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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력 있는 신앙“

지금 이 시대는 분별력이 없어서 혼란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 자신이나 선악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주어질 수 없고, 전혀 반대로 선악에 대한 자기의 모든 지식을 떠나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시도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자기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력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고”(1:9~10; 2:18). “빛의 자녀답게 주를 기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라”(5:9). 이러한 관점들은 하나님의 의지의 단순한 인식이 모든 반성을 배제하는 직관의 형식 즉, 첫 번째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소박하게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해야 하며 또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의 단순성을 심리학적으로 의심하며 불순종하는 것도 근본적인 수정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하나밖에 없다고 단순하게 무조건 인간의 마음을 강요하거나, 또 하나님의 뜻은 전혀 자명한 것이고 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많은 가능성 밑에 얼마든지 깊이 감추어져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단순한 생각 속에 처음부터 확고하게 정해진 규범의 체계가 아니라 우리 인생들의 삶의 다양한 상황에 그 때 그 때 새롭고 다양하게 작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항상 거듭거듭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감동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인간의 생각, 오성, 관찰, 경험 등은 이러한 분별에서 상호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서 이미 선악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뜻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적인 조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또 이 은총은 날마다 새롭게 존재하고 계속하여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우리들의 최대의 관심사이어야 한다. 그 때 그 때 오직 분별하는 사람에게는 새롭게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뜻은, 마음의 소리나 어떤 환경의 외적조건, 혹은 어떤 보편적인 원리와 절대로 혼동될 수 없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거기에 대한 결정적인 전제조건은 이 분별이란 오직 변모’(Metamorphose)이다. 종래의 형태의 완전한 내면적 변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12:2),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5:9)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간의 이러한 변호에서 타락한 인간, 이 죄악 된 아담의 모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간인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보면 명백해진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오직 새로운 모습을 갖는 데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모습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짐으로써는 불가능하게 된다. 선악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 인간이 자기 판단과 기준으로 하여 행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사랑 안에 살고 사랑이 더해지는 것이 분별의 전제조건이라고 한 것이 이와 동일한 사태를 가리킨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 살고 사랑이 더해지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 화해하고 일치된 곳에서 사는 것을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 자신이나 선악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주어질 수 없다. 또 선악에 대한 자기의 모든 지식을 떠나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시도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서만 가능하다. 그러면 분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왜 그것이 필요한 것일까? 이런 질문은 논리적으로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 자체가 위험한 질문이 될 수 가 있기도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변모, 갱신, 사랑 그리고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하면 내가 하나님과 새로운 생활,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생활 속에 머물고 계속해 나갈까 하는 물음이 날마다 새롭게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 물음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아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인간 자신의 선악에 대한 무지를 뜻하는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을 지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인간이 소유하는 모든 지식의 근원을 배제함으로 성립되는 매일 매일의 주님의 마음과 뜻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별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지켜지고, 보존되고, 인도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뜻과의 자비로운 일치를 아는 데서 생기며 이 지식을 구체적인 생활 가운데서 매일 새롭고 확고하게 해 나갈 방안을 강구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교만하거나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확신에 찬 분별이며, 언제나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이루어지는 분별력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회복된 근원과의 일치를 전제로 하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주 예수 안에서의 분별을 이루어야 한다. 분별이란 그리스도인이 보다 심층에 있는 자기의 판단이 있기 전에,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특별한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직관하는 능력이다.


신중함은 초연함을 바탕으로 형성되듯이, 분별은 이 둘로부터 나온다. 도덕주의는 완고한 양심과 하나님을 향해 닫아버린 마음을 표시하는 징표가 되기도 한다. 도덕주의의 대안은 수수께끼 상태인데도 선뜻 모험적으로 인간 윤리 도덕측면에서 판단과 결단하기를 좋아하는 태도이다.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목적을 숙고할 때, 우리는 내면적인 자기의 통고들(the intimations of the self)을 신뢰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은 예민함과 집중과 통각(apperception)을 요한다. 가장 어렴풋한 암시에도 민감해야 하며, 이를 밀접하게 주시하고 내면의 성령의 감동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확실히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빛을 보여주시고 방향을 가르쳐 주시고 방법의 지혜를 넣어 주시는 것이다.


어떤 집에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쌍둥이 형제를 잘 구분할 수가 없었으나, 부모는 쉽게 형과 아우를 알아보았다. 세월이 흘러 쌍둥이 형제가 한날에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시집 온 색시들은 자기 신랑을 분간할 수가 없어서 고민이었다. 하루는 작은 아들의 부인이 방에서 화장을 하고는 마당에 나갔다. 그 때 마침 큰아들이 외출했다가 마당으로 들어섰는데, 작은 색시는 자기 서방님인 줄 알고 방긋 웃으며 저 곱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큰아들이 나는 큰아들입니다라고 하자 작은 색시는 대단히 부끄러워서 부엌으로 들어가 뒷문을 열고 나갔다. 또 큰아들도 미안했는지 뒷마당으로 돌아갔다. 작은 색시가 부엌 뒷문을 열고 나서는데 자기 신랑이 모퉁이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반가워서 여보, 당신인 줄 알고.”하며 말하였다. 큰아들은 또 당황하여 이 사람이 아직 큰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작은 색시는 또 다시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이 색시의 분별력 부족을 쉽게 해결할 분은 부모님께 여쭈어보고,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박쥐는 깜깜한 밤에만 활동한다. 어두워진 숲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박쥐는 잘 날아다닌다. 이것은 박쥐가 내는 초음파가 물체에 부딪쳐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장애물도 무사히 피해갈 수 있는 탓이다.

우리의 믿음 역시 어둠 속에서 특별히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영의 초음파를 지녀야 할 것이다. 필요 없는 물체에 부딪쳤을 때 되돌아와서 앞길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식별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분별력을 예리하게 훈련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벌레들은 바람의 언어를 읽는 더듬이를 가지고 있어서 땅속에 있어야 하는 시간과 알을 깨고 나오는 시간을 알며, 노래할 때와 일할 때의 경계를 분간할 줄 안다. 그래서 한자의 바람 ’()자에 벌레 ’()자가 붙어 있다고도 말한다.


나뭇잎 하나의 흔들림에서 바람이 지나는 것을 보듯이 우리는 이 시대의 바람을, 정신과 문명 그리고 세계의 짐승 위로 부는 바람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도 가정도 집단에서도 바람을 보고 읽을 줄 모르면 풍향을 알지 못한 채 돛을 다는 뱃사공의 비극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시대에 부는 바람을 구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런 때는 누군가 바람을 손가락질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가장 바람을 많이 타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야 한다. 그래서 바람 닭은 지붕 위에서도 가장 놓은 용마루에 자랑스럽게 꽂혀 있는 것이다. 과연 이 시대의 바람 닭은 누구인가? 그가 제대로 바람 닭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바로 내 자신입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분별력을 가진 베드로를 깨우친 새벽닭처럼, 주님의 음성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분별력을 주옵소서!

/ 고흥식 목사 영통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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