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에 여우와 두루미가 서로 초대해 여우는 접시를, 두루미는 호리병을 내놓아 서로 먹기가 어렵다. 사람들의 대화를 보면 서로 비난하는 교차 교류로 갈등을 만들기도 하고, 본 뜻은 감춘 채 암묵적 교류로 더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대화는 서로가 진실을 만나고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수평적인 대화법이 가장 좋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자아상을 그려 낼 수 있다. 자아는 크게 어버이 자아, 어른 자아, 아이 자아가 있고 어버이 자아는 양육적이냐, 비판적이냐로 나뉘며, 어린이 자아는 자유적이냐, 적응적이냐, 부모를 조종하는 교수(꾀돌이)적이냐로 나뉜다. 적응적인 것은 다시 반항적으로 적응하냐, 순응적으로 적응하냐로 나뉜다. 인생패턴에서도 1. I am OK, You are not OK(비난형). 2. I am not OK. You are not OK(회뮤형). 3. I am not OK, You are not OK(산만형). 4. I am OK,. You are OK(일치형). 등 이렇게 4가지의 인생패턴으로 나뉜다. 자세히 설명은 못하지만 어린 자녀가 실수로 꿀단지를 깼을 때 엄마의 양육적인 어버이 자아가 기능하는 말은 "어디 다치지 않았냐?"이
지구촌교회 일상전도 과정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복음을 전해야 할 영혼들이 밉고 또 억울하다는 생각 속에 마음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나에게 무언가를 주실 하나님 손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 소원이 이뤄지면 그것을 마치 진리, 복음, 믿음으로 착각하며 그 결과만을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일상전도 복음나눔 내용을 반복암기하며 십자가 사랑으로 저의 죄를 돌아보게 됐고, 결국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또한 기도의 중요성을 배우며 어느 때보다 뜨겁게 기도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 안에서 그동안 참된 복음과 진리를, 그리고 십자가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한 적이 없었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회개하는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 남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결신과 교회로 초대하는 기적을 이뤄주셨습니다. 남편의 결신은 저의 노력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었습니다. 불교 집안에서 자란 남편은 저와 결혼을 위해 ‘하나님을 믿겠다’고 교회에 다닐 것을 저의 부모님과 약속하고 급하게 침례를 받고 한동안 열심히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세상 재미가 너무 좋았던 남편은 얼마 지
이번 기고글 2023년에 발행된 ‘신사참배 거부로 수난당한 침례교 대표 32인’을 토대로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를 정리하고자 기획했습니다. 더 많은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저자에게 연락 바랍니다. 1. 최초 항일운동: 위국기도회(1905) 필자가 살펴본 바 문헌상으로 침례교가 항일운동을 최초로 한 것은 1905년에 있었던 위국기도회에 참여한 것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일어나기 직전, 서울에 있는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를 주축으로 기독교적 애국 운동인 ‘서울지역 연합 위국 기도회’를 개최했는데, 이를 통해 일제에 항거했다. 이때의 상황을 1905년 11월 19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성문우천(聲聞于天) 대한 전국에 기독교인의 경향에 있는 신도가 모두 십만에 달했는데, 그 국가가 침륜 멸망하는 지경에 빠져 들어감을 슬퍼하고 애통하며 사회가 영락하고 쓰러지는 것을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장로회와 침례회와 감리회에서 공동으로 연합회로 단결해 영원한 생명의 하늘에 기도하자는 주지로 독일무이하시고 전지전능 하옵신 조물주 대주재 상제 여호와께 위국 기도를 경건히 지성으로 드린다 한다는데 그 매일 기도하는 전문은 다음과 같다
