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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테라피-21

목회자 및 사모의 시험대 - 해결사


지난해 5, 대학생 나이에 초점을 맞춘 인디애나 코스타에서의 사역을 위해 코스타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중보기도실에 발을 들여 놓으며 느꼈던 느낌이 생생하다. 중보기도실로 들어서며 강의와 상담의 사역을 위한 기도를 받기 위해 팀 앞에 엎드리며 쏟았던 눈물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학생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냥 누군가의 뜨거운 기도를 받는다는 감격 때문이기도 했다. 사모로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젖어 있기만 했던 나 자신에게도 얼마나 기도의 중보가 갈급하고 필요했었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가 감히 이렇게 기도를 받아도 되나, 반신반의하며 어색하기도 했지만, 이후에 이루어진 사역은 이 중보기도의 힘이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 내가 가진 것들을 쏟아내기 이전에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중보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사모이자, 상담자로서 나의 역할은 대부분이 주는(giving) 데에 있다. 기도를 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만져주고, 영적, 정신적, 때로는 육적인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 주어야 하는, 꼭 부모같은, 주는 역할이다. 상담자든, 사회복지사이든, 목회자이든, 사모이든 우리는 돕는 자(helper)’로서의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목회자와 사모, 그리고 그 자녀들을 만나면서 계속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와 사람들을 영적으로 자라도록 돕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다. 바로 돕는 자로서의 선한 동기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목회를 포기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수많은 목회자와 그 가정의 중심에 있다. 그래서 이 선한 동기는 교회가 잠시 어려워져도, 목회자의 부족함 때문에 공격을 받는 상황에 놓여도, 우리끼리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정죄할 수 없는 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제 막 안수를 받고 목사와 사모라는 무거운 이름을 지겠다고 나서는 후배들이 한없이 모자라고 연약해도, 무조건 안쓰럽고 예뻐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선한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돕는 자로서의 선한 동기와 정체성이 엄청난 시험대가 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돕는 일에는 우리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돕는 일이 얼마나 큰 지혜를 필요로 하는지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시험대에 노출된다. 그 위험은 너무 많이 도와주려 하는 상황에서 자주 시작된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위한 해결사가 되는 것이다.


첫째는 너무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에 집중하느라 자신을 돌보는 일(self care)을 잊어버릴 때 일어난다. 도움을 주는 일과 자신을 돌보는 일에 균형이 깨질 때 우리는 지치기 시작한다. 자신을 부인하고 내 삶, 내 가정을 포기하며 교회를 돌보았던 우리의 수많은 선배 목회자들 덕에 우리 한국 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모든 것을 희생해서 일구어낸 교회 안에서 막상 목회자는 지칠 대로 지쳐있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는 상태에 도달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줄 것이 없이 쏟아 붓기만 했던 목회자는 자신을 존경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시선과는 달리, 안이 텅 비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한다. 자신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는 목회자에게는 책임과 결과가 따른다.


돕는 자로서의 정체성은 선한 동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에는 부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자칫하면 다른 이들을 돕는다는 핑계로 자신의 정서적인 필요를 채울 때가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것이 돕는 일에 숨겨져 있는 두 번째의 위험이다. 우리 돕는 자들은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이것이 좋은 동기에서 시작되지만 어느 순간 우리의 고정된 패턴으로 굳어지면서 자꾸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석처럼 끌려간다.


우리 안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Our needs to be needed) 욕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나아지고 발전하도록 돕고 싶어 하지만, 우리 자신의 욕구 때문에 상대방이 나아지는 것을 방해할 때도 있다. 꼭 환자가 계속 병원으로 오게 하려고 완전한 치료를 미루는 의사 같은 모양새가 된다. 그 사람이 나아지면 나를 더 이상 찾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서 계속 나를 필요로 하도록 바라는 것이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그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사력을 다해 돕다가 그 배우자가 막상 술을 끊고 나면 오히려 이혼의 수순을 밟는 경우이다. 돕는 일에 너무나 치중에 있던 사람은 배우자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일이 적어지면 어쩔 줄을 모른다. 바로 ‘co-dependency’의 특성이다. 마치 막내 아이가 자라지 않고 내 옆에 영원히 아기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는 마음과 비슷하다. 돕는 자가 놓치기 쉬운 함정이다. 우리는 우리를 의지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바로 부족한 그 누군가가 내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기는 상대를 돕는 것이 아니라 파괴시킨다. 이러한 현상은 돕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종종 일어난다. 목회자나 상담자도 예외일 수 없다. 나의 도움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상대방에게 건강한 선(boundary)를 그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도 할 수 있다고 상기시켜 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람의 해결사가 되는 것이다.


내가 다 해주겠다고 팔을 벗고 나서는 식의 도움은 상대방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믿음을 확인시킨다. 목회자나 상담자를 지나치게 의지하도록 만들면 그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에 본의 아니게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다 도와주고, 다 고쳐주려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목회자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은 내가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성도들이나 교회를 내가 끌고 나가려고 하지 않고, 내가 다하려고 하지 않고 주님께 올려드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온전히 맡길 때에야 우리는 제대로 섬길 수 있다. 지혜롭게 도울 수 있다.


목회자의 정신건강과 자신을 돌보는 일(Self Care)의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잘 돕기 위해서이다. 자신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해서, 안으로는 허전하고 텅 빈 듯 지쳐있는 돕는 자는 결국 신앙이 약하고 어린 사람들을 이용하는exploit 무서운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는 성도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묶어 놓는 것이다.


종종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성추행이나 외도 등의 문제도 자신을 돌보는데 실패한 목회자들에게 일어나는 덫 중에 하나이다. 비행기에 타면 스튜어디스들이 비상시에 대처하는 법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산소 호흡기 쓰는 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린 아이들을 동반한 경우에 아이부터 산소 호흡기를 끼우지 말고 부모부터 착용하라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돕지 못하는 상황에 닥치면 둘 다 죽는다. 목회자는 교회에서 부모의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부모가 호흡하는 기능을 잃으면 아이들을 살릴 수 없다. 목회자가 빈껍데기처럼 더 이상 줄 것이 없도록 지쳐버리면 성도들이 도움을 청할 때 두려워지기도 하고, 도움을 받고도 자라지 않는 듯 보이면 미워지기도 하고, 나한테 그만큼 잘하지 못하면 서운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 사람을 고쳐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지치고 피곤해지면 상대를 비난하게 된다.


일반 심리학에서 자신을 돌보는 법은 자신을 어떻게 행복하게 하는가에 초점을 둔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참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논리이다. 그런데 이런 계산법에는 돕는 자들이 명심해야 할 지혜가 있다. 우리도 받아야 줄 수 있다. 그런데 세상적 계산법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목회자들이나 사모들에게 있어 산소 호흡기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지혜롭게 도우려면 자신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한다. 나를 챙기는 이기심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며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충만해야 한다. 한 선배 목사님께서 사역이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우리가 다 담을 수도 없는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아마도 돕는 자들로서의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 그 누군가의 기도가 가장 많이 필요할지 모른다. 누구보다 그 사랑을 누려야 할지도 모른다. 받는 법을 잊어버린 목회자는 잘 주는 법도 잊는다.


심연희 사모

RTP 지구촌교회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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