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에 진나라와 제나라가 있었습니다. 진나라는 진시왕이 통일 대업을 이룰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였으나 제나라는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제나라의 농부들이 참외밭을 가꾸었는데 국경을 이웃한 진나라의 농부들도 똑같이 참외를 키웠습니다. 해마다 제나라의 농부들이 가꾼 참외는 잘 자라서 모양도 좋고 맛이 훌륭한 참외가 됐지만, 웬일인지 진나라 농부들의 참외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진나라는 막강한 국력을 앞세워 쳐들어와 제나라 농부들의 참외밭을 뭉개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일이 해마다 지속되자 제나라 농부들은 대책을 세우기 위해 회의를 했습니다. 거듭된 회의 끝에 제나라 농부들은 밤에 몰래 진나라 참외밭에 가서 (좋은 참외가 열리도록)(달고 시원하고 맛이 있는 참외가 열리도록) 가꾸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해마다 와서 못살게 구는 적들이니 보복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제나라 농부들은 적개심을 버리고 사랑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듬해 제나라 농부들은 밤에 몰래가서 진나라 농부들의 참외밭을 자기들의 참외밭보다 더 정성을 들여 가꾸어 놓았습니다. 마침내 진나라 참외밭에도 상품 가치가 높은 훌륭한 참외가 주렁주렁 달리자
필자는 지난 호에서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해 한국의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중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미래적이며 장소적인 관점과 그것을 토대로 이뤄진 천당 신앙과 기복 신앙에 관해 말했다. 그리고 그런 관점과 신앙이 예수님의 말씀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많은 제약과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 주제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역동성과 현재성에 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본질과 목적에 관해 그것의 역동성과 현재성과 진행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관하여 공관복음서들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용어들은 두 가지 곧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이다. 천국은 직역하면 “하늘들의 나라”이며 이것을 한자어로 바꾼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천국’이다. 마가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했다. 누가는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했으며 그밖에 다른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하나님)의 나라”(11:2), “그(하나님)의 나라”(12:31), “그 나라”(12:32; 22:29), “내(예수)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7) 예전에 한 성도님이 수술을 받기 위해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술 전에 기도해 드리기 위해 병원에 심방을 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수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분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분은 너무나 평온하고, 해 맑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얼마나 마음이 평안하고, 담대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과 근심을 제거해 주셔서 수술에 잘 임하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말씀을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어떻게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그토록 여유롭게 기도까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않도록 보살펴 주시고,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느끼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스데반의 몸과 마음을 신비하게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이고! 화산댁, 아들 낳아 반갑네요!” 두각댁이라는 이웃 할머니는 새끼줄에 고추가 달린 금기(Taboo)를 보고도 무례하게 들어와 어머니께 축하 인사를 했다. 당시 부모님은 종교가 달랐다. 조상들이 함경도 함흥에서 수백 년간 사시다가 강원도 강릉에 내려오신 부친의 증조부께서도 유도(유교)를 신봉했고, 그 후손도 계속 유학을 배우고 살아오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무속종교(Shamanism)와 불교를 믿어 왔다. 나는 왜정때 1937년 11월 30일(양력 12월 28일) 저녁때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저동 439번지(본적)에서 한학수 농부(아버지)와 전유봉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지금 그 출생지는 주사골 중에도 안동리 말등산 밑 봉래폭포 아래 맑은 지하 샘물이 솟아나는 곳에서 그리 멀지않는 초가집에서 3세까지 자랐다고 어머니께 전해 들었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실 때 ‘객귀’를 물리친다고 마당에 십자가 표시를 긋고 칼을 한복판에 꽂아두기도 하셨으며, 부엌 부뚜막 위에 찬물과 표주박에 쌀을 넣어놓고 조상신을 섬기셨다. 동생들을 낳으셨을 때는 ‘삼신’에게 정수를 떠 식사판 위에 놓고 비시기도 하셨다. 물건을 옮길 때도 조심하고 이사를 할 때도
대전에서 복집 식당업을 하고 있는 처제가 주일에는 항상 문을 닫고 교회 출석을 했는데 다가올 주일에는 큰 두 팀이 오전, 오후로 주문을 해온다는데 이를 거절해야 하느냐 마느냐 결정을 못하겠다고 형부 목사에게 상담을 구해왔다. 나는 즉각 처제에게 전화를 넣었다. “처제, 걱정 말고 그날 두 팀을 다 받으세요, 누가 뭐라고 말하거든 신학 교수 목사 형부께서 식당문을 열라 했다고 하세요”라고. 처제는 나의 제안에 약간 당황하면서도 오는 주일에는 오전 오후 영업을 하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그 당시 한일 외교관계가 험악해 경기가 나쁜 데다가 모두 다 느끼듯 정부 정책에 따른 경기가 땅바닥에 깔려 가게 문이 닫히는 가하면 특히 식당업이 줄초상을 만났다는 것이다. 처제도 하루에 두 세그릇 탕이나 팔린다는 것이다. 그래도 시간에 맞춰 종업원 일급은 꼭 지불해야 하는 판이고 월세는 꼬박꼬박 내야 하는 등 식당운영이 최악이란다. 그런데 목사는 성도의 경제 사정은 모른다는 것. 주일에 영업하면 축복 못 받는다고 외치면서 주일 성수원칙을 강조하고, 영업수익은 없는데 십일조를 위시한 헌금은 또 강조한다는 것이다. 지금 신약복음 은혜시대인데 명백히 율법인 안식일과 십일조를 엄수하라고
