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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세속적 성공 아닌 자신을 낮춰 세상과 소통할 때”

종교개혁가들 ‘오직 성경’ 한목소리 … 침례교회가 시대적 소망 부응


종교개혁지 탐방+이태리 12일(독일항공이용)  체코/독일/스위스+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 탐방기간 : 2017년 3월 27일(월) ~ 4월 7일(금)
■ 탐방지역 : 인천-뮌헨-프라하(체코)-비텐베르크-라이프치히-아이제나흐-하이델베르크-보름스(독일)-인터라켄-루째른-취리히-제네바(스위스)-밀라노-피렌체-로마(이탈리아)-뮌헨-인천



“나 유관재 목사요, 유럽 종교개혁지에 함께 갑시다.” 2월 중순 화요일 신문마감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기 무섭게 총회장이라고 뜬 핸드폰을 받고 난 뒤, 나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떤 사람은 침례교회가 종교개혁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기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주는 무게감과 숫자도 듣기에 더욱 좋았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총회장 유관재 목사와 함께 떠난 35명은 유럽 종교개혁지의 발자취를 따라 나섰다. 침례교 총회(총회장 유관재 목사)가 주관한 유럽 종교개혁지 탐방은 크게 서울 서부지방회, 성광교회, 총회·기관 세 팀으로 이뤄졌다. 종교개혁지 순례 대장정은 ‘얀 후스-루터-츠빙글리-펠릭스 만츠-칼뱅’ 등 개혁자들이 활동한 주 무대를 따라 나선 일정이었다. 특별히 35명의 순례자들은 “종교개혁가들이 한목소리로 외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침례교회사적 입장으로 재조명하는 기회가 됐다”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잘못된 현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에 침례교회가 크게 쓰임 받도록 기도하는 자리였다”고 입을 모았다.


가장 먼저 방문한 체코에서 우리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만났다. 그는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 앞서 로마 교황청에 맞서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주장했던 인물이다. 얀 후스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화형을 당하는 순간 100년 뒤, 종교개혁을 성공시킬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얀 후스는 우리 순례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한 침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로 다가섰다. 기자는 며칠 후 독일 보름스에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 동상아래 오른편에 십자가를 들고 있는 얀 후스 동상도 함께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14세기 후반에 체코(보헤미아)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었다.


프라하(카를)대학 학장이기도 한 얀 후스는 1401년 로마 가톨릭 사제 안수를 받고, 이듬해부터 프라하 베들레헴 채플에서 설교했다. 영국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얀 후스는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교회의 법은 신약성경이요,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와 같이 청빈하게 생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뒤, 로마 가톨릭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1409년에는 프라하 내 보헤미아파 사람들의 지도자가 돼 교회 개혁과 민중들의 정치적, 종교적 권리를 대변하게 되면서 가톨릭 교권주의자들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얀 후스는 특히 성만찬 예식을 거행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등 당시로서는 이단적인 행동을 했다. 체코 개신교의 상징이 십자가가 아니라 성배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청은 얀 후스를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공의회에 소환해 화형에 처했다. 얀 후스는 죽기 전에 “지금 당신들은 한 마리 거위를 죽이지만 100년 후에는 굽지도 삶지도 못할 백조가 등장할 것”이라며 루터의 출현을 예언했다. 


계속되는 종교개혁지 순례 길에서 우리는 1517년 부패한 가톨릭 교권에 대항해 95개조 명제를 게재한 마르틴 루터를 비롯해 츠빙글리와 펠릭스 만츠, 장 칼뱅등 대표적인 종교개혁가들의 행적을 둘러봤다. 유관재 총회장은 마르틴 루터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중요한 순간들, 그리고 그 순간이 기록된 장소들, 그리고 그 장소를 여행하는 방법들을 우리들에게 잘 정리해 알려줬다. 유총회장은 또한 루터가 태어난 집,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비텐베르크 궁정교회 정문, 루터가 목숨을 걸고 신념을 주장한 장소, 루터가 성서를 번역한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 루터가 결혼한 교회, 루터가 사망한 집 등 루터의 전 생애를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면서 그와 관련된 장소를 가이드의 설명에 부연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줬다.


