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타나 크리스천 묘비)카와타나 크리스천 묘비는 오오무라의 코오리 쿠즈레 이후 오오무라영에서 기적적으로 파괴를 면하고 남아 있는 크리스천 묘비의 하나이다. 묘비 상부의 둥근 원 안에 CRVS(크루스, 십자가)와 그 아래에 MACi(만시아, 세례명)를 나타내는 글자를 교묘하게 중복하여 새겨 넣어 크리스천 검색을 피하고자 한 흔적이 엿보인다. 또한 토미나가의 처, 겐나 8년이라는 한자도 새겨져 있어서 카와타나 지역의 크리스천 사무라이 가족의 묘비로 추정된다. 이 같은 화양절충양식의 크리스천 묘비는 전국에서도 진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시미 크리스천 묘비)하사미 크리스천 묘석은 크리스천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석공의 손을 빌지 않고 조잡한 솜씨로 가족이 직접 비밀스럽게 십자가 문양만을 음각한 것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토대도 없이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이 당시의 엄중한 검색 중에도 남아 있게 된 것은 기존의 다른 묘비들과는 달리 자연석으로 세운 묘비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의 크리스천 분포의 실증자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에부미[성화 밟기])에부미(성화 밟기)는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큐슈 내에서 크리스천 적발을 위해 시행된 정신적 고
누가 인도했나?원형교회의 부흥은 곧 바로 다른 교회를 분가시키는 힘이 된다. 원형교회가 잘 되면 다음 교회 분가도 잘 된다는 뜻이다. 그 예를 안디옥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는 정치적 핍박을 받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일부가 안디옥까지 흩어져 안디옥교회를 세웠다(행 8:1; 11:19). 놀라운 것은 신생 안디옥교회가 교회를 개척하자마자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이다(행 11:21).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안디옥교회의 창립 멤버가 예루살렘교회 출신들이란 사실이다. 이들 핵심은 마리아와 바나바로 예루살렘에서 이미 가정교회로 성공의 맛을 본 자들로 안디옥교회를 세우는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과거에 예루살렘교회에서 성공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수’의 힘이다. 즉 예루살렘교회에서의 사랑과 섬김의 힘은 안디옥교회에 그대로 전수되어 교회 일꾼들을 세우고 복음을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마리아의 신앙을 전수 받은 자들이 바로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행 13:1) 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분이 높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
1. 들어가는 말중동은 기독교 복음이 시작된 발원지이면서도, 세계 복음화 완성의 여정에서 볼 때 사탄의 가장 완강한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주후 6세기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피땀 흘린 노력으로 기독교가 왕성하게 꽃피웠다. 그러나 A.D. 610년경 무함마드로부터 이슬람 공동체가 시작된 이후, 불과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이 지역은 이슬람교에 의해 초토화됐고, 사탄은 일천년 이상동안 이 지역을 장악하며 이 곳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가리고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그동안 이 지역 영혼들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가 계속 있어 왔다. 특히 19세기 후반 영·미를 중심으로 해외 선교운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에, 이 지역은 기독교 성지로서 특별한 관심을 받고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내왕했고 사역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특성과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에 직면하여 선교 사역의 열매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중동 이슬람권 선교의 열쇠가 지난 세기 부흥의 주역이었던 한국 교회와 한국 선교사들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과 수 차례에 걸친
(시마바라 성)1616년 시마바라에 영주로 임명 받아 오게 된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7년간의 혹독한 공사를 벌여 1624년 시마바라 성을 축성했다.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아들인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시마바라성 건설을 위한 과중한 부담으로 영민을 괴롭게 한 아버지 시게마사 이상으로 중세를 부과하고 금교의 이름으로 크리스천 영민들을 위협했다. 당시 이상기후로 인해 해마다 흉작이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카츠이에는 혹독하게 세금과 부역을 부과했고 납부하지 못한 영민들의 등에 짚을 지게 하고 거기에 불을 지르는 등 잔혹한 형벌을 시행했다. 1637년 8월경 기아와 흉작 그리고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 받는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에 불온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12월경 세금을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한 쿠치노츠의 임신부를 물고문하여 임신부와 태내 아이까지 살해한 것에 영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시마바라 반도 남부 지역의 대관들을 습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하라성 혼마루에 세워진 소년장수 야마쿠사 시로 동상)1637년 12월 12일 소년 장수 아마쿠사 시로를 총대장으로 하여 크리스천 신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농민군 약 3만7천여 명이 시마바라성으로
초대교회가 잘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극복하고 헬라권 전 지역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평신도들의 희생과 섬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과감히 자기 집(오이코스)을 오픈해 예배를 드렸다. 가정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 시발점이 예루살렘교회이다. 재미있는 것은 예루살렘교회는 처음부터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 예배 모임이 있었다. 마치 미주 한인교회에서 한어부 예배(KM)와 영어부 예배(EM)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신학자들에 따르면 예루살렘교회는 헬라파 중심의 ‘헬라어 사용자들의 모임’과 히브리파 중심의 ‘아람어 사용자들의 모임’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 6장 1절을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구제 사업으로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들이 서로 다툰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이미 다문화 예배가 진행됐는데 헬라어로, 아람어로, 때로는 함께 예배드린 것이다.그렇다면 예루살렘교회에서 누가 헬라어 사용자들의 모임을 인도했을까?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이다. 마리아 앞에 마가 요한이란 수식어가 있는데 마가는 로마식, 요한은
