 같은 우문(愚問)은 차라리 안하는 게 낫다. 하나님의 뜻이 이미 드러 났는데 또 묻는 것은 신앙이 좋은 게 아니라 답답한 것, 주저하는 것 아닐까? 이런 모습은 오히려 불신앙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37). 답답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사울 왕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서 그렇다 며 제비뽑아 그 죄인을 찾겠다고 수선을 떨며 저주하기까지 한다(37). 금식 명령을 어긴 요나단을 죽이겠다는 것이다(44). 이게 신앙인가? 세상에 이런 아비가 어디 있나? 그저 자기 생각과 자기 말에 매여 있을 뿐이며,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요나단이 참 대단하다. 아버 지의 이 어리석은 처사를 받아들인다 (43). 장수답고 아들답다. 문제는 백성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 였음이니이다”(45) 백성들의 반발에 사울 왕은 신앙인 행세를 하다가 권위만 실추되고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사울은 정작 죄에 대해 단호해야 할때는 그렇지 못했다. 금식 명령이 해제 되자마자 백성들이 양과 소와 송아지를 잡아먹을 때 너무 배가 고파 피째 먹었지만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33) 그러기만 할 뿐, 적당히 넘어간다. 이 문제는 훗날 예루살렘 회의에서도 다룰 정도(15:20)로 중요한 문제였다. 사울은 피를 빼고 먹게 한 곳을 제단 으로 삼았다(35). 야곱이 세웠던 벧엘의 돌처럼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았 는데 이는 엉터리 제단과 다를 바 없다.

 

어리석은 금식 명령으로 이런 사단을 만든 장본인인 데에다 중한 죄도 처리를 못하고 어물쩡 넘어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제단을 받아주신 것 같다. 하나님은 엉터리 같은 죄인의 예배라도 받아주는 하나님, 대단하시다.

 

승리하는 요나단

아버지 왕이 어리석은 데 비해 아들 요나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하나 님과 동역하며 큰 구원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은 요나단(45), 흠잡을 데 없는 믿음의 용장이다. 막강한 블레셋 대군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멋진 표현 아닌가? 하나님의 약속도 없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것도 없다고 해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아니 주저앉기는커녕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사랑하는 아버지시라는 확신으로 꽉 차 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블레셋 진영에 간 요나단은 하나님의 표징을 구한다. 연약한 인간이 하나 님의 함께 하심을 확인하려 한 것이다 (8~10).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그들이 우리에게 우리가 가기를 기다리라하면 우리는 있던 곳에 가만히 있을 것이고, 그들이 올라오라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신 줄 알겠다며 그걸 표징으로 삼겠다고 한다. 이게 과연 표징이 될까? 만일 그들이 내려올 정도면 사기가 넘치고 자신감이 있다는 증거지만 반대로 숨어서 올라오라 하면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올라오라고 하자 요나단은 블레셋을 하나님이 우리 손에 넘기셨 다는 표징으로 해석한다(12). 그리고 둘이서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가 삽시 간에 20명을 죽인다(13~14). 엄청난 전과, 졸지에 블레셋 진영이 공포에 떤다(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 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큰 떨림이었더라” ‘떨었다는 말이 반복되며 큰 떨림이었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응답이다. 마중물 같은 믿음의 행동이 하나 님의 큰 역사를 끌어낸 것이다. 이에 블레셋 진영은 혼란에 빠졌다.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 였더라”(20). 그리고 블레셋과 함께 했던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 편에 합세했고, 달아났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합류한다(21~22). 이스라엘이 대승한 것이다.

 

결국 극소수가 압도적인 다수에 이겼다.

성경은 늘 그렇다. 엘리야는 850:1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가나안의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도, 기드온의 300명 용사도 소수였지만 승리했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한다. 혼선이 있고, 혼란 중에 빠져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구원이 있다(23).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며 어떤 상황에서든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희우 목사 / 신기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