특히 신학적·교리적 접근이 아닌 역사적·시대적 배경을 근거로 루터의 생애와 그 장소의 설명을 자세히 자료사진과 함께 덧붙여 보여줘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모든 종교개혁지 탐방 장소들은 유관재 총회장과 함께 함으로써 마치 여행기를 읽듯 쉽게, 그러면서도 중요한 핵심을 놓치지 않으며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단순하게 설명만 하고 끝나면 시대적 소명을 놓쳐 역사적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종교 개혁지와 관련된 장소가 있는 도시들을 찾아가는 방법, 그 도시 내에서 관광할 수 있는 명소들, 레스토랑과 먹거리들, 호텔까지 모두 설명을 곁들여 줬다. 유관재 목사는 여행 내내 모든 순례자들에게 끊임없이 먹을 것을 나눠주고, 한 장소라도 더 보여주기 위해 사비를 털기도 했다. 


(재)기독교한국침례회 유지재단 이사장인 엄기용 목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새롭게 교회 갱신운동을 펼치지 않는다면 위기를 맞을 수 있다”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말씀과 기도로 다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꿈이있는교회 최일형 목사는 “유럽에 와서 직접 종교개혁가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니, 정치권력과 명예, 돈 때문에 성경을 거스르는 종교인들을 향해 가슴을 치면서 설교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스위스 종교개혁사의 첫 페이지는 칼뱅에 앞서 츠빙글리(1484~1531)가 열었다. 츠빙글리는 칼뱅보다 25년이나 먼저 태어나 스위스 종교개혁의 성격을 결정한 개혁자, 애국자, 신학자 그리고 목회자였다. 츠빙글리의 무대는 취리히를 비롯한 스위스 내의 독일어권 지역이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로마가톨릭 사제였던 츠빙글리도 면죄부 판매와 교황 제도를 비판했다. 스위스에서는 종교개혁가이자 개혁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츠빙글리가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로 일하며 체계적인 성경강해로 명성을 날렸다.


루터의 영향으로 취리히의 종교개혁에 나섰다. 가톨릭을 고수하는 주(州)들과의 전투에 종군목사로 참전했다가 그는 카펠 전투에서 전사했다. 지금도 카펠에 서 있는 기념비에는 츠빙글리가 죽을 때 남긴 말, “너희가 나의 몸을 죽일 수는 있으나 나의 영혼은 죽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그 후에는 스위스의 종교개혁 운동은 J.H. 불링거에게로, 그 다음에는 장 칼뱅에게로 넘겨졌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목회자로 오면서부터 로마가톨릭 내의 보수적인 세력들에 맞서 교회개혁을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개혁진영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유아세례의 문제였다. 개혁주의 안에서 급진주의자들은 유아세례가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하여 ‘재 침례’를 시행했다. 그래서 ‘아나뱁티스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하나의 대립은 교회에 대한 이해였다. 츠빙글리는 교회가 거룩한 사람들만 아니라 죄인들도 섞여 있는 공동체라고 주장한 반면에, 아나뱁티스트는 교회란 거룩한 성도들만의 모임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성도들의 공동체에서 파문하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에 대한 입장에서도 차이가 났다. 아나뱁티스트는 교회와 국가는 서로 분리돼야 하며, 국가가 교회문제에 간섭해서도 안 되고 교회개혁을 이루는 일에 국가를 끌어들여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교회와 국가가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츠빙글리는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가톨릭주의자들에게 반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적인 아나뱁티스트에 반대하면서 자신의 개혁을 이뤄나갔다.


