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하위키미러’에 실린 설명이다. 과거에 어린이들이 많이 사용하던 ‘동무’라는 단어는 ‘친구’의 의미로서 본래 한국 전역에서 쓰이던 말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공산혁명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의미변형을 시켰기 때문에 강한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해왔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동무라는 단어가 거의 죽은 말이 되다시피 하였고, 이 단어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춘천 파출소장 딸 살인사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오랜 세월 옥살이를 했던 정원섭 목사에 따르면, 1964년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교회 전도사로서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라는 현수막을 교회 앞에 내걸었다가, ‘동무’라는 말을 썼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온종일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적인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70년대에 제주도에 살던 고교교사 한 사람이 술에 취해 동무라는 말을 내뱉었다가 전기고문까지 당해서 정신병자가 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동무가 ‘친구’로 대체되었다. 순 한국말로 대체하고 싶을 때는 ‘벗’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만 ‘어깨동무’, ‘길동무’, ‘말동무’ 등과 같이 합성어로서는 자주 사용되고 있다.
문제 청소년이나 비행청소년을 둔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아이가 질 나쁜 친구들과 사귀다가 저들의 영향으로 인하여 나쁜 길로 갔다는 핑계를 자주 댄다. 자신의 아이로 인해서 그의 친구들이 나빠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무튼 친구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다 성장한 성인들도 친구의 영향을 받는데, 하물며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들은 오죽 하겠는가? 암논이 자신의 이복여동생을 근친상간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게 된 데에도 그의 친구의 영향이 매우 크게 작용하였다(삼하13장).
암몬의 친구 중에 ‘요나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교활하기가 짝이 없는 인물이라 암논에게 이복여동생 강간하는 수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없었다면 암논의 범법행위 역시 자행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말을 짝사랑하는 암논이었다 할지라도 정염으로 끓어오르기 마련인 사춘기를 무사히 넘겨 성인이 되었다면, 이러한 끔찍한 일이 터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유유상종. 같은 종류들끼리 잘 모이는 것은 상식이다. 소도 떼 지어 다니고, 사슴도 떼 지어 다니고, 양도 떼 지어 다니고, 물고기도 떼 지어 다닌다.
이러한 떼들은 보기가 참 좋다. 하지만 도둑이 떼 지어 다니는 것이나 폭력배들이 떼 지어 다니는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떼에 속한 자들은 서로서로 악해지기를 경쟁한다. 더 악하고 더 잔인해야 자신의 설 자리를 확보하기에 주사파 종북주의자들이 북한의 독재정권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서로 더 과격해지기를 경쟁하는 것과 같이 악행을 주저하지 않는다. 악심도 이신전심 된다.
요나답의 교활한 마음이 암논에게 그대로 전달 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왜 착한 마음이나 행실은 잘 전이되지 않고 악한 마음이나 악행은 잘 전염되는 것일까? 바깥에서 볼 때 더러운 연못도 일단 그 속에 뛰어들면 그 더러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보였던 특정 그룹이라 하더라도 본인이 막상 그 그룹에 속하게 되면 객관적 시각이 주관적 시각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어느 부류에 소속되어 어떠한 사람과 친구가 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안타까운 일은 나이가 들수록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세상 친구는 더욱 그러하다. 믿음과 인격으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친구가 되자.
노주하 목사 / 찬양산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