(미미사이 정류소)나가사키로부터 운젠지옥으로 보내지는 것을 ‘야마이리(입산)’라고 불렀는데 나가사키로부터 모기로 나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오바마에 상륙하여 운젠에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야마이리의 신자들은 한쪽 귀를 잘린 채 끌려갔는데 이는 탈주하더라도 곧바로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오바마로부터 운젠을 향해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도중에 크리스천의 귀를 잘랐던 옛 관청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미미사이(귀 자르기)정류소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순교자의 오솔길)오바마와 구치노츠 그리고 아리에로부터 운젠으로 올라오는 길들이 합쳐지는 지점에 “여기부터 운젠”이라고 하는 석주가 있고, 그 옆에 “이 길을 따라 운젠지옥으로 끌려가는 크리스천들이 걸었다”고 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1616년 시마바라에 영주로 임명 받아 오게 된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처음엔 기독교의 선교를 묵인하였다. 시마바라성의 건설을 위해서는 영민들의 협력도 필요한데다 크리스천이 많은 시마바라를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에도에의 참부 후에 갑자기 박해를 시작하였다. 토쿠가와 이에미츠로부터 질책을 받은 것이 원인이었다. 토자마(변방지역) 다이묘들을 갈아치우던
(스즈타 감옥터)스즈타 감옥은 오오무라의 남쪽으로 이사하야로 통하는 국도 근처의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원래의 오오무라 감옥은 혼코우지 감옥이라고도 불리며 3대 번주인 스미노부의 때인 케이안 원년(1648)에 나가사키 봉행의 요청으로 외국인 죄수들과 특별히 막부의 명령으로 체포한 죄인들을 가두어두기 위해 건립됐다. 오오무라가의 기록에 의하면 ‘기존의 감옥이 타마치에 있어 그것을 부쿠로코지로 이전했다. 겐나 년도(1618)에 나가사키 부교의 명에 의해 스피노라 선교사와 신도들을 부쿠로코지의 감옥에 수감하였다가(1619년 8월 조선인 베드로 아리조의 참외 반입사건으로 인해) 이들을 스즈타 감옥(1619)으로 이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는 그 부근에 1959년에 세워진 높이 6m의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다. 이 감옥은 1618년 12월 13일에 나가사키에서 체포된 선교사들과 신자들 35명이 1619년 8월 7일부터 1622년 9월 9일까지 수감되었던 장소로 알려지고 있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3인이 사망하고 스피노라 선교사 등 24인은 1622년 9월 9일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다음날인 10일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하였고, 프랑코 선교사 등 8명
초대교회가 수많은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고 헬라 전 지역에 선교를 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로마의 3백년간의 평화 시기, 도로 발달, 헬라어 통용, 박해, 순교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했다. 이러한 일반적 요인이 초대교회를 확장시키는데 일등 공신이라고 주장한 학자로는 허버트 케인(Herbert Kane), 후스토 곤잘레스(Justo L. Gonzales) 등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여 눈길을 끌고 있는데 소위 가정교회 요인이다. 대표 학자로는 로저 게링(Roger W. Gehring), 브래들리 블루(Bradley B. Blue), 빈센트 브라닉(Vincent Branick), 델 버키(Del Birkey)와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종전의 일반적 요인도 초대교회의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지만 이와 함께 가정교회가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렇다면 초대교회 당시 가정교회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그토록 파워가 넘쳤는지 궁금하다.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은 주로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예를 들어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행 12:12), 루디아의 집(행 16:15), 아굴라와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AD 451년 로마 감독이었던 레오 1세는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교황권의 강화는 로만 가톨릭에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오게 되어 점차 로만 가톨릭의 세속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정치 면에서 세속 군주와의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됐으며, 성상 숭배의 허용으로 동?서방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게 됐다. 교황의 아비뇽 유수로 인해 절대시되던 로만 가톨릭의 권위는 실추됐고, 교황제도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에 따른 로만 가톨릭의 타락상으로 인하여 수도원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토양이 조성됐다. 또한 존 위클리프를 비롯한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을 통해 성경의 권위가 강조되고 교황과 로만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종교 개혁운동의 분위기가 확산됐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의 불길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이러한 종교개혁운동에 영향을 받아 로만 가톨릭 내부에서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의 하나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카회를 비롯한 탁발수도회에 의한 해외선교가 활발하게 추진되었는데, 특히 1534년 이그나
은혜와 하나됨저희의 모든 것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할렐루야! 지난 3월 31일 감동과 감사가 넘치는 빌리지교회와 연합 부활절예배를 드리고 저희 가족은 아프리카 지부 침례교 선교사 대회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케이프타운으로 향했습니다. 선교사대회는 “은혜와 하나됨”이란 주제로 28명의 선교사님들과 11명의 자녀들 그리고 19명의 강사분들과 함께 프로그램(예배, 소개시간, 강의, 새벽예배, 저녁집회, 기도회, 총회, 케이프타운 탐방)이 진행됐습니다.각 강의 때마다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저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쉼이 됐습니다. 또 같은 아프리카 지역에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했던 선교사님들과의 만남과 교제와 오랜만에 만나 뵈는 파송교회의 목사님과 사모님과의 시간도 어찌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케이프타운 탐방시간에는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또 한 번 감격해 절로 탄성이 쏟아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의학 공부와 치료한의사 시험이 계속 연기되고(가나에 시험문제를 가지고 오기로 되어있는 분의 가나입국의 연기로) 있는 가운데 한의원에서의 공부와 치료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크라한방병원에서 저와 함께 섬기는 분들과 매일 말씀을 나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