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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테라피 9> 일남이, 끝순이 : 출생의 순서가 인생의 순서?

 

 

가족의 구조에 대해 연구하고 배우는 한 수업에서 기억에 남는 그룹활동이 있다.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을 출생순서에 따라 다른 그룹으로 나누었다. 장남, 장녀로 구성된 그룹, 막내들 그룹, 중간에 태어난 middle child의 그룹, 그리고 독자(獨子)들의 그룹까지 네 그룹으로 나누어진 학생들에게 함께 토론하고 결론을 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과제 자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각 그룹들이 과제를 함께 하면서 보여준 특징과 패턴이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다. 첫째로 태어난 친구들의 그룹은 과제가 주어지자 심각하게 서로 토론을 하고 누가 기록을 할 것인지, 발표를 할 것인지 정했다. 토론의 주제와 과정을 정리하고 발표할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적었다.

 

막내들의 그룹은 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웃음과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고,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오가는 듯 했다. 중간에 태어난 학생들 그룹은 다른 그룹들이 과제를 어느 정도 진행시켰는지 관심이 많았고, 독자들 그룹은 시끄러웠던 것은 같은데 어떻게 과제가 나누어지고 발표가 됐는지는 필자의 기억에 없다.

 

한 개인이나 한 가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출생순서는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첫째들은 대부분 책임감이 넘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역할에 익숙한 경우가 많다. 가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양심적이고 모범생 스타일이 많은가 하면, 그래서 좀 꽉 막힌 듯 답답한 특성도 있다. 무엇이든지 처음으로 경험하고, 많은 것들을 제일 먼저 공급받기 때문에 종종 이기적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중간에 태어난 친구들은 부모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애를 써야만 두드러져 보이는 위치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아주 경쟁적이든지, 아주 착하든지, 엄청나게 말썽을 부리든지, 극단으로 치달아야만 뭇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다 포기가 되면 뒷 짐을 지고 아예 확 뒤로 물러나 버리는 방관자나 비판자가 되기도 한다.

 

막내들은 보통은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융통성이 많다. 가만히 있어도 존재 자체가 사랑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별로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 사람이 없다. 대신 부모님과 나이 많은 형제들까지 자신이 이길 수 없는 보스가 한둘이 아니고 자신의 의견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에 늘 화가 난다.

 

독자들은 첫째나 막내의 특성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처럼 애늙은이가 되지 않으면 끼어 놀데가 없다. 관심과 선물을 나눌 필요가 없고 경쟁할 필요도 없지만, 자신에게 주어지는 그 모든 관심이 굉장히 부담스럽고 불안할 때가 많다.

 

자신이 태어날 순서가 성격의 형성이 많은 영향을 미치고, 가족 안에서 자신이 했던 역할이 사회에서 반복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새롭게 꾸린 가정에서 새롭게 생겨난 남편, 아내, 어머니, 아버지의 역할에서도 자신의 특성을 반복하게 된다.

 

최근 한 여자 분이 상담소를 찾아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방금 전에 남편의 책을 몽땅 찢어놓고 왔다는 것이다. 남편이 대학에 다니면서 교재로 썼던 컴퓨터 관련 서적들과 남편이 즐겨 모으던 스타워즈 시리즈를 갈갈이 찢어서 집에다 뿌려놓고 왔단다.

 

무엇이 그렇게 화가 나더냐고 묻자, 남편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책임한지 하소연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 자매의 남편은 한 학기 남겨놓고 대학 졸업을 포기했다. 마지막 세 과목을 계속해서 F학점을 받고, 지금은 한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단다.

 

미국에서는 봉급이 가장 낮은 시간제 직종에 속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저임금에 지극히 만족하며 일하고 있는 남편이 야망도 없고 미래도 없는 ‘Loser’로 보이는 것이다. 함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워가야 하는 시점에서 아내가 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남편은 집안에서 막내로 자랐다. 늘 귀여움을 받았고,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막내에게 준 메시지는 네가 어린 게 뭘 하겠냐? 그냥 가만히 있어. 도와줄게라는 것이었다.

 

막내라 가만히 있어도 사랑 받았지만 아무도 이 막내가 잘할 수 있고,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를 믿지 않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도전하고 뭔가를 이루어가는 일은 해 본적도 기대를 받아 본 적도 없는 것이다. 상담소에 앉아서 그 남편을 개조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그것이 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필자가 다시 자매에게 물었다.

 

자매의 삶에서 바라고 이루어졌으면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그 자매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성공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자기는 항상 특징이 없는 아이로 자라왔단다. 중간에 끼어 태어난 middle child로서 뭐하나 특별난 데가 없었다. 그래서 크게 성공하고 사람들 앞에 드러나서 인정받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남편이 그 목표에 이르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자 그 분노가 여지없이 폭발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의 상처만큼 커져온 분노를 자신을 실망시키는 남편에게 쏟아 부은 것이다. 그 분노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지는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나서야 이 자매는 울음을 그쳤다.

 

Middle child로서 존재감이 없었던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달라고 남편에게 떼쓰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나서야 그 자매는 스스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남편이 이루어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그제야 남편에게 쏟아 부은 폭언과 거친 행동이 미안해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현재의 가정에서 내가 자라나며 맡았던 역할을 반복하며 산다. 현재의 직장에서나 다른 사회 환경에서도 이 역할은 반복된다.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된 가족의 한 사람이 되면, 나도 모르는 새에 장남 역할, 막내 역할, 중간 역할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교회에서 장녀처럼 왕언니가 되서 모두를 챙기는 여선교회장, 뒤에 한 발짝 물러나 모두를 지켜보면서 뭐가 잘못 돌아가는 지를 꼬집어 내는 집사님,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고 잘 웃기고 애교가 만점이지만, 책임지는 일 힘든 일이 있으면 사라져버리는 형제님 등 여러 모양의 역할을 본다.

 

교회라는 가족 안에서 우리는 첫째, 중간, 막내의 역할을 어김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맡았던 그 역할은 내 가족에서 살아 남는 데 보탬이 되고 나의 장점으로 자리 잡았을지는 몰라도, 지금 현재의 환경과 역할에는 맞지 않는 행동들일 수도 있다.

 

첫째로서, 둘째로서, 막내로서, 혹은 독자로서 우리 안에 남은 오래된 상처가 교회에서 아버지 역할을 잠시 감당하고 있는 목사님에 대한 분노로 발전하기도 하고, 어머니 역할을 하는 사모에 대한 불만족으로 반복되기도 한다. 형제자매가 되면 사랑하고 용납하는 마땅한지 알면서도, 서로에 대한 경쟁심과 미움이 새록새록 다시 돋는 것도, 어찌 보면 우리가 가족 안에서 반복하는 패턴의 하나일 수도 있다.

 

그럴 때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우리는 그 아버지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형, 오빠, 동생들과 이제는 조금 다른 사랑의 연습을 해 볼만도 하다. 우리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사랑이 벌써 충분하게 넘치기 때문이다.

 

심연희 사모

RTP 지구촌교회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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