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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명왕성

아산시 청소년 문학 공모전 대상 수상작
오가연 학생
대명교회(박요한 목사)

엄마에게 프리지어 한 다발을 사다 줬다. 못다 핀 꽃봉오리 사이로 노란빛을 야금야금 드러내며 한동안 비어있었던 유리병을 채웠다. 아마 초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엄마는 노란 꽃을 볼 때마다 당신이 좋아하는 예쁜 프리지어 이야기를 해왔을 것이다.


꽃집을 나와 집에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 한 시간 동안, 창밖의 쏜살같이 지나가는 어지러운 풍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자 옹기종기 모인 찬란한 꽃봉오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이사이로 보이는 노란색들이 엄마 얼굴을 서물서물 떠올리자 가슴이 시큰하게 저며왔다.


우주의 9번째 자리를 채우던, 그러나 태양계에서 쫓겨나 영원히 이방인이 된 소행성. 나는 명왕성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도저히 맞물리지 않는 두 문짝이 서로를 자꾸 긁고 밀다가 생겨난 부스러기처럼 이곳저곳을 굴러다녔다.


세 살 때부터 따로 살았던 부모님, 두 사람이 다시 함께 살게 된 후로도 밥 먹듯이 쌌던 이삿짐. 뿌리내릴 새도 없이 나는 어떤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부표 같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외로웠고 지긋지긋했다. 겨우 한 가족이 자리를 잡아 같은 동네에 산 지 두 해를 넘기자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그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머지않아 깨닫게 됐지만 말이다. 나는 아빠를, 또 엄마를, 우리 가족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빠가 자주 하던 뾰족한 말들이나 늘 지쳐있던 엄마의 얼굴도 견딜 만큼 사랑했었다.


언젠가부터 하나뿐인 작은 식탁 위에 서류 봉투 같은 것들이 놓이기 시작하자, 엄마와 아빠는 웃지 않았고 더 이상 아침도 함께 먹지 않았다. 열세 살,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아빠가 집을 떠난 날, 사랑이라는 말이 내 안에서 툭 떨어져 나갔다. 단추가 떨어져 나가서, 다시 비슷한 것을 찾아 달지 못해서 다 잠그지 못하는 셔츠가 옷걸이에 너덜너덜 걸려있었다.


나는 엄마를 잘 몰랐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아빠의 커다란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듯했다. 내가 여덟 살 되던 해, 다시 살림을 합치기로 결정한 엄마 아빠가 할머니 댁에 있던 나를 데리러 왔었다. “내가 네 엄마야.” 눅눅한 겨울밤, 차에 앉아 엄마가 이것저것 건넨 말들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막 여덟 살이 되었던 1월의 나는 엄마의 눈에 잠잠히 있던 슬픔을, 또 가만히 나를 쓰다듬던 손길을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엄마와 다섯 살에 헤어졌던 탓인지, 꼭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눈물 날만큼 따듯했다. 같은 집에 살기 시작하고, 같은 침대에서 잠들기도 하면서, 나는 엄마가 있는 삶에 익숙해졌다. 더 이상 엄마는 해마다 바뀌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엄마의 품속에 들어가 있을 때면, 당연한 듯 변하지 않을 사랑이 간질간질 나를 간지럽히곤 했다. 


그럼에도 아빠의 짙은 그림자는 엄마를 드리우고 있었다. 엄마와 만든 추억들을 꼭꼭 모아 선을 그려 보아도 선명한 윤곽이 그려지지 않았다.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잘 알았지만, 엄마는 여전히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졌다. 나는 아빠를 닮았었다. 아빠는 부드럽고 서글서글한 성격에, 청소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을 잘 그렸고, 기타도 잘 쳤다. 아빠는 아주 열심히 뭔가 극복하려고 애써 달려온 사람이었고, 본인이 걸어온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았기 때문에, 당신을 꼭 닮은 내가 당연히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좋은 것만 골라 닮지 못하고 약점마저도 가져와 거울처럼 당신을 비출 때,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던 그 약점들은 가시가 되어 아빠를 찔렀다. 


상처받은 아빠의 마음은 또 다른 가시가 되어 자주 나와 엄마를 향했다. 아빠와 엄마, 우리는 모두 거울 속에 비친 스스로와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없는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될 때, 그 반사의 과정을 단단히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왜 단 한 명도 없었을까. 두 사람은 같은 지붕 아래서 각자의 상처가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을 깨닫고, 결국 산산이 부서지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빠는 떠났다. 아빠와 보냈던 시간들 속에서 나를 먹이고 움직이게 했던 말 한마디는 마치 태양처럼 내가 하는 모든 것의 원동력이 되어주곤 했다.


나를 무럭무럭 길렀던 사랑의 갑작스러운 부재, 나는 난데없이 낯선 땅으로 옮겨진 어린 식물처럼 조금씩 메말라갔다. 직장에서 흐르는 매 시간마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겠지만, 내가 있는 텅 빈 집에까지 닿기엔 한계가 있었다. 홀로 집에 남아있는 동안 도무지 가시지 않는 통증의 원인을 짚을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내가 안은 모든 외로움의 책임을 엄마의 연약함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저 엄마가 도망쳤을 뿐이라는 생각에 종종 몹쓸 비수를 던졌다. 나는 몰랐다.


