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침신대 선교훈련원 주차장 초입에 황홀하게 만개하는 자목련 두 그루가 있다. 자목련은 한 송이씩 간격을 두고 마치 여왕처럼 고고히 피는 순백의 목련과는 달리 탐스런 자색의 꽃송이들이 나무 전체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단 두 그루의 나무가 빚어내는 그 풍성한 아름다움이 가히 경이롭다. 그러니까 지난해 봄의 일이다. 아쉽게도 그 자목련이 자태를 뽐낼 겨를도 없이 일주일째 지속되던 봄비가 꽃송이들을 모두 낙화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단명한 꽃의 아름다움이여! 나는 안타까워 비에 젖은 꽃들의 가련함을 핸드폰에 담아보았다. 그리곤 아쉬움에 대한 짧은 멘트와 함께 가까운 몇 분들에게 사진을 보내 드렸다. 그런데 이 작은 일상이 뜻하지 않게도 나에게 귀한 에피소드가 되었으니, 바로 한 여성 사역자가 남긴 답 글에 관한 일이다: ‘감사합니다, 차 교수님. 봄비는 대자연을 위한 보약이라지요...’ 사실 그 날은 전국적으로 지속된 봄비에 빼앗긴 봄과 거리의 질척거림을 토로하는 짜증난 시민들의 얼굴이 뉴스의 첫 머리를 장식한 궂진 날씨였다. 허나 그분의 글엔 불평은커녕 자연의 불편함마저도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로 아름답게 승화시킨 일상의 감사함만이 맴돌 뿐이었다. 마치 ‘범사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새314/통511)작사: 엘리자베스 프렌티스(Elizabeth Payson Prentiss, 1818-1878)작곡: 윌리엄 도언(William Howard Doane, 1832-1915) 1.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2.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3.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 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엘리자베스 프렌티스(Elizabeth Prentiss)는 많은 작품을 남긴 19세기 여류 시인이다. 에드워드 페이슨 목사의 딸로 독실하고 교양 있는 환경에서 자라난 그녀는 고향인 미국 포틀랜드와 여러 도시에서 교사로서 활동했다. 27세 때 장로교 목사인 조지 프렌티스와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연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그 당시 베스트셀러의 기준은 20만부가 팔리는 것이었는데, 프렌티스가 쓴 ‘천성을 향하여’(Stepping Heavenward)의 판매량은 그 기준을
시대에 따라 특별히 부각되는 단어가 있다. 그 시대의 정서와 현상을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이런 단어들은 그 시대의 보편적 시각과 생각을 알게 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다. 요즘 들어 많이 듣게 되는 단어가 치유라는 말이다. 언뜻 들으면 나의 상태가 조금 여유로워져서 이제는 타인을 염려하는 단어 같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나의 상처가 아파서 그 상처를 싸매고 감싸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비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 현상과 함께 우리 사회는 각 분야마다 심리 치료, 힐링 등의 치유방법의 열풍이 불고 있다. 그만큼 상처가 많은 사회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 특별한 관심과 돌봄이 필요한 시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연 사람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능력이나 방법을 가지고 있기나 하는가? 사람이 하는 치유가 상처를 말끔하게 낫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나? 다양한 상담과 치료의 방법론이 제시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런 질문과 함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이다.이탈리아의 작곡가,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1797-1848)의 오페라 중에서 사랑의 묘약이라는 작품이 있다. 내용은 지극히 통속적이고
작사: 호레이쇼 스패포드(Horatio Gates Spafford, 1828-1888)작곡: 필립 블리스(Philip Paul Bliss, 1838-1876) 1.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2.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3.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 눈보다 더 정하리라4.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뉴욕에서 태어난 호레이쇼 스패포드(Horatio Spafford)는 돈이 많은 변호사였다. 그는 ‘무디 전도단’의 재정후원자로 드와이트 무디 목사의 세계적인 사역을 도왔고, 무엇보다도 지역교회의 집사로서 열심을 다하며 살고 있었다.스패포드는 변호사 일로 벌어드린 많은 재산을 시카고의 미시간 호반에 별장을 짓는데 투자했다. 그런데 1871년 시카고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는 10여만 명의 이재민을 내고 3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
