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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실망의 끝

가정회복-23

심연희 사모
RTP지구촌교회(미주) Life Plus Family Center 공동대표

교회를 옮기는 일은 절대 쉽거나 간단한 일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데 따르는 상실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직장이나 다른 일로 그 지역 교회를 멀리 떠날 때는 그나마 아쉬움이 깊다. 그러나 한 지역에 계속 살면서 교회를 옮긴다는 이야기는 그 상실감을 상쇄할 만큼의 실망, 상처, 갈등이 얼룩진 선택이기 마련이다. 상처받아서 떠나고, 또 그만큼 상처를 남기고, 상처를 준 후에 떠난다. 긴 싸움 끝에 마치 이혼을 선택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가족을 바꾸는 일처럼, 가는 사람, 남는 사람, 모두에게 힘이 든다.  다른 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 교회는 사람들이 차가워요.” “그 목사님은 사랑이 없어요.” “말씀이 은혜가 안돼요.” “심방을 안 해요.” “장로님이 다 맘대로에요.” “신앙에 본이 될만한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요. 친구가 안돼요.” “찬송가를 안 해요. 찬양이 은혜가 안돼요.” “교인들이 너무 무례해요.” 그런데 바로 똑같은 그 이유 때문에 또 교회를 떠나간다. 믿음의 공동체에 자신은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올 때나 떠날 때나 들을 수 없다.


직장을 옮기는 일 역시 다르지 않다. 조금 더 나은 기회, 승진, 연봉 등이 주된 이유이다. 그러나 현재의 직장에서 느꼈던 회의감, 인간관계의 어려움, 한계, 반복된 실수들이 다른 직장을 찾아보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새로 옮긴 그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묘하게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상담소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도 말한다. “이 쪽 모닥불이 뜨거워서 뛰쳐나왔는데, 집채가 타는 화재 속으로 뛰어든 느낌이에요.”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 새로운 교회, 새로운 직장이나 학교를 만날 때 우리는 모두 기대감에 부푼다. 이 사람만큼은, 이곳만큼은 자신의 지난 상처들을 잊게 하고 회복시킬 묘책이 되리라고 또 한 번 기대한다.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을 가지고 또 다른 사람에게 기대를 건다. 또 다른 목회자, 또 다른 배우자, 또 다른 동료, 또 다른 친구라면 이번엔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겪는 일이지만, 성격장애의 경우, 이 기대감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크다.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 완벽한 상황을 끊임없이 추구하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처럼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필요와 욕구로 사람과 환경에 매달린다.
내게 존재하지 않던 부모의 따뜻한 사랑, 인정, 어떤 나의 모습도 사랑하는 가족, 나를 안전하게 느끼게 하는 환경을 지금 이곳, 현실에서 찾고 또 찾는다.
그리고 다시 깊고 어두운 배신감에 시달린다. 자신의 기대를 또 실망시킨 상대나 상황 때문에 너무나 상처받는다. 그리고 결심한다. 다시는 누구도 믿지 않겠다고. 다 똑같은 인간들이라고…. 상담소에서는 이렇게 자신만의 단단한 껍질 속으로 영원히 숨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또 상처받기보다는 철저히 외롭겠다는 선택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기대 끝에 따라오는 이 실망의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맨날 상처받았다는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목회자를 향한 성도의 실망, 성도를 향한 목회자의 실망, 성도끼리의 실망, 가족을 향한 실망, 동료나 친구를 향한 배신감 끝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야 할까? 믿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음을 거듭 확인해야 할까? 그래서 거리를 둬야 할까? 요즘 유행인 가나안(안나가) 성도처럼 교회를 등져야 할까? 세상과 단절해야 할까?
Beth Moore는 사무엘상과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모습을 묵상하며, 기대감 끝에 닥쳐오는 깊은 실망감에 대해 말한다.


양을 치다가 얼떨결에 기름부음을 받고, 사자에 이어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에게 발탁되어 왕궁으로 올 때, 소년 다윗의 부풀었을 가슴과 벅찬 기대감을 그린다. 그런데 그의 왕이자 영웅이자 장인이었던 사울이 철천지원수이자 적으로 돌변할 때, 뼈아픈 실망감과 두려움에 휩싸였을 청년 다윗이다. 베스무어는 그 실망감의 자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여정 끝에 이르는 자리인지 말한다. 우리 모두가 도착한 적이 있던 낯익은 자리이다. 그러나 이곳이 머물기에 얼마나 축복된 자리인지 역설한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게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채워지지 않는 기대감으로 지친 우리의 심령을 쉴 수 있는 진짜 안식처를 찾는 순간이다. 어떤 사람도, 가진 것도, 환경도 아닌,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경배해야할 대상이 비로소 분명해지는 통찰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가 되시는 그 유일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독히 실망시킨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아프게 한 가족, 학교, 직장, 신앙 공동체, 그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신다. 바로 실망의 그 자리가 경배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뼈아픈 배신의 자리가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배운 축복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릇된 기대감에서 진정한 안식을 만나, 그 지친 마음을 내려놓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도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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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유산을 넘어 다시 희망의 깃발을 듭시다!
존경하는 침례교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전국의 3500여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저는 교단의 내일을 가늠할 중요한 길목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게 미래를 열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30년 전 우리 선배들이 눈물로 심었던 그 거룩한 씨앗을 기억해야 합니다. 30년 전, 우리에게는 ‘거룩한 야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3000교회 100만 성도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외쳤던 구호는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침례교회가 한국 교회의 희망이 되겠다”는 당찬 선언이었으며, 복음의 능력으로 시대를 돌파하겠다는 영적 결기였습니다. 그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 교단은 한국 교회사에 부흥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열정의 거룩한 불씨는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104차 총회에서 ‘부흥협력단’이라는 아름다운 동역의 저력을 통해, 개교회주의를 넘어 ‘함께하는 부흥 목회’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며 우리는 ‘상생’이라는 침례교만의 독특한 저력을 확인했습니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