사랑의 모양이 다양하다는 것을. 엄마는 애써 나를 사랑했다. 나의 불안정함이 엄마를 마구마 구 찔러도 꿋꿋이 서서 나를 기다렸다. 외로운 타지에서 엄마는 나를 위해 도망치지 않고 수년간 괴로운 외사랑을 버텼다. 15살, 사춘기가 찾아왔고, 처음으로 나와 사람들이 다르단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나는 나와 다른 새로운 것들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이사를 자주 다녔던 나와 달리 한 동네에 오래 지내서 아는 길과 아는 사람이 많다거나, 가족이 다 같이 여행을 가서 찍었던 사진이 한가득 있다거나, 함께 웃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님이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면 기다리고 있다거나, 내가 받은 사랑은 밟으면 바스러져버릴 낙엽처럼 하찮아 보였다.


이 가시 돋친 열등감은 내 마음의 쓴 뿌리가 되어 나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의 관계에서는 물론, 사귀었던 많은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나를 잇던 모든 것들이 끊어진 것만 같았다. 혼자 빈 집에 돌아올 때마다 거대한 슬픔이 찾아왔다. 갑자기 엎드려 울기도 하고, 아픈 감정들을 잊으려 잠을 청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지쳤을 엄마는 일터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도 편안하기는커녕 잔뜩 어지럽혀진 집을 마주해야만 했다. “제발 조금만이라도 날 도와줄 순 없는 거니?” “엄마가 너무 힘들어.” 하나뿐인 딸일지언정 얼마나 미워 보였을까. 과거에 머문 나와 현실을 사는 엄마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기력감과 자책감에 빠진 나는 스스로를 자주 동굴 속에 가두곤 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펑펑 쏟던 나는 마치 집 안의 먹구름이 아니었을까. 엄마한테 미안하면서도 나는 내 스스로의 무거운 감정들을 감당하느라 도무지 주위를 돌아볼 줄 몰랐다. 등딱지 같은 그 짐이 나를 짓눌러 학교에 걸어갈 수조차 없었다. 결국 자퇴를 결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곳, 대안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곧장 짐을 싸 하숙집에 들어갔고, 여덟 살 이후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 생활하게 됐다. 선생님들은 무너져있으면서도 간절한 내게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우면서 귀한 사람인지, 또 내가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도록 극진히 가르쳐 주셨다. “네가 스스로 사랑받을 만하다고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도 무의식적으로 그걸 깨닫게 돼. 이유 없이 널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사랑스러워질 수 있어. 내가 한계에 직면해 원망하고 좌절할 때마다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충고해 주시곤 했다.


학교에서 내가 가진 작은 능력들이 여기저기에 좋은 쓰임새가 되는 것을 보고, 또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소망이 가득한 말들을 자꾸 상처 위에 덧대기 시작하니 나는 하늘을 향하는 나무처럼 쑥쑥 자라났다. 내가 짊어졌던 우울의 덩어리가 돌멩이만도 못한 작은 것으로 보이자, 상처받을까 다가가기 두려워했던 사람들에게도 점점 나아갈 용기가 생겼다. 과거의 어두운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 같아 가지 못했던 집에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널찍이 벌어진 엄마와의 골도 어느샌가 좁혀져 있었다. 일 년이 지난 초봄, 우연히 엄마와 오래 교제하시는 한 교회 집사님을 만났고,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다. 이른 나이에 자기 엄마를 여의고 도망치듯 결혼했던 한 여자의 이야기. 엄마는 그저 어떤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었다.


그날 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더 힘들게 했지. 너무 미안해, 잘못했어. 이제 와 말해서 더 미안해.” 묵묵히 목멘 사과를 듣던 엄마는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고 말했다. “있잖아. 나도 내 엄마한테 못해줬던 것들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는데, 또 다른 인연을 만나서 그 못해준 만큼을 채우게 되더라. 잃어버린 만큼 채워주는 만남이 있고, 상처받은 만큼 회복시켜주는 만남도 있어.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런 건가 봐. 나한테 못해줘서 후회한 만큼, 엄마 같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잘해 드려. 그거면 돼.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엄마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마치 기다려온 사람처럼 담담하기도 했다. 흐릿한 줄만 알았던 엄마의 사랑이 그 어떤 것보다 견고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꼭 붙들고 있던 외로움과 사랑받지 못했다는 어리석은 감정들이 와르르 무너져 뜨거운 안식처 한가운데 있는 내가 보였다.


엄마는 어른이면서도 자라나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동행자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엄마라는 사람의 성장해가는 인생길에 작은 나를 초대해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당신의 삶을 완성해가는 것이었다. 과거를 딛고 올라선 엄마의 모습을 거울처럼 내 안에 담아, 나는 나를 묶었던 과거의 감정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나는 엄마의 사랑을 조금 안다. 온갖 사랑 노래와 시에서 말하는 바다 같고 산 같은 그 사랑을. 이따금 심장 소리가 느껴진다.


엄마의 따뜻한 품 속에서 느껴지는 둑, 둑 하는 소리 말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가 들릴 때나,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뚜르르 하는 발신음을 들을 때, 또 마음이 약해져 익숙한 슬픔에 짓눌려 있을 때면 그 소리가 들린다. 보이지 않는 탯줄처럼 엄마와 나를 잇는 그 순간마다, 그리움도 후회도 스쳐 지나갈 뿐 더 이상 나는 매달리지 않는다. 이제 나는 나를 채운 사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안다. “이맘때쯤 프리지어가 필 텐데, 너희 엄마가 프리지어 좋아하는 것 아니?” 집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엄마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달라진 만큼, 또 상처가 아물어 나아진 만큼, 새로운 사랑을 전해주기로 했다. 조금만 있으면 환하게 꽃 필, 아직은 푸릇한, 그래서 더 설레는 프리지어를 한 아름 들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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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