세월호의 침몰로 아직 피어보지도 못한 수많은 꽃봉오리들이 망망대해에서 힘없이 꺽여져 버린 엄청난 현실 앞에 우리는 모두 경악하고 절망하고 울어야했다. 사실 같지 않은 현실을 눈앞에 보며 어른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어른이라는 것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시간들이다. 숨 쉬는 것조차 미안하고 밝은 옷을 걸치는 것마저 죄스러운 나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언제가 되어야 우리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자문하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원망하고 자책하는 반성의 시간들과 대면하고 있다. 이렇게 엄청난 국가적 비극을 넘어설 수 있는 근원적 힘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일 것이다. 이 생명의 끝이 영원한 끝이 아니고 이 세상의 이별이 곧 영원히 볼 수 없는 이별이 아니라는 믿음,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다시 만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없다면 비극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헤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절망과 슬픔을 뛰어넘는 소망의 힘!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것인지 마음 깊이 체험하는 시간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이 힘든 시간에 함께 할 수 있는 음악을 생각하는 중에 헨델(George Frederic
다 감사드리세(새66/통20)작사: 마틴 링카르트(Martin Rinkart, 1586-1649)작곡: 요한 크뤼거(Johann Cruger, 1598-1662)1618년부터 계속된 전쟁으로 독일 삭소니 아일렌부르크(Eilenburg)지방 사람들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야했다. 전쟁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은 종교와 정치 그리고 국가의 분쟁으로 확대되어 30년 동안 계속되었다.사람들은 견고한 성으로 둘러쌓아진 아일렌부르크로 몰려들었다. 여러 차례 전쟁으로 침범을 당했던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스웨덴 군사들이 성을 포위하고 진을 쳤을 때 전쟁은 극으로 치달았다. 건물들은 파괴되었고 수많은 피난민이 들끓었다. 기근과 질병은 사람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 알 수도 없는 전염병으로 죽어간 시체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목사들은 병든 사람들을 보살피고 장례식을 치르다가 과로에 쓰러졌다. 일에 지친 사역자들이 다른 도시로 가버렸거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쟁이 시작되기 일 년 전부터 아일렌부르크 교구의 부감독으로 일해 온 루터교 목사인 마틴 링카르트(Martin Rinkart)만 아일렌
봄비가 겨우내 언 땅을 녹이고 그 땅에서 새싹이 돋는 계절이 시작 되었는가 했는데 어느새 봄은 깊어가고 있다. 추운 겨울을 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조금만 더 견디면 따뜻한 봄이 온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봄이 오면 대지가 녹고 새 생명이 다시 움트고 꽃이 피어 그 향기가 공기를 따스하게 감싸줄 것이라는 희망이 그렇게 춥고 긴 겨울을 이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도 그렇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 같은 질곡의 날들을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주실 따뜻한 햇살과 봄바람에 대한 소망 때문이다.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고 아파할 때도 봄을 주신다는 믿음으로 인해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봄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희망의 계절이고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며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의 기간이다. 삶을 재정비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이고 축복인 것이다. 봄을 갈망하는 마음을 표현한 음악이 있다. 바로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의 봄의 찬가(Frulingsglaube)라는 노래이다. 독일 가곡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단비 같은 선율의 노래인 이 작품은 루드비히 울란트(Ludwig Uhland
민족의 대명절 중 하나인 구정이 지나가면 겨울은 그 절정을 향해 간다. 매서운 겨울바람과 눈보라로 인해 몸도 마음도 위축되는 계절이 겨울이다. 또한 겨울은 밤의 길이가 늘어남에 따라 활동할 수 있는 시간도 줄어 일상이 조금은 더디게 움직이는 시기이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겨울이 오면 몸이 움츠러드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도 무거워지기 쉽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겨울에 비교하기도 하고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는 때가 되면 자신의 삶에 밤이 왔다고 표현한다.인생의 겨울밤, 듣기만 해도 참 쓸쓸하고 고단한 표현인데 이와 유사한 마음을 나타내는 성경의 말씀들이 있다“. 밤에한나의노래를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시편 77편 6절에 나타난 시편 기자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까 두려운 마음을 밤이라는 수사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때때로 이런 절박한 겨울밤이 찾아오곤 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문제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지금 겪는 어려움으로 심신이 지쳐 있을 때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 누구도 나의 상황을 돌아보는 이가 없을 때도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외면당하
