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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기독교

‘당신은 상식적인 사람인가요? 다음 영상에서 비상식적인 점을 찾아보세요.’라는 문구가 나오면서 시작된 영상에는 회사 간부쯤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공사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고압적인 태도로 훈계를 하고, 듣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어서 ‘찾으셨나요?’라는 자막이 뜨면서 비정상적인 것을 찾았느냐는 질문을 여러 사람에게 한 다음, ‘그것도 맞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라며 ‘현장에 안전모 미착용’이라는 자막이 뜬다. 공사 현장에서는 누구든 안전모를 쓰는 상식을 지키라는 모 회사의 공익캠페인이다.


상식이란 보통사람들이 가지는 보편적 가치를 이른다. 물론 이 말은 상대성을 가진다. 일반상식은 보편성이지만 그 일반상식 범위를 벗어나 존재하는 상식과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보편적 상식과 특별 상식 모두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를 존중한다. 이는 예수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시지만 그의 머리 된 교회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복음의 특수성과 함께 상식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세상은 서로를 향하여 상식 내의 삶을 요구한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의 일부 교회들은 상식적이지 못하다.


얼마 전 한국교회의 명성을 대표하던 A교회가 후임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불편한 용어 세습이라는 단어가 또 다시 한국교회를 이 사회의 비난을 넘어 분노대상으로 만들었다. 교회는 단순히 후임을 세운 것이지만 세상의 눈에는 대기업을(?)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세습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교회가 세습이 아니고 정당한 교회의 절차를 거쳐서 이뤄진 것이라고 해도 우리 사회가 비난하며 저항하는 세습이라는 단어의 세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물론 자녀를 후임으로 두었다고 하여서 모두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또한 절대성을 지닐 수 없는 상대성 때문이다. 시골교회 또는 작은 교회의 담임이었다면, 어려운 교회였다면, 그 아들을 그 작고 어려운 교회 후임으로 적극 추천하고 권장해 청빙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런 비교 자체가 모순이다. 그럼에도 상대적 비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A교회의 선택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를 다 같은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항변할 수 있다. 우리교회는 모양을 같지만 내용은 다르다고 말할 있다. 맞다. 모든 교회를 다 같은 교회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기에 최근 한국교회의 대표적 교회라 할 수 있는 교회가 사회의 비난을 받으며 후임 청빙을 강행한 것은 그 어떤 합리적 변명을 늘어놓아도 성경적 교회와 그동안 그 교회가 보여 줬던 교회다움도 아니다. 그래서 비난을 받는 것이다.


사실 시골이든, 도시 개척교회이든, 작은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그것이 긍정적이었든 부정적이었든 찻잔의 태풍으로 끝나곤 한다. 그 흔한 나비효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형교회들은 그렇지 않다. 교세만큼이나 사회적 영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대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부여되어져 있다.

이렇게 한국교회를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교회들이 자살골을 넣을 때, 가득이나 전도가 안 되어 힘겹게 버티는 많은 교회들은 벙어리 냉가슴을 하며 답답하다 못해 좌절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참고 묵묵히 기도하며 되지도 않는 전도에 나름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서 간절히 소망하며 소리친다.


제발 우리 상식적으로 살자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주님의 뜻이었다고, 우리 교회적으로는 아무 문제없이 모든 성도가 찬성해 이뤄진 일이니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며 속이지 말자.
그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상식도, 성경과 교회, 신앙의 상식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한 번만이라도 당신들 교회에 모여든 교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헤아려보라. 그들이 당신의 집에 온 것이 상식적이었는지, 그들을 받아들인 당신도 상식의 사람이었는지. 하나님 앞에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양심과 교회 앞에서 나는 과연 상식적인 신자이고 목사인지를. 왜 그러냐고,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하며 변명하지 말고 상식의 거울 앞에서 당신의 실상을 정직하게 보라. 교회는 세상을 쫓아서는 안 되지만 세상을 버려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찾아오신 것처럼 교회도 세상으로 가야하고, 세상에서 기독교의 본질적 상식을 보여줘야 한다.


기독교적 상식이 실재하게 해야 한다. 지금은 좀 낡은 감이 있지만 18,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신앙을 철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수입했던 스코틀랜드 철학자 토마스 리드(Thomas Reid)가 데이비드 흄 같은 급진주의적인 회의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주장한 상식적 실재론이라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물론 데카르트(Rene Descartes)로부터 시작된 의식 중심의 철학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생각, 성경이 품고 있는 생각, 복음의 의식들을 단순히 의식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각, 즉 의식들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실재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세계가 진정으로 우리의 삶의 세계가 되어야 하듯이,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우리의 신앙과 삶, 교회와 목회의 실재가 돼야 지 사람의 욕심과 명예, 혈통 의식들이 실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주되신 주님의 소유이지 목사나 교회의 그 어느 특정인에게 소유된 자산이 아니다. 그래서 교회는 상속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작금의 우리들의 자화상, 세상에 비친 한국 기독교의 자화상은 예수그리스도와 성경적 실재가 아닌 세속적 가치로 물든 일그러진 모습이다. 최소한의 도덕적 책임을 지는 상식,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즉 닭 벼슬과 계란 노른자 값이라도 제대로 하는 최소한의 상식을 지켰으면 좋겠다.


그 말 많던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됐다. 제발 새 해에는 상식적인 신앙, 상식적인 교회, 상식적인 목회, 상식적인 기독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개 교회는 물론, 교단과 교단 내 기관들로 그리스도적이고 성경적인 상식이었으면 좋겠다. 새 해에는 더 이상 일그러진 영웅을 보지 않기를 소망한다. 더 이상 한국교회가 명성을 잃지 않는 진정한 교회의 명성을 회복하는 새해가 됐으면 한다. 구차한 변명 더 이상 하지 않는 진정한 상식이 있는 기독교이기를 소망하며 하리 퍼(Harper Lee)의 ‘앵무새 죽이기’에 나오는 변호사 애티커스의 말을 옮긴다.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


계인철 목사 광천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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