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는 FA+M+I+L+Y의 결합으로 각각 FAther, Mother, I, Love, You를 말한다. 아빠가 엄마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가족이다. 아담이 하와에게 사랑의 고백을 한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사랑은 서로에게서 한 몸 됨의 관계를 말한다. 이처럼 부모가 서로 사랑하는 가족에 있어서 아이들은 부모가 한 몸 됨의 관계를 보게 되는데 이것을 ‘동일메시지’(同一 Massage)라고 부르고 싶다. 아빠와 엄마가 한 몸이고 부모와 자녀가 한 몸이라는 의미의 동일메시지다. ‘세상은 남녀평등이다, 여성상위다, 역차별이다’ 라고 말을 하지만 수평관계도 아니고 수직관계도 아닌 그저 한 몸일 뿐이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주시니라”(엡 5:22~23)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누가 위냐 아래냐가 아니라 머리와 몸이 한 몸이 될 때 온전한 인격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자식을 앞세워 천국행으로 보내놓고 왜 슬픔이 없겠는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감사로 숙성시키는 목사가 있다. ‘별세한 부모는 발밑에 묻고 죽어간 자신은 부모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떠나간 자식을 가슴에 묻으면서 보화인양 변모시킨다는 것은 범상(凡 常) 초월신앙이 아닐 수 없다. 마땅히 뭇사람의 위로를 받아야할 장본인 같은데 도리어 뭇사람을 위로하고 있으니 삶의 도치법(倒置法)치고는 과연 희귀한 일이로다. 그 장본인은 국내외적으로 성공한 목회자이며 더욱 명설교 목사로 인정 받는 이름 있는 목사였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목사의 41세 청춘아들이 암투병하다가 인생을 마치고 부모와 처자식 곁을 떠나게 됐을까! 세상적인 행복의 기준으로 본다면 불행일 것 같기만한데 왜 하나님은 그목사에게 그렇게 하셨을까? 이렇게 인간이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하늘아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벤트 때문에 악고론이라는 신학이 나왔던 것이다. 아비 목사는 아들의 죽음을 예견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했다. 가을이 오는 산책길에서 “코로나의 안개가 아직도 자욱하여 걷는 이 길이 가슴 저리게 슬프다. 하지만 가을 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걷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다른 방언으로 설교함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행2:13)고 비방했다. 바울 사도는 옥중서신 에베소서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권면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15개국 이상의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제자들의 성령충만의 모습은 마치 새 술에 취한 자들로 보였다. 세상 술에 취하여 살아온 저들이 주예수님의 유언대로 과연 성령의 새술에 잔뜩 취해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전혀 다른 전도자로 변화됐다. 오순절 이전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으로 세상과 짝하며 살았으나 오순절 후에 변화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세상이 보기에 성령충만으로 새 술에 취한 자로 주님의 복음 전도자로 변화됐다. 오순절 이전에는 모두를 자기가 더욱 잘난 사람으로 말에나 일에나 모두가 교만한 자들이었고 반목질시하며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으나, 성령충만받은 저들은 보다 높은 자리나 좋은 자리, 보다 인기있고 유익한 일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언어 생활의 변화에서 인격과 생활이 변화되어 역동적 대담성과 성령의 은사로 원수
코로나19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격변의 시대를 지나면서 우리의 일상이 멈췄다. 직장에서 일하는 모습이 달라지고 있고, 경제활동의 종류와 양상이 변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돈을 번다는 사람과 돈을 잃는다는 사람이 극명하게 갈린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당연히 여겼던 것들이 불가능해졌다.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떠는 것은 물론이고 집 밖에서 몰려 노는 아이 들의 고함소리, 웃음소리도 그쳤다. 하다못해 아프신 부모님을 방문하는 일도 금지됐다. 노환으로 몸이안 좋으셔서 요양원으로 가신다는 집사님의 전화가 마지막이 됐다. 목회자로서 심방도 심지어는 장례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교회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도할 수도, 나가서 전도도 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이다. 사람에게 너무나 자연스러 웠던 삶의 모습들이 다 멈추어 섰다. 그리고 언제 이 사태가 종식될 지는 기약이 없다. 모든 것에 쉼표가 붙여졌을 때 우리는 갑작스러운 ‘정지’의 순간 앞에 선다. 여태껏 해오던 일들도, 숨가쁘게 달려가던 삶도 멈추어 섰을때 당혹감과 혼란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알코올 중독이 몇십 년째 계속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 빈 잔에 대체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그 시간에 무엇
“엄마는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초등학교 2학년이 썼다는 “아빠는 왜?”라는 시다. 아빠라는 존재가 초등학생 아이에게 냉장고보다,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인 듯한 모습에 글을 읽으며 남자로, 아빠로서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이것이 어느 한 아이 만이겠는가? 한국에서 아빠라는 자리, 남편이라는 자리가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요사이 더 많이 접하는 연애인 사망뉴스, 가족사망 뉴스가 사람의 가치나 존엄을 망가지게 한다. 어느 연구에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외롭다’, ‘괴롭다’거나 ‘슬프다’와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 또 ‘나’라는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며,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단어를 적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보다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이 쓴 글에서처럼 자신 위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이라서 기보다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믿음에서조차 “우리 가족”,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민족” 등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은 “내”라는 의미를
