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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한 ‘평화’와 ‘화해’ 그리고 ‘용서’는 복음이 아니다


조선 수군의 주력선 판옥선이 일본 배 안택선을 충파라는 전술로 모두 깨어 부수듯이 영화 명량이 그동안의 영화 흥행 기록들을 산산이 깨뜨리고 있던 8월의 여름 중순, 대한민국의 심장인 광화문 광장에 카톨릭 신자를 비롯한 시민 약 17만 여명이 운집 한 가운데 교황 프란치스코는 시복식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자들을 숭배했다.


임진왜란으로 풍전등화였던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란 듯이 서 있는 곳에서 아무런 부끄러움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도리어 그들은 자신의 검은 죄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더 위장된 거룩과 의식으로 포장하면서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Society of Jesus or Jesuit)의 회원으로 제수이트 첫 교황이다. 바로 이 제수이트, 즉 예수회가 일본에 조총을 선물해주면서 임진왜란을 일으키도록 풍신수길을 유혹한 세력이다. 예수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후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교황 중심으로 세계 경제 및 정치 장악과 세상 종교 통합을 목적으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루시퍼를 숭배하는 프리메이슨과 연관하여 1534년 설립 후 1540년 교황 비오3세의 승인을 받은 수도회로 로마 카톨릭 내 검은 비밀 조직이다.


그들은 다른 예수’, ‘거짓() 그리스도를 믿는다. 1549년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 예수회 신부는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카톨릭 신자로 만든 다음 그로 하여금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키도록 미혹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로마 카톨릭에 조선을 바치겠다고 호언하며 조선을 침략한다.


당시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물론 그 휘하 병사들 대부분도 로마 카톨릭교회 신자들로 군단 이름이 그리스도단이었다. 그들은 예수회의 도움 아래 십자가 깃발을 휘날리며 조선 땅을 유린했고, 검정색 사제복에 로만칼라를 한 로마 카톨릭 사제 세스페데스는 코와 귀를 잘라내며 살육을 저지른 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면서 피 냄새 진동하는 약 1백만이 살육 당하는 현장에 성수를 뿌려댔다.


그렇게 이 땅을 짓밟으며 고통을 줬던 예수회의 후예이며 첫 예수회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가 십자가 깃발을 흔들며 이 땅을 유린했던 임진년 카톨릭 신자 군대 왜군을 바다에 수장하며 13전 전승을 거둔 충무공 이순신 동상 앞에서 죽은 자들을 숭배하는 미사를 드리는 것은 왠지 슬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 교황은 이미 록 가수보다 인기 있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는 모 신문의 기사처럼 814~18, 45일 동안 대한민국은 교황 신드롬(syndrome)이라기보다는 블랙홀(black hole)에 빠져들었다.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는 물론 정부, 정치, 경제, 문화, 언론 등 대한민국의 눈동자들은 온통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끌려 다녔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며 행동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뜨고 쫓아 다녔다. 비판이라는 단어는 감히 혀끝에도 담을 수 없는 분위기에서 온통 감동이라는 단어만을 연발하며 신이라도 강림한 것처럼 대한민국은 그의 노예가 되어 그를 맘껏 찬양하며 흥분했다. 세상의 관점에서 프란치스코의 교황의 방한동안의 족적들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가 외친 말들과 그가 보여 준 소위 약자들에게 행한 제스처(gesture)는 거의 신의 몸짓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주변으로 초청된 사람들 면면도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 소외받고 있다는 사람들 투성이었다.


