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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테라피-13

떠남 ②



새롭게 시작하는 가정을 위해 첫 번째 단계로서의 떠남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찌로다(2:24)”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시한 떠남의 원리에서 실제적인 측면으로 제일 먼저 경제적 독립이 강조되었다.


오늘은 그 두 번째로 부모로부터 심리적, 정신적 측면에서의 독립을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부모에게서의 정서적인 독립은 마마보이나 Daddy’s girl들이 부모에 대해 심리적인 의존성을 극복하는 과정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정서적 독립성을 다루고자 한다.


바로 부모와의 상처를 현재 관계에서 반복하고 있는 부부들의 역동에 관한 것이다. 교회에서 결혼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커플들을 위해 예비부부 상담을 하거나 신혼부부들을 위해 성경공부반을 열 때, 필자는 꼭 원 가족(Family of Origin)에 대해 나누도록 한다.


새롭게 가정을 이루고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지만, 가만히 부부의 역동을 살펴보면 두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이 함께 사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신랑과 신랑의 부모 그리고 신부와 신부의 부모가 함께 살면서 어릴 때부터 반복해 오던 가족의 역동을 또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자신의 부모, 특히나 부정적인 특징을 가진 부모를 닮은 배우자를 만난다고 주장한다. 필자의 한 친구는 실제로 자신의 남편을 처음 봤을 때 사랑에 빠져서 자기가 먼저 쫓아 다녔다고 했다. 처음 봤을 때 뭐가 그리 좋더냐고 물었더니, 머리카락이 별로 없는 것이 눈에 띄었단다.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친구의 아버지도 대머리셨다. 웃어야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이 이야기가 자신의 부모를 닮은 배우자를 만난다는 주장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얼마나 통계적으로 정확한 이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로 상담소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자신의 아내나 여자 친구가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자기 어머니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혹은 자신의 남편이 매일 술에 쩔어 살았던 아버지처럼 어느새 컴퓨터 게임이나 마약에 중독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원가족에서 겪었던 문제들이 현재의 가정생활에서 또 반복되는 것을 깨닫고, 자신은 아주 운이 없고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결론지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리 싫어했던 부모를 닮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일까? 술독에 빠져 있던 아버지를 증오했는데, 왜 하필 또 중독의 증세를 보이는 남편과 엮었을까?


그렇게 피하고 싶던 강한 어머니를 왜 적극적인 아내에게서 보게 되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아주 간단한 이유는 대머리 남편을 선택했던 친구처럼 익숙함에 있다. 부모에게서 느꼈던 그 익숙함이 배우자를 만나는 핵심 고리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Getting the Love You Want”라는 책에서 Harville Hendrix 박사가 주장한 “Unfinished business”에 있다.


우리가 어릴 때 미처 끝내지 못했던 비지니스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내게 상처 주었던 부모를 고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슷한 배우자를 만나 못다 한 일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가정에 100% 적용되는 이론은 아니더라도, 꽤나 많은 커플의 역동을 살펴볼 때 확실히 일리가 있다.


분명한 것은 어릴 때의 상처를 현재 관계를 통해 치유 받고자 하는 욕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처를 현재의 관계에서 계속 반복하는 데서 생겨난다. S양은 남편과의 잦은 싸움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남편이 계속 잔소리를 하고 자신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씨름을 하다 보면 남편이 일을 하고 집에 들어올 때쯤이면 이미 진이 빠질 데로 빠져 있었다.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집안은 치워도 끝이 없이 난장판이 되는 듯 했고,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둘째 아들을 쫓아다니다 보면 남편이 들어올 때가 되도록 저녁준비가 돼있지 않는 날도 있었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도 잠깐 들지만, 이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남편에게 화가 났다. ‘내 인생은 뭔가, 내가 애들 똥기저귀나 갈고 살려고 돈 들여 공부했나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 날은 대번에 남편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려지기 마련이었다. ‘당신은 대체 뭘 하는데? 당신이 한 일이 뭐 있어? 나는? 내 인생은?’라는 비난으로 시작하고 고성으로 끝이 나는 부부싸움에 지친 S자매는 상담을 요청했다.


남편이 건네는 말 중에 뭐가 그렇게 화가 나더냐는 질문에 S양은 오늘 당신 뭐했어?”라고 대답했다. 남편이 집에 발을 들여놓으며 당신, 오늘은 뭐 했어?” 라고 물으면 그 말이 당신 오늘 뭐 했길래 집안 꼴이 이 모양이야?”라고 들렸다. 사실 남편은 그냥 관심을 보이고 싶어 다정하게 물어 본 한 마디일 수도 있는데, 그 말에 아내는 상처를 받았다.


무심한 한마디의 질문에 아내는 나 정신없는 거 안보여? 당신이 애를 봐줬어, 청소를 한번 하냐?”며 공격 모드로 돌아섰다. 그러면서 아내는 남편에게 비난받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는 갈등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S양은 딸만 있는 가정에 큰 딸로 태어난 자신의 원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아들을 못 낳아서 대를 끊어놨다는 할머니의 비난에 이어 동생이 장애아로 태어나자, 그녀의 어머니의 체면을 세울 방법은 제법 공부 좀 한다는 큰 딸 뿐이었다. 큰 딸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는 끝이 없이 높았고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것 보다 늘 뭔가 더 해내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이 남겨졌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대와 요구는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처럼 느껴졌고 자신은 끊임없이 작은 존재로 각인되었다.


그 기대를 다채우지 못했던 삶은 늘 실패감으로 이어졌고 누군가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에도 상처받는 자존감을 갖게 되었다. “오늘 뭐했어?”라는 남편의 한 마디는 너는 대체 오늘 한 일이 뭐냐?”라는 부모님의 채근하는 목소리와 겹쳐졌다. “애들이 왜 이리 극성이냐라는 남편의 푸념은 , 대체 뭘 하고 사는 거냐, 애하나 똑바로 못 키우고라는 부모님의 비난을 연상시켰다.


S양은 새롭게 시작한 가정에서 남편하고 아이들하고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부모님의 목소리, 비난과 함께 살았다. “너는 뭘 해도 부족해라는 어릴 때의 메시지를 이제는 자신의 남편과의 관계에서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느꼈던 분노와 서운함과 부담감을 이제 부모님의 자리를 대체한 남편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자기 남편도 늘 비판적이었던 부모님과 다를 것이 없다고 절망하면서 남편은 어느새 자신의 부정적인 부모님을 닮아있었던 것이다.


정서적으로 부모를 떠나는 과정은 과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정서적인 독립은 이제 부모의 문제가, 혹은 부모와의 갈등이 내게 그렇게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부모를 사랑하고 잘 섬기지만, 현실이라는 문제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겼던 그 상처를 계속해서 곱씹지 않는 건강한 분리를 의미한다.


부모와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Unfinished business)를 스스로 대면하고 넘어서고 치유받는 과정을 거쳐야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내가 먼저 치유의 과정을 거쳐야 내 배우자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 내가 나의 부모로부터 진정한 정서적 독립성을 확립할 때 내 배우자는 비로소 내 배우자로 보인다. 내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나의 배우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배우자들은 어쩌면 오해받고 있는 지도 모른다.


부모님에게서, 혹은 어릴 때 중요했던 누군가에게서 우리가 받았던 상처를 구분하고 분리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배우자는 그들과 같이 도매 급으로 취급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연희 사모

RTP 지구촌교회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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