형과 제가 결혼을 한 뒤로는, 동생을 놀려먹는 재미가 좀 있었습니다. “야 야 넌 얼마나 매력이 없으면 그 나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있냐, 팔도 남들보다 짧고 다리도 짧은데 허벅지만 굵고, 어떻게 하냐?” 그랬던 녀석이 어느 날, 천안으로 여자친구를 데려온다고 합니다. 약속한 날 저녁, 마중을 나간다는 것을 끝까지 마다하더니 택시를 타고 집 앞까지 왔습니다. 그래도 형들 집에 인사시킨다고 분당으로 천안으로 다닌 수고가 고마워 어찌나 기특하던지 반가운 마음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동생을 따라 형님 집으로 들어오는 손님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한 마디 건넸습니다. “형 집에 오는데 귀한 선물은 들고 왔고?” “당연하지, 여진이가 특별히 골랐어.” 그러면서 호두과자를 한 상자 건냅니다. 타지 사람이 천안 사람한테 호두과자를 선물하는 이 놀라운 광경에 우리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과수원 하는 사람 집에 과일 상자 들고 가지 왜?” 다행히 제 개그를 이해해 주는 듯 환하게 웃어주는 것이 성격은 좋겠구나 싶었습니다. 다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그 이후로도 한 번 더 우리 집에 내려와 시간을 보낸 뒤에 양가 부모님께 둘의 결혼을 승낙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왔
우리 교회는 교회학교 어린이부가 있다. 우리 교회에는 2명의 초등학생이 있고, 지난 1월에 만 한 살이 지난 아기가 있다. 이 어린이들을 위해 교회학교 어린이부가 운영되고 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는 대형교회에서 어린이부 사역을 오랫동안 해온 경험이 있는 여자 목사님이 있기에 그 목사님이 그 어린이들을 담당해 교회학교 성경공부를 진행하고 있다. 사실 우리 교회의 교회학교 어린이부는 한 명의 어린이로 시작했다. 한 명이 초등학생이 그 엄마와 함께 우리 교회에 등록했고, 그 어린이가 우리 교회에 등록한 다음 주일부터 교회학교 어린이부가 시작됐다. 한 명의 어린이였지만, 부목사님은 PPT와 성경공부를 준비했고, 교회학교 어린이부를 위한 주보도 만들었다. 여러 가지 학습활동도 정성스럽게 준비해 진행했는데, 그 어린이도 성경공부 시간을 매우 즐거워했다. 그러다가 한 명의 어린이가 더 등록했고, 이젠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기도 간헐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물론 아기는 엄마와 함께 옆에서 지켜보는 정도에 그치고 있지만 말이다. 보통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들은 교회학교 어린이부나 청소년부를 운영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교육부서를 담당할 일꾼이
“1소대 김진혁 병장님 행정반에 전화 와있습니다.” 창문을 하나 열어도 초가을의 상쾌함이 느껴지는 토요일 오후, 병장을 단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한민국 육군 오대장성 중의 하나라는 자부심으로 그 조용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보세요?” “어, 형이다.” “어쩐 일이야? 대한민국 해병 출신께서 전화를 다 주시고?” 형입니다. 대뜸 불안한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형이 부대로 전화를 한다? 무슨 일 있나?’ “응 특별한 것은 아니고, 너 혹시 장민경이라고 아냐?” “장민경? 알지” 저하고 같은 학번 동기로 조막만한 얼굴에 키도 작고 수줍음을 잘 타는 그런 자매였는데, 저하고도 간단한 인사 정도는 하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교육학과 97학번?” “그렇지!” “근데 왜?” “아니, 걔가 좀 어떤 사람인가 싶어서? 사람 괜찮냐?” “아 그럼! 착하지. 나 군대 올 때까지 그 자매 얼굴 보면 한 번도 웃지 않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 알았어. 나중에 통화하자.” “어? 그, 그래.” ‘이거 이거~ 작업 들어가려고 하는구나’ 직감이 왔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처음이요, 마지막인 형과의 통화가 그렇게 짧게 끝나고, 형이 말한 자매가 내가
(창세기 4장 16~24절) 아버지 세대 잘못을 그대로 따라 한 가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또 한 번 참으시고 더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신 장면을 봤습니다. 이후 가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창세기가 가인의 나머지 삶을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으니 많지 않은 기록을 가지고 추측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 4:16~17) 가인은 에덴동산 동쪽에 있는 놋 땅에서 살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아내를 만났고 아들을 낳아 에녹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지 모르나 정착 생활을 못하는 벌을 받았으니 농사는 아니었을 테고 터를 잡아 집을 지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다만 그의 가족은 유랑생활을 할 이유가 없었죠. 아들 에녹이 태어나자 가인은 성을 쌓았습니다. 성을 쌓는 일이 혼자 힘만으로 될 리가 없으니 이 당시만 해도 가인이 꽤 큰 세력을 얻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을 쌓은 뒤 행적은 창세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유랑생활을 하면서 젊은 시절 범했던 실수를 후회하며 살았