주 음성 외에는(새446/통500)작사: 앤 혹스(Anne Sherwood Hawks, 1835-1918)작곡: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매 시간 주님이 필요해요 앤 혹스(Anne Hawks)는 아주 건강했다. 걱정도 전혀 없었다. 그녀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자상한 남편이 늘 곁에 있다는 것이 늘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세 자녀를 키우며 행복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6월의 화창한 날에 37세 주부인 혹스는 남편과 아이들을 생각하니 너무도 행복해서 감사가 저절로 우러나왔다. 그녀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내 영혼속의 주님의 임재를 느꼈어요. 그 순간,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주님이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매 시간 주님이 필요해요’(I need Thee every hour.)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솟구쳐 올랐어요.” 따스한 햇살 같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 혹스 집사는 집안일을 잠시 미뤄놓고 주님을 묵상하며 찬송시를 써 내려갔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은혜로우신 주님, 매 시간 주님이 필요해요.I need Thee every hour, Most gr
전쟁이 빈번할 뿐 아니라 점점 더 잔혹해 지기 시작한 20세기의 사회 정치적 상황은 예술 분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1, 2차 세계대전은 많은 사람들을 전장으로 내몰았고 음악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술 활동을 접고 끌려 나간 전쟁터에서 전사하기도 하고 운이 좋아 생존하여 돌아온다 하여도 신체의 일부를 잃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개인적 비극은 참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을 계기로 괄목할 만한 음악이 만들어 지기도 했었던 것은 황무지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 그런 작품 중에 하나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어느 젊은이의 오른손을 앗아갔다. 전쟁 중에 오른팔을 잃는 대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로 고마워해야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피아니스트였고 피아니스트에게 연주할 수 있는 두 손은 또 다른 생명이기에 그에게는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젊은이가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 폴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 1887~1961),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동생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애나 워너(Anna Warner)는 일찍이 부모님을 잃었다. 그녀가 어렸을 때 엄마가 세상을 떠났고 변호사였던 아버지마저 몇 년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애나와 언니 수잔(Susan Warner)은 글 쓰는 재능이 뛰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두 자매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청소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행히 첫 작품으로 발표된 ‘넓고 넓은 세상’(The Wide Wide World, 1850)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후 두 자매는 여러 작품을 내놓았다.찬송 “예수 사랑하심을”이 지어진 동기는 꽤나 흥미롭다. 자매가 함께 지은 소설 ‘세이 앤드 씰’(Say and Seal, 1860)에는 애처로운 장면이 나온다. 소설의 주인공인 주일학교 교사 존 린덴과 그의 약혼자 페이스 데릭은 죽어가는 어린소년 조니 팩스를 방문한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각해진 어린 조니는 린덴 선생님에게 “노래를 불러주세요”라고 간신히 부탁한다.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며 죽어가는 어린 조니를 품에 안은 린덴 선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준다. 예수님이 날 사랑하시는 걸 알아요.Jesus loves me! This I know,성경이 그렇게 말해주기 때문
