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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충분성 (1)

쉽게 쓴 조직신학이야기 - 11
조동선 교수
한국침신대(조직신학)

성경은 죄인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제공하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데 충분하다(딤후 3:15~17). 그러므로 신학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그리스도인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지 판단해야 할 때 성경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완전한 안내자이다. 성경의 이런 특징은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마 19:5; 롬 9:17; 갈 3:8). 


다시 말하면,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예배, 바른 교리, 바른 실천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충분히 제시한다. 따라서 성경 이외에 우리에게 신앙의 권위를 행사하는 교단이나 교회의 전통, 신학자와 목회자의 가르침, 개인적인 영적 체험은 구원과 순종의 문제에서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소유할 수 없다. 성경의 본질과 권위에 비춰 본다면, 앞서 언급된 신앙의 권위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데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며, 안타깝지만 때로는 신자를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길로 인도하기도 한다. 성경 이외의 그 어떤 신앙의 권위도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필요로 하는 무오한 모든 영적 진리를 제시하지 못한다. 


성경에 우리가 믿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모든 뜻이 계시됐음을 부정하는 것이 타락의 시작이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사용했던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성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과 (아담을 통해) 하와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창 2:17). 그런데 사탄은 선악과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와를 유혹했다. 즉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하와와 그녀의 남편에게서 주지 않고 있다는 암시를 한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의 범위를 한 나무의 열매에서 “모든 나무의 열매”로 확대했고 하와는 “먹지 말라”는 명령의 범위를 “만지지도 말라”로 확대하면서 죽음의 즉각성을 희석시켜 버렸다. 사탄과 하와는 임의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의 범위를 바꿨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법적인 변형에서 멈추지 않고 아예 그것을 부정해 버렸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하와는 선악과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보다 훨씬 더 좋다고 확신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 아내의 제안에 더 큰 권위를 뒀다. 아담은 어떤 사물과 아이디어에 대한 가치 판단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자신의 아내에게 가르쳤어야 했다. 


종교개혁가들은 성경만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계시의 내용, 범위, 권위의 충분성을 “자료적 충분성”과 “형식적 충분성”로 설명했다. 성경의 자료적 충분성은 성경이 인간의 구원과 제자로서의 삶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수용하여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구원에 대한 분명한 길을 제시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지지받지 못하는 인간 사제나 성례전을 통한 구원론이나 믿음으로 시작하고 행위로(경건, 선행….) 완성된다는 신인협력 구원론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개인적인 신앙이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포괄주의을 배격해야 한다.


성경의 자료적 충분성은 구원과 윤리에 대한 모든 기독교 진리가 성경의 본문에 명확하게 제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성경의 중요한 진리가 성경 본문의 전제로서 혹은 본문에 간접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또는 같은 주제에 대해 언급된 여러 본문을 종합한 후 타당한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성경적 진리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1.6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 인간의 구원, 신앙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성경 속에 “명확하게” 기록될 뿐 아니라 “선하고 필요한” 논리적 결론으로써 성경에서 간접적으로 유추되기도 한다고 선언한다. 


간접적으로 암시되거나 논리적 추론을 통해 얻어진 신학적 결론이 성경 본문의 명확한 진술에서 얻어진 진리보다 권위 면에서 약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근본 신앙인 삼위일체는 성경의 명확한 진술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이 없다. “세 위격자인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데 각 위격자는 동일한 신성을 지닌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이 세 위격자의 아버지되심, 아들되심,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심의 위격적 정체성은 영원한 것이며 이 위격적 관계성은 서로 교환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 위격은 상호 내주하시기 때문에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모든 신성한 역사에 함께 하신다.” 이런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진술이 성경에 없다고 여호와의 증인처럼 삼위일체 신앙이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삼위일체 신앙은 인간의 이성적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모든 자료를 조화롭게 해석하고 그것들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논리적 결론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의 중요한 교리가 성경 본문에서 간접적으로 전제돼 있거나 논리적 추론을 통해 제시된다는 또 다른 예는 출애굽기 3:6을 인용해 부활의 신앙을 옹호한 예수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마 22:32). 사두개인들이 자식 없이 죽은 칠 형제와 살게 된 한 여인의 경우를 들어가며 예수님에게 육체적 부활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지적했다. 예수님이 인용한 출애굽기 3장 6절은 직접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신약의 교리를 억지로 구약 본문에 집어넣어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교정하려고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 출애굽기 3장 6절을 근거로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을 옹호하셨을 때 그들이 침묵했다는 것은 그분이 모세에게 주어진 본문이 간접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을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출애굽기 3장 6절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이 그들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구속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배경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언약 내용 중에는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 포함돼 있다(출 6:4). 하나님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영혼과만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연합이 이뤄진 인간들과 언약을 맺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다. 육체의 부활 신앙은 모세에게 십계명처럼 분명하게 직접적인 진술문의 형태로서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언약의 내용은 필연적으로 부활의 신앙을 요구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점을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간접적으로 그러나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이끌어 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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