저에게는 특별한 조카가 한 명 있습니다. ‘아영이’인데요. 지난 2014년 2월 16일 이집트 무장단체 알 마크디스의 자살폭탄테러로 숨진, 동생 김진규 목사의 딸입니다. 아영이가 4살이 되자 벌어진 일이니 크고 나면 자신의 아빠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샤르맬 셰이크 국제병원 냉동 창고에서 마주한 동생을 데리고 서울 대방동 보라매병원 장례식장으로 왔습니다. 동생 소식에 오열하고 정신 못 차리는 저와는 달리 형님은 매우 의연했습니다. 어쩜 눈물 한 번 흘리지 않을까 할 정도였는데, 저는 냉동 창고에서 막내 동생의 시신을 마주하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시신을 어루만지며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정신을 못 차리니 동생을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 혹 틀어질지 모르는 일처리를 위해 냉정함을 유지했었던 것입니다. 인천국제공항 카고 터미널에 대기해 있던 의전차량에 동생의 관을 싣고, 약 한 시간 가량을 달려 도착했는데, 우리 삼형제가 이렇게 한 차량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왠지 1분도 걸리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미리 나와 있던 가족들과 많은 지인들이 눈물로 동생을 맞았습니다. 제수씨를 포함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생이 떠나
저의 모교회는 대전대흥교회입니다. 1985년 중학생 때부터 시작해 2019년 12월 부사역자까지 34년의 시간이었습니다. 2020년은 휴식을 취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간에 이계호 교수(태초먹거리)의 요청으로 2020년 3월부터 함께 사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3개월은 문서사역과 함께 주변 카이스트, 충남대, 목원대, 한밭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 코로나19가 발생하고 모든 사역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서사역과 함께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면서 낯선 환경에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적응하게 됐습니다. 당시는 교회 사역을 쉬는 상황이라 함께하는교회(김요한 목사)에 잠시 출석했고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집에서 비대면 예배를 드렸습니다. 2020년 8월 2일 주일부터 아들 은섭이의 권유로 은섭이와 함께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 이름은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면서 대전대흥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새벽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은혜불꽃”이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은섭이의 이름도 한문으로 뜻을 풀면 “은혜불꽃”이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큰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았다고 족보에 올려야 한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얼마 전 ‘인도 천재’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인도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꿈의 직업은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다. 카스트제도의 뿌리 깊은 영향력으로 신분 상승이 쉽지 않고,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아이들에게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인도공과대학에 입학해 ‘엔지니어가’되는 것이다. 가난한 빈민가의 아이들이 ‘브릭스’라는 무료 공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 인도공과대학에 들어가서 꿈을 성취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어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 몇 년 전 ‘세 얼간이’라는 인도 영화를 접하고서 인도를 다시 보게 됐던 만큼의 충격이었다. 인도는 대책없어 보이는 인구증가와 격심한 빈부격차, 열악한 사회환경 등으로 여행조차 꺼려지는 국가로만 인식되어 왔다. 몇 년 전 단기선교차 인도를 방문했을 때, 거리는 소와 사람들과 차가 뒤섞여 있었고 어딜 가나 사람들이 넘쳐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