어느 신문사 기자 양반이 세상을 바꾸기라도 할 것 같이 젊음과 열정을 온전히 바쳤지만 돌아온 것은 사회적 좌절이었습니다. 40대 중반에야 뒤늦게 가족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집에서는 이미 “하숙생 아빠”와 “복수하고 싶은 남편”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그 절망의 벼랑 끝에서 만난 것이 바로 “감사”였고, 수년 동안 꾸려온 “감사 아빠”와 “감사 남편”에서 얻은 선물 중 하나가 아들과의 관계 회복이었습니다. 한번은 졸업앨범에 “환한 미소”를 지은 학생이 30년 후에 보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더 건강하고, 더 성공하고, 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통계 결과를 보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들의 졸업앨범을 뒤져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숙생 아빠”로 생활하던 시절 아들의 중학교 앨범에서 “우수에 젖은 아들의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던 아들이 “감사 아빠”로 변신하고 3년이 흐른 뒤에 찍은 고등학교 졸업앨범에는 “환한 미소”를 짖고 있었습니다. 대조적인 두 사진을 목격하는 순간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아빠의 감사”가 아들의 얼굴을 바꾸고 감사하는 가장이 행복한 가정과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진수성찬 앞에서도 불평
시가서의 해석적 관점 숙련된 히브리 시인이 기록한 시편의 아름다운 시를 명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히브리 시에 담긴 독특한 시적 요소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히브리 시는 평행(parallelism)과 이미지(imagery)의 반복을 통해 압축된 문장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문학의 한 형태이다. 히브리 산문에도 평행과 이미지가 없지 않지만 히브리 시는 그것을 더욱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특징이자 산문과의 차이점이다. 1. 평행법(Parallelism) 히브리 시에는 운과 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반면, 평행법을 이용해 시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평행법은 히브리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앞의 행에서 밝힌 사상이 다음 행에서 동일하거나 연관된 내용으로 표현되는 문학적 기교이다. 시의 행에 포함된 각 소절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 즉 소절에서 소절로 이어지는 일정한 사상의 흐름이 있는데 이러한 사상의 흐름이나 관계성이 평행이며, 이 관계성의 특징은 상응(correspondence)이다. 성경학자인 아델 베를린(Adele Berlin)은 이러한 상응성이 평행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평행은 히브리 시의 소절들 안에서 상응적 관계를
최초의 침례교회는 영국 분리파 청교도 목사 존 스마이스(John Smyth, 1570-1612)에 의해 1609년 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됐다. 스마이스는 영국 노팅엄셔 주 스터톤리 스티플(Sturton-le-Steeple)이라는 마을에서 자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링컨셔 주 게인스보로(Gainsborough)의 문법학교(grammar school)를 졸업한 후, 캠브리지대학교 신학대학인 그리스도대학(Christ’s College)에서 학사(1590)와 석사(1593)를 취득했다. 스마이스는 대학 시절 프란시스 존슨(Francis Johnson) 교수의 영향으로 청교도주의가 됐다. 존슨은 청교도 사상으로 인해 1590년에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는 런던에 초대교회(Ancient Church)라는 분리파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박해를 피해 1593년에 신앙의 자유가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피난갔다. 스마이스는 1594년에 성공회 목사로 안수 받았고, 1594년부터 1598년까지 4년 간 모교인 그리스도대학에서 강사로 봉직했다. 당시 신학교 교수는 결혼이 금지됐으나 스마이스는 결혼을 감행했고, 그로 인해
안도현 시인이 ‘너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 되려면 자신부터 뜨거움이 있어야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교회에 뜨거움이 있길 원하신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고 하셨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뜨거움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거나 전에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식어버렸거나 미지근한 것이 정상적인 줄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다. 교회가 어떻게 뜨거울 수 있는가?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해 주시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에 쓴 자기에게 관한 것을 설명해 주실 때에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다. 곧 그들이 서로 말하길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는 대화를 나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감동을 받고 은혜가 될 때에 마음이 뜨거워진다. 부산의 모 침례교회
율법에서 자유합니까? 아직 율법아래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율법은 변명할 것이 없도록 모든 입을 막고, 죄를 깨닫게 하여 온 세상을 심판아래 있게 하려고 주셨습니다. 율법의 잣대로 선악을 따지면 죄 없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기 전에도 사람들은 죄를 지었으나 그때는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웃집에 탐나는 물건이 있어 훔치러 갔다가 여의치 않아서 그냥 돌아왔으면 율법이 없을 때는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온 후에는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조항 때문에 탐내는 것도 죄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율법이 온 후로는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은 것까지 죄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마음으로 탐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고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다 죄가 되니 율법은 모든 사람이 빼도 박도 못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인 만들어서 꼼짝없이 심판 아래 들어가게 하는 죽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보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