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스 선교사의 눈에 비친 1899년의 당시 제주(켈파트섬)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가 기록한 “제주도 탐방기(A VISIT TO QUELPART)”의 일부를 살펴보자.
먼저 이 기행문은 원래 미국 유니언신학대학교 도서관(UTS)에 소장됐으나. 현재는 아이비리그 대학교 중 하나인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Columbia University Libraries) 시스템의 일부(Burke Library Archive)로 통합되어 관리되고 있다. 버크 도서관(Burke Library)은 북미에서 가장 큰 신학 도서관 중 하나로, 특히 “해외 선교 기구 기록물(Missionary Research Library Archives)”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국에서 활동했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본국 선교 본부에 보낸 “보고서, 편지, 일기, 사진 등”이 이곳으로 모이게 됐다.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기행문 원본 역시 당시 선교 보고의 하나로 제출되어 이곳 아카이브(기록 보관소)에 보존된 것이다. 기행문의 원본은 일기 형식이고, 손 글씨로 기록됐다. 원문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독자가 읽기 쉽게 편집했다.
비바람 속에서 시작된 제주 여정
우리는 22일 아침 목포를 떠났다. 그러나 출항한 지 2시간 만에 또 다른 한국의 증기선 “현익(Hyenik)”호를 만나게 됐다. 그 배는 막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제주에는 강풍이 불어 화물과 승객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소식을 전해줬다. 이는 항구 시설뿐 아니라 피항 시설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목포로 되돌아가 하루를 기다려야 했다. 그날 밤 12시가 되어서야 다시 출항할 수 있었고, 다음 날 정오 무렵 제주 해안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이 곧 안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해안에서 약 1마일(1.6km) 떨어진 곳에 닻을 내려야 했고, 비와 바람 속에서 3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작은 한국 배 두 척이 다가왔을 때 비로소 짐을 옮길 수 있었고, 온몸이 비에 젖은 채 30분을 더 버틴 후에야 제주 외곽의 한 어부의 허름한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의 고난은 시작됐다. 비는 무려 7일 동안 밤낮 없이 쏟아졌다. 우리는 넓이 6제곱피트(0.5평), 높이 6피트(1.8m)도 되지 않는 어둡고 좁은 방에 갇혀 지내야 했다. 대한(조선)을 여행하며 겪는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런 환경에 며칠간 갇혀 있는 일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길 위의 고단함과 기대
며칠 후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어둑해질 무렵, 비슷한 오두막 몇 채가 모여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출발 전, 이 섬에는 주막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지만, 대신 고을마다 관아에서 운영하는 객사(고려와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3마일(21km) 남짓한 거리였지만 하루 종일 걸은 우리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저 편안한 객사(관사)에서의 하룻밤을 간절히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기대와는 전혀 다른 현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관사의 방은 6제곱피트(0.5평)도 되지 않았고, 천장은 겨우 5피트(1.5m) 남짓이었다. 황토벽에는 거미줄이 가득했고, 천장은 연기로 검게 그을려 있었다. 바닥은 흙바닥이었고, 문은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 작은 크기였다. 방 한편에는 곡식 바구니와 낡은 겨울옷, 버선, 밀짚 가방, 항아리 등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그나마 이 방이 그 관사에서 가장 나은 곳이었다.
함께한 한국인 일꾼들은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밖에서 식사하고 헛간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우리는 낡은 버선과 더러운 벽 사이에서 잠을 청했다. 벼룩과 바퀴벌레는 그리 놀랍지 않았지만, 아침이 되자 온몸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집을 짓게 한 관리가 오히려 유배를 받아야 할 사람처럼 느껴졌다.
험난한 길, 끝없는 여정
다음 날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처음 30리(12km)는 비교적 평탄했지만, 마지막 20리(8km)는 매우 험난했다. 내리막길이었지만 날카로운 돌들이 발을 괴롭혔고, 우리는 계속 미끄러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길을 6시간 동안 빠르게 걸은 끝에 우리는 대정(제주 서남부 지역의 행정 구역)에 도착했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길이 포장되어 있었지만, 그 상태는 차라리 흙길이 더 나을 정도였다. 피곤과 배고픔에 지친 우리는 쉴 곳을 찾았지만, 마땅한 숙소는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우리는 결국 현감(조선시대 최하위의 지방행정 구역 단위였던 현(縣)의 종6품직 관직, 사또)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낯선 이들을 향한 작은 친절
병중에 있던 현감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그는 우리가 미리 찾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 오히려 미안함을 표했고, 주민들의 무성의함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쌀과자, 포멜로(감귤류), 꿀, 위스키, 설탕, 그리고 담배로 대접받았다. 관아 하인이 장죽(긴 담배 파이프)에 불을 붙여 건네주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후 우리는 숙소로 안내됐지만, 그곳 역시 단칸방이었다. 더구나 방에는 소의 축사와 마구간으로 통하는 문이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3일 동안 소와 말을 이웃 삼아 지내야 했다.
계속되는 비와 여정
넷째 날, 비가 그치는 듯하여 길을 나섰지만 곧 다시 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빗속에서 10리(4km)를 더 걸어야 했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젖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비로소 햇살이 비쳤다.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고, 그날은 비교적 길이 좋아 70리(27km)를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난 뒤에도 한 시간 반 동안 어두운 돌길을 걸어야 했다. 그 길 끝에서 도착한 쉼터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안도와 기쁨을 줬다.
고난 속에서 발견한 감사
수많은 상처와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감사할 수 있었다. “목이 부러지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