옛날에 어떤 나무 꾼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 해서 산에서 내려오다가 지게를 받쳐놓고 땀을 닦고 앉아 쉬고 있는데 처음 보는 예쁜 새 한마리가 앞에 날아와 앉았다. 나무꾼은 생각하기를 이 새가 사람들에게 들었던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바로 그 파랑새일거라고 생각하고 저 파랑새를 잡으면 내게 엄청난 행운일 올 거라고 생각하고 새를 잡으려고 살금살금 다가가면 새는 몇 발짝을 폴짝 날아가고 이번에는 잡아야지 하고 살금살금 가서 손을 내밀면 새는 폴짝 날아가서 몇 발짝 앞에 걸어가는 것이었다. 손만 펴면 잡힐 것 같아서 숨을 죽이고 잡으려고 하면 새는 저만치 달아나고 잡힐 듯 잡힐듯하면서 잡히지 않아서 안달이 난 나무꾼은 한 발 한 발 새만 보고 좇아가다 보니 새는 간 곳 없고 나무꾼은 깊은 산속 에서 길을 잃고 그만 날이 저물었다. 나무 꾼은 산을 헤매며 고생하다가 나무꾼을 찾아 나선 동네 사람들에 의해 간신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성실하게 일을 해야지 행운을 바라고 허황된 꿈을 쫓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파랑새를 잡겠다고 좇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로또복권이 내 인생에 파랑새가
제주도에서 막내 딸 내외가 상경한 것은 그의 첫 아들이 미군으로 한국에 파견해서 주말이면 외갓집에 들리고, 또 그의 둘째 아들이 대학원에 재학 중이라서 주말이면 외갓집에 오는 지라딸 내외는 친아비어미보다 자기 지식 들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나와 할멈 그리고 저들 식구 네 사람 합해서 여섯 식구가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모두 조용하게 식사를 하는데 그들의 외할머니 측 나의 할멈이 이 식탁에서 좌장(座長)이 되어 시사이야기를 비롯해서 약간의 성경이야기 그리고 딸을 키웠을 때의 에피소드까지 겹쳐 할멈은 명강사가 되는 아침식탁이었다. 모든 식탁 식구들이 할멈을 향해 눈을 주목하고 또 할멈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따금 고개도 끄덕였다. 할멈의 장광설(長廣說)에 무반응자 세를 취하는 자손은 그 누구도 없었다. 나는 할멈의 강의(?)중에 식탁 식구들에 대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다. 학벌문제였다. 밥이나 먹지 무슨 때늦은 학벌생각인가. 정말 본의 아니게 조금은 쑥스럽지만 실토하자니, 사위도 서울의 일류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좋은 직장생활 하다가 은퇴를 했다. 딸도 서울 명문여대 미술학과를 나왔고, 미군으로 복무하는 첫 외손자도 미국의 조지 메이슨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중에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던 중 에돔 땅을 둘러 행하므로 저들의 마음의 불안으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므로 백성 중에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니 죽은 자가 많게 되자 모세는 백성을 위해 회개의 기도를 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민21:8)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말씀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16)고 증거하 시고 구원의 요절 말씀을 주셨다. “너희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율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 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니라”(출16:26)라고 첫 번째 여호와 라파(치료자)임을 선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하여 개인의 자아상을 분석하는 것을 교류분석(Transactional Analysis)이라 한다. 교류분석은 성격, 대인관계, 의사소 통에 관한 이론의 하나다. 자아(ego)는 크게 3가지(어버이자아, 어른자아, 아이자아)로 나뉘고 어버이자아는 비판적이냐 양육적이냐 두 가지로 나뉜다. 아이자아는 자유아이자아, 교수아이자아, 적응적인 아이자아로 나뉜다. 적응적인 아이자아는 반항적으로 적응하느냐, 아니면 순응적으로 적응 하느냐로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짧은 글로 교류분석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반항적으로 적응한 아이나 모범적으로 적응한 아이나 둘 다 상처가 있고, 3세대의 관계적인 측면에서 역기능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 우리는 단지 모범생이면 괜찮지 않느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부모에 의해 상처를 받게 되면 자신의 실제적인 참 자아가 숨어 버리고 모범생으로 적응되어진 가면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역기능 가정에서 받은 상처는 내면에 수치심을 끌어안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상담자나 봉사자, 또는 목사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반항아의 가면을 쓸 수도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인간과 세상의 구원과 치유와 회복과 재건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의 행동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권능의 행동은 “하나님의 영” 혹은 ‘성령’으로 불리어지는 존재로써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이뤄진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성령에 의해 이뤄지는 하나님의 권능의 행동인 것은 그의 침례와 함께 임한 성령 강림의 체험과 그 이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으신 것과 유대 광야에서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기고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메시아’의 사명 (직분)을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의 권능으로 기름 부어주셨기 때문에 시작됐다고 제시하셨다(눅4:18~19). 예수님은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치유하시는 권능의 역사를 감당하신 것이다(행10:38). 예수님의 사역 속에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하고 있었다는 것은 먼저 그의 가르치는 사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