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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인교육의 관점에서 본 평신도신학-3

이석철 교수
침신대 기독교교육학과

4. 우리나라의 평신도신학 현황
WCC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평신도신학은 보수적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 개신교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평신도 훈련으로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던 옥한흠 목사는 1980년대 초부터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1984년에는 자신의 철학과 사역을 담은 “평신도를 깨운다”를 통해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 평신도에 관한 한국교계의 관심은 계속 이어졌고 1986년에는 총신대학부설 한국교회문제연구소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어 다각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


1992년에는 옥한흠 외 7인에 의한 소책자 “평신도”가 출간됐으며, 1997년에는 심일섭의 “평신도신학과 한국교회의 미래”가 나왔다. 이 자료는 우리나라의 기독교 토착화 운동을 평신도신학의 관점에서 다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듬해에 출간된 김점옥의 “평신도 사역자를 키우라”는 주로 교회성장을 위한 평신도 리더의 훈련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평신도 분야의 발전 과정은 느리게 진행됐고, 체계적인 신학의 정립보다는 교회성장을 목적으로 한 평신도 훈련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일은 당시 평신도교회 운동을 실천하던 최승호가 1998년에 “21세기 한국교회의 비전”이라는 저술을 통해 성직자 중심의 교회와 상반되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론을 공개적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또한 ‘선교단체’라고 불려온 교회병행 단체들의 평신도운동이 1950~1960년대부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꾸준히 펼쳐져 온 점도 특이하다. 그중에서도 한국기독학생회(IVF)는 대학생층을 넘어서 우리나라의 평신도신학 정립과 평신도운동의 실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평신도신학 담론의 중심적 역할을 해온 송인규 교수의 저술들을 보급한 것은 매우 중요한 업적이다. 최근에는 ‘일상생활사역 연구회’를 통해 평신도신학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주도하고 있다. 평신도 문제에 관한 연구와 출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오고 있는 또 다른 기관은 평신도신학연구소와 월간지 “복음과 상황”이다. 평신도신학연구소에서는 일찍이 크래머의 명저인 “평신도 신학과 교회갱신”을  출간했고, “평신도 주석”을 펴냈다.


“복음과 상황”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평신도 문제를 중요하게 다뤄왔다. 그중에는 “송인규 교수가 들려주는 평신도신학 강의” 시리즈 기획물이 있었다. 그리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평신도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오고 있는 기관으로는 방선기 교수를 중심으로 한 이랜드의 직장사역연구소, 그리고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꼽을 수 있다.


Ⅲ. 평신도신학의 주요 내용
1.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라오스’

평신도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론의 문제이다. 크래머는 평신도 문제를 논하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교회론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콘가르도 “근본적으로 유용한 한 가지의 평신도신학만이 있을 수 있다”며, 그것은 “총체적 교회론”이라고 했다. 이들이 교회론의 관점에서 전개한 평신도신학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는 ‘누가 교회의 구성원인가?’의 문제였다. 전통적 입장은 한 마디로 “사제 없이는 교회가 없다”는 ‘사제주의’ 또는 성직자 교권주의였다. 이는 “교직자 ̒성직자̕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입장으로 이후 만인제사장론에 의해 비성경적인 것으로 도전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톨릭 진영에서는 교회를 이루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이원론적인 태도를 보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조차도 여전히 “낡은 방식의 뚜렷한 흔적”을 담고 있을 정도로 성직자 중심의 교회관은 강하게 지속했다.


예컨대, “주교(감독) 안에서…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믿는 자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규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동 문서가 평신도에 관해 규정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평신도들은 스스로 교회를 ‘구성’하지 못하며 오직 사제들에 의해 구성된 교회를 위해 ‘공헌’하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가톨릭교회의 교회론과 평신도를 보는 견해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사제들을 하느님의 원로원으로 마치 사도단처럼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 없이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평신도신학자들이 천명해 온 교회론의 핵심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가 성경적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서 ‘라오스’(laos)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인 전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1세기 말 로마의 클레멘트는 ‘평범한 무리에 속한 자’를 의미하는 ‘라이코스’라는 단어로 그리스도인을 지칭했다. 그 후로 이 말은 성직자와 구별되는 계층으로서 평신도를 지칭하는 말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단어는 라틴어 ‘라이쿠스’(laicus)와 영어의 ‘레이’(lay, 명사형은 laity)라는 말이 됐는데, 이 단어들은 성직자나 전문가와 구별되는 평신도 또는 비전문가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이처럼 교회역사에서 외면당했던 성경적 단어 ‘라오스’는 신분의 차별 없이 동등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을 포괄적으로 뜻하는 단어이다. 만일 성직자들이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별종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 백성의 반열에 부르심을 받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 안에 필요에 따라 ‘성직’을 맡은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이다. 스토트는 그것이 ‘제사장과 백성’의 구분이 아니라 오직 ‘회중과 리더’의 구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누가 누구에게 속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성직에 속해 있는 평신도(라오스)가 아니요 평신도(라오스)에 속해 있는 성직”이라고 했다.


평신도신학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학자인 폴 스티븐스는 “진정한 성경적 기반을 회복”하기 위해 ‘한 백성 신학’의 정립을 역설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 즉 ‘라오스’ 안에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모두 포함되는 것이며 다만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각을 “성직 평신도”와 “비 성직 평신도”라고 구별하기도 했다. 그가 이런 표현을 쓴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성직 백성’과 ‘비 성직 백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라오스’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더 잘 살려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평신도’라는 말은 이미 전문 ‘성직자’와 구별되는 용어로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백성’ 대신 ‘성도’라는 말을 쓸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성도’라고 할 때 목회자를 제외한 개념으로 통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스토트의 저서도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재번역되어 나올 때 종전의 제목인 “현대교회와 평신도 훈련” 대신 “한 백성”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는데, 원서의 제목도 “One People”이라는 점을 볼 때 더 나은 제목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목회자와 평신도의 역할
평신도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온 또 하나의 주제는,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는 성직자 중심의 교권주의적 행습을 바로 잡는 일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교회에서 교역자와 평신도의 위치나 역할을 성경적인 근거로 규명하고 실제 삶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문제였다. 초기 교회의 모습은 ‘조직체’라기보다는 ‘공동체’였다. 그리고 교회에 속한 이들은 “공동체 구성원의 평등성을 담보하는 ‘제자’와 ‘성도’였다.” 그런데 또한 분명한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다른 성도들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사도, 집사, 장로 등으로 불리던 사람들이다. 이렇듯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느 시대나 사람들의 집단에서는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의미의 성직자는 아니었다고 깁스와 몰턴은 강조한다. 다만 교회의 필요에 따라 “각기 섬기는 일의 특별한 재능을 가진 교회의 신도들”이 있을 뿐이었고 그것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분명해진 것은 “교회 생활의 중심이 사람들의 살고 있는 집으로부터 예배를 드리려고 사람들이 오갔던 특별한 장소로 옮겨졌을 때”라고 그들은 봤다.
평등해야 할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역사 속에서 불평등하고 계급적인 구조로 탈바꿈한 것에 대해 평신도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비판한다.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계급적인 교권주의일 뿐, 지도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깁스와 몰턴도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유기적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적 조직체이기도 한데, “조직이란 어떤 종류의 구조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