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육체 기독교



루터가 자신의 신학을 상징한다며 만든 문장(紋章) ‘루터의 장미’(Luther Rose) 둘레에 새겨 넣은 글귀 그가 사신다’(Vivit)처럼, 오직 믿음으로 인한 오직 예수가 그 안에 살기 시작하면서 그의 내면세계 아드 폰테스(Ad Fontes)’, 신앙의 본질이 숨쉬기 시작했다. 그것이 교회와 세상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출발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인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4오직또는 ‘4솔라라 할 수 있는 오직 믿음으로’(솔라 피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솔라 그라티아), ‘오직 성경’(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솔라 글로리아)으로 거대한 종교권력을 향해 외침으로 사데교회 같은 거기에 생명의 주 예수를 믿음으로만이 의로워짐이 선포됐다. 그의 오직’, 솔라는 종교, 정치, 사회, 문화예술, 노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를 가져왔으며 더 나가 독일과 유럽 그리고 신대륙에까지 변화를 일으켰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국 본질, 즉 성경으로의 변화였다.


지금 한국교계는 종교개혁 500주년 특별행사들을 준비하며 각종 학술, 퍼포먼스 등 이벤트들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행사 준비 프로그램 안으로 들어가 보면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루터는 있으나 루터가 고민했던 진정한 개혁의 본질인 성경으로의 돌아감, 믿음의 결단과 그에 따른 삶 등 신앙의 본질과 예수는 정작 없어 보인다. 종교개혁의 햇수를 기념할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선교사를 뒤돌아보면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를 진단하고 상당부분 뒤틀어지고 이탈된 절체절명(絶體絶命) 상태의 우리 실상을 가감 없이 실토하면서 말씀에 의한 복음, 예수에게로의 돌이킴이라는 진정한 개혁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구호만 무성할 뿐 스스로의 성찰과 자정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는 삶으로의 돌아가는 결단과 실천적 행동이 없다.


500년 동안 생일밥만 먹었을 뿐 진정한 개혁이 없다보니 오늘의 우리들의 자화상은 창1:2의 상태나 다름이 없다. 혼돈, 공허, 어둠상태다. 교회와 목회자들의 범죄들이 사회에 연일 폭로되고 있는 우리들의 실제는 예수 없는 기독교다. 예수교가 아닌 육체교로 세상으로부터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쓸모없는 존재로 버림받은 교회가 됐다. ‘사르크스’(Savrx), 즉 육체 기독교로 사회의 순기능이 아닌 역기능적 존재로 괴물이 되어 개독교로 불린다. 타락한 본성, 즉 전인적 타락인 육체 종교로 육신의 생각들이 풍기는 역겨움을 천하에 드러내는 육체기독교다. 기도로 시작한 제헌국회, 헌법에 성경을 놓고 건국을 선언한 이 나라의 출발이 무색하도록 지금 정부나 국회는 개헌특위를 만들어 헌법 제36조의 혼인 규정에서 양성평등성평등으로 개정해 동성애, 수간, 기타의 성 등을 합법화하려 하는데도 기독교는 대안 없이 오합지졸이다.


사탄은 평등이라는 함정을 최대한 이용하며 평등이 마치 정의나 되는 것처럼 떠벌리며 하나님의 거룩에 도전을 하고 있는데도 육체화된 기독교는 소리만 지를 뿐 힘을 결집하지 못한다. 만약 시민종교의 바램대로 양성평등이 성평등으로 개정된다면 동성애, 수간 등으로 죄에 대한 말씀을 오늘날 교회는 자유롭게 증거할 수 없게 된다. 강단에서 레위기와 로마서에 나오는 관계된 말씀을 의도적으로 피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상황이 위급한데도 목회자의 성추문 사건은 끊이지 않고 언론을 넘나든다.


최근 청소년 부흥목사로 유명한 모 목사의 성추행은 우리 모두를 충격과 절망에 빠뜨렸다. 청소년 집회에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품었던 많은 청소년들은 이 소식 앞에 좌절하며 절망하다 못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영향력을 가졌던 부흥 목사의 타락은 한국교회를 부흥이 아닌 쇠락의 내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육체화된 목회자의 타락의 소식들은 거의 쉴 날이 없다. 영적 지도자가 육체 지도자로 시대를 울리는 선지자의 길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합법화해 죄의식을 제거함으로 회개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복음, 즉 성경을 단순한 책으로 전락시키려는 사탄의 음모가 갈수록 교활해지는데 기독교는 갈수록 세속적 종교인 육체기독교가 되고 있다.


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돈의 문제, 교회와 목회자간의 갈등들을 처리하는 방식도 모두 육체적이다. 이미 우리는 도덕성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신뢰 잃은 입으로 세상을 향해 정의를 외치는 모순의 극치를 드러내는 양심의 마비, 양심의 실종상태가 됐다. 존 맥아더가 그의 저서 양심의 실종에서 양심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선천적인 능력이다인간이 알 수 있는 가장 높은 기준의 빛을 통해 행동과 생각을 판단하는 인간의 능력이다.”고 말한 바로 그 능력이 소멸됐다. 높이와 넓이만을 자랑하던 대형교회들은 깊이를 잃고 본질에서 멀어지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목격되고 있다. 주님은 겉이 아닌 중심을 보셨지만 오늘의 교회는 외형만을 보고 주님의 관심영역인 중심은 무시한다.


최근 종교인 과세에 대하여서도 한국교회는 당당하지 못하다. 왜 당당하지 못하는가? 교회가 일반적 상상을 뛰어넘는 목회자 사례비를 비롯해 교회 재산과 관계되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고, 현재도 교회들 중 일부는 교회 재산을 놓고 분쟁 중이다. 생존의 문제를 신음하는 중소형 교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그들은 벌이고 있다. 재정의 투명성은 비록 교회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지켜야 할 경제 정의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과세문제에 민감한 것은 불투명한 재정 운영과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세금 탈세 또는 탈류 같은 부도덕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의 간섭을 염려하기보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스스로 투명해져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 기관, 총회의 갈등들을 처리하는 것도 가능한 교회 내에서 성경적으로 처리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요즘은 여차하며 법원으로 달려간다.


법 감정과 성경의 감정이 분명히 다르기에 함께 고민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말씀으로 서로의 문제를 만지며 풀어보려는 신앙적 의지보다는 너무 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법을 활용하는 것은 자유지만 법은 진리도 교회의 길잡이도 아니다. 법에서 옳다 해서 그것이 성경과 교회에서 옳은 것이 아님으로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가치 또는 상식보다 주님의 마음으로 복음의 가치와 말씀에 준거한 믿음으로 모든 것에 반응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시대적 조류에 따라 동성애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고 말한 유진 피터슨처럼 육체 기독교가 돼서는 안 된다. 더 이상의 육체적 교회, 육체적 목사와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교회, 진정한 성경적 교회로 다시 살아야 한다.


세상이 말한 기독교가 아닌 성경이 말한 즉, 주님이 말씀하신 교회와 목회 그리고 신앙이어야 한다. 사데교회와 같아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보여 주기식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아닌 진정한 개혁을 시작하는 다시 종교개혁의 원년이 돼야 한다. 내 생각과 시대의 요구가 아닌 주님의 말씀 성경과 이 시대 이루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성경으로의 개혁을 할 때 우리는 육체기독교가 아닌 진정한 예수가 있는, 예수가 진정으로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이 그 뜻을 이르시기 위해 쓰시는 기독교, 세상을 이기는 소금과 빛된 기독교가 된다.


계인철 목사 광천중앙교회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