바야흐로 10월의 끝자락, 나무마다 가을의 느낌이 붉게 묻어난다. 여성들은 스타킹을 신기 시작했고 나무들은 화려하게 성장(盛裝)한 나날들... 아마도 나이 탓이리라. 세월이 가는 것이 보인다. 시인은 “잘가라 너무도 짧은 우리네 여름이여”라고 했다던가, 변화하는 자연의 정취에 취해 잠시 벤치에 앉아 볼 겨를도 없이 가을이 왔고 그리고 가고 있다. 시간의 빠름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앞으로만 흐르는 것이 인생이요, 세월의 속성일진데 마치 세월의 법칙을 역행이라도 하듯 시간을 원점에 머물게 한 사람들이 있다. Joy Quintet(조이 퀸테트)이다. 소개에 앞서 우선 “Joy”란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기쁨, 환희, 행복? 아마도 이 모든 것의 합산 같은 여성 오중창단이라면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 기쁨의 노래, 마치 그 어떤 인공 조미료도 쓰지 않은 찬양의 웰빙과도 같은 행복한 노래, 그들은 찬송가, 오직 본질만을 노래한다. ‘...이들 다섯 명은 초등학교 시절 선명회 합창단에서 만나, 10년간 국내, 외에서 음악사절로 활동하며 우정과 사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고등학교 시절에 이 중 한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이라 부르는데 가장 적합한 계절이 가을이 아닌가 싶다. 가을은 우리 모두를 시인이 되게 한다. 가을은 삶을 돌아보게 하고 기도하게 한다. 가을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은 곳곳에 울긋불긋 물드는 단풍이다. 단풍의 색깔을 가만히 보면 세상의 그 어떤 물감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색감을 가지고 있다. 단풍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존재의 기간이 안타깝게 짧기 때문이다. 단풍이 드는가 싶으면 어느새 낙엽이 되어 사라지는 단풍은 본체인 나무와의 마지막 이별을 위한 치장인 듯 하다. 겨울을 위해 헌 옷을 벗어 던지는 나무들의 마지막 치장, 그것이 단풍이 아닐까? 나뭇잎들은 조금 있으면 낙엽으로 떨어져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헐벗은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으로 추운 겨울을 나야하지만 그 마지막 이별은 참 예쁘다. 화려한 단풍으로 마지막을 마무리하며 아름답게 이별하는 나무의 몸체와 잎의 모습이 가을을 쓸쓸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게도 한다. 마지막이기에 더 절실하게 표현되는 아름다운 빛깔의 단풍을 바라보며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소개한다. 항일시인 윤동주선생의 유작인 “서시”에 작곡가 이용주씨는 자신의 음악언어를 통해 선율을 덧입혔다. 음악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새304/통404)작사 · 작곡: 프레드릭 리먼(Frederick. Martin Lehman, 1868-1953) 편곡: 클라우디아 메이스(Claudia Lehman Mays, 1892-1973)독일에서 태어난 프레드릭 리먼은 4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어릴 적부터 주일학교를 다니던 리먼은 11살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순탄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노스웨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침례교 목사가 되어 오듀본(Audubon)의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리먼 목사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일생동안 여러 지방의 시골 교회를 섬겼다.리먼 목사는 목회를 하는 교회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역을 하면서 할 수 없이 또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그는 가구점에서 목공으로 또는 공장에서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육신이 너무 힘들 때면 목회지를 도시로 옮겨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리먼 목사는 끝까지 작은 시골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질수 있는 십자가라고 생각하며 달게 받았다.어느 날 시골 교회를 맡아 사역을 하던 때, 그 날도 리먼 목사
그렇게 뜨겁던 여름이 정말 홀연히 물러가고 가을바람이 적당히 시원한 기분 좋은 느낌으로 뺨을 스친다. 가을이 오면 누구나 조금은 감상적이고 또 조금은 자기반성을 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파란 가을 하늘, 청명한 가을바람과 함께하는 이 가을에 마음을 편안하게 정화할 수 있는 음악이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가을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음악으로 멘델스존(Jo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년~1847)의 피아노 음악인 무언가(Songs without words)를 소개한다. 무언가, 문자 그대로 가사가 없는 노래로 피아노의 소리만으로 모든 감정과 생각을 노래하는 음악이다. 사람의 육성으로 가사를 전달하는 노래들은 뜻과 의미는 분명하게 전달 할 수 있으나 그 이상의 감성을 자극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음악은 말이 없어도 말보다 훨씬 강력하게 감정을 전달 할 수 있는 영혼의 언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멘델스존의 작품을 들어보면 왜 작곡자가 이런 제목을 붙였는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음악이 주는 감성의 깊이가 깊다는 뜻이다. 독일의 작곡가 멘델스존이 21세 되던 1830년부터 평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