먼저 츠빙글리는 1522년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폐지하고 결혼을 허락해줄 것을 의회에 청원하기도 했다. 1525년은 츠빙글리의 개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부활절에 미사가 성만찬으로 대체된 것이다. 예배는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진행됐으며, 금이나 은으로 만든 성찬기가 아니라 나무로 만든 소박한 접시와 잔을 사용하고, 불필요한 의식들은 제거하고 단순한 예식으로 진행하여 개혁교회 성만찬의 모범으로 남아 있다. 루터와의 성만찬 논쟁도 유명하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강력하게 주장한 반면, 츠빙글리는 합리적인 기념설 혹은 상징설을 택했다.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하나의 기치를 내걸고 개혁운동을 시작한 개혁자들이 바로 그 성서의 해석 문제로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유럽 종교개혁지 순례단의 가장 큰 소득은 단연 아나뱁티스트의 창시자인 펠릭스 만츠(Felix Mantz, 1498-1527)와의 만남이다. 교회 분열을 조장하는 펠릭스 만츠 등 아나뱁티스트에 대해 개혁파를 따르는 시의회는 ‘재 침례’를 베푼다 하여 그들을 물에 빠뜨려 죽였고, 추방했으며, 화형을 시켰다. 물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시행한 주체는 시의회였다고 한다. 당시 20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아나뱁티스트가 죽었는데 희생자 중 85퍼센트가 로마 가톨릭이 있는 지역에서 순교했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와 전통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아나뱁티스트를 더욱 핍박했다. 반면 개혁파는 이제 겨우 태동하기 시작한 종교개혁을 위기에 빠뜨린다는 이유로 아나뱁티스트를 핍박했다. 츠빙글리는 히브리어에 능통했던 만츠를 당시 계획 중에 있던 성경 아카데미의 히브리어 교수로 발탁했다고 한다.


종교개혁가 츠빙글리가 스위스 북부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종교개혁 씨앗을 뿌렸다. 이에 반해 프랑스 출신의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어권 서남부 지역이 주 무대였다고 한다. 칼뱅은 ‘종교개혁 사상의 완성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다시 말해 앞선 종교개혁가들의 업적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종합하는 역할을 맡았다. 앞서간 종교개혁가들이 비판과 투쟁을 통해 로마 가톨릭 전통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다면 칼뱅은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정치·경제·사회적인 구체적 생활 규범까지 세워 제네바를 완벽한 이상도시로 만든 건축가였다.


츠빙글리와 칼뱅의 상징물도 사뭇 다르다. 가톨릭과 벌인 전투에 군목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츠빙글리의 기념 동상은 성경과 칼을 들고 있다. 평생 예배와 강의, 상담 등 목회자로 분주히 살았던 칼뱅의 문장(紋章)은 순종을 상징하는 마음(심장)을 바치는 손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총회장 유관재 목사는 유럽 종교개혁지 방문과 관련, “종교개혁가들인 루터, 츠빙글리, 칼뱅 등은 모두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고 밝혔다. 유총회장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권위적이지 않고 자발적 회중정치의 시스템을 갖고 있는 침례교회가 현재 한국교회의 새로운 희망이자 소망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특별한 의의를 기념하며 떠난 유럽 종교개혁지 방문은 이탈리아와 사도 바울이 참수 당한 로마 방문을 끝으로 모두 마무리 됐다. 사도바울 참수터 기념교회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눈물을 훔쳤다. 바울의 신앙고백인 사도행전 20장 24절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벌써부터 총회가 주관하는 다음 종교개혁지 방문을 꿈꿔본다. 자랑스러운 침례교회 역사의 발자취를 따른 여정을 꿈꾼다면 지나친 욕심이 될런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지금도 많은 여행사에서 성지순례 상품을 만들어 선보이고 있다. 그냥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특별한 종교개혁지 탐방인 만큼 틀에 박힌 패키지여행보다는 누구와 함께 가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자신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자유여행도 큰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믿는다. 이유야 어쨌든 여행의 기술, 순례의 길, 받은 감동과 은혜 등을 이 글에 다 담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관재 총회장을 비롯한 35명과 함께 해서 정말 행복했고 즐거운 순례 길이었다. 함께 동행을 하면서 역사적인 현장에 서서 울고, 웃고, 걷고, 느끼고, 감동과 은혜 받은 시간과 기억들이 지금껏 새록새록하다. 앞으로도 계속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주 안에서 더욱 열심을 내는 삶이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본다.                                      
 / 이탈리아 로마=최치영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