화해를 외치는 그 현장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선을 긋고 비난 비방으로 적대시 하며 마음 쪼가리 하나 주려 하지 않는 그들만이 설치게 함으로 정작 화해는 머쓱해지고 갈등의 골만 더 깊게 하는 교황 스스로의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화해란 무엇인가? 서로의 갈등과 다툼을 그치고 서로가 가지고 있던 나쁜 감정을 푸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주변에 초청된 소외된 인사들은 좋든 싫든 그 반대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최소한 화해를 뜻하는 reconciliation의 라틴어 어원 함께 오다’, ‘같이 모이다라는 말처럼 모두는 아니더라도 그 반대편의 일부라도 함께 그 자리에 같이 모이도록 했어야 그의 말은 비로소 가치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교황과 가톨릭교회, 정부 언론 등 다수는 일방통행으로 일관했다. 아쉽지만 교황이 떠난 후 일부에서나마 교황과 우리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는 이들이 있어 그나마 숨을 쉰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스마트폰을 통한 SNS, You Tube 등을 통해 카톨릭교회의 기원과 범죄 등 실체가 일부나마 일반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카톨릭교회도 이런 것을 막고 싶은 심정은 지대하였을 것이나 그들의 신적인 능력도 이것만은 막을 수 없어 겉 희고 속 검은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남에 대해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 중 틈 날 때마다 외쳤던 평화’, ‘화해’, ‘희망’, ‘용서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의 입에서 평화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했고, 화해를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화해를 한 것처럼 최면에 걸렸다.


현실은 여전히 갈등과 대립이고, 분열과 적대감으로 충만한데,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의 말에 미혹되면서 그동안 쌓였던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인 양 착각의 늪에 빠져 들었다. 더 심각한 것은 교황이 성경을 들먹임으로 그가 말한 평화, 화해, 용서가 마치 성경에서 말한 평화와 화해 그리고 용서인 것처럼 믿어지게 한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속았고 지금도 속고 있다. 하지만 그가 외친 평화와 화해, 용서는 결코 성경도 복음도 아니었다. 사람과 세상에 꼭 필요한 말들이었지만 그가 세상에 큰 선물이라도 주듯이 던진, 무조건적 평화와 화해, 용서는 성경이 말한 평화와 화해 그리고 용서와는 분명 다른 것들이었다.


평화의 조건이나 방법으로의 화해, 화해를 이루기 위한 용서의 전제가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와 화해 그리고 용서는 우리가 복음서에서 수 없이 발견할 수 있듯이 주님이 하셨던 많은 말씀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교황의 말은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대변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교황의 말들은 비성경적이고 이교도적이다. 성경은 평화와 화해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우선적으로 이뤄야 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와 평화를 먼저 이룬 다음,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하나님과의 화목, 즉 화평케 하는 사명 감당을 말한다.


히즈키아스 박사가 평화와 화해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화해를 위한 4가지 차원을 언급하면서 제일 먼저 영적인 것을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화해가 먼저 이뤄지지 않으면 그 어떤 평화도 존재할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신 이유는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와 평화 그리고 용서가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화목함이었다.


죄와 죄인으로는 어떤 화해도 평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복음은 화해의 복음이다. 그리기에 복음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다. 예수그리스도의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비로소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면서 진정한 평화가 주어진 것이다.


평안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 다음에 주어지는 은총이다.(7:48~50) 교황은 종교지도자다. 그러기에 그는 바른 복음을 전했어야 하지만 로마 카톨릭교회는 태생적으로 복음을 말할 수 없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없는 태양신을 비롯한 각종 우상들과 마리아만이 숭배되는 가짜 기독교 가짜복음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반인들과 일부 기독교인들이 교황의 이런 거짓들을 성경의 복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있다. 이것을 경계시키고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한국교회뿐인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과연 그만한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즉 한국교회가 복음적이냐 하는 것이다. 성경적 복음으로 살아있는가이다. 이미 사데교회 같이 살았다하나 실상은 죽은 교회가 되어 가고 있으니 말이다. 교황을 흉내 내며 감동만 주려는 거짓의 강단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심령이 아프도록 좌우로 날선 검같이 외쳐야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앞으로 카톨릭교회는 더 왕성해 질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이제 교회는 외형적으로 살아남으려 하지 말고 오직 복음으로만 살아남으려 해야 한다. 오직 성경적 복음으로 살고 죽어야 한다. 세상의 평화가 아닌 십자가의 복음을 몸으로 소리쳐야 한다.


계인철 목사 / 광천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