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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세워 달라(삼상8:1~22)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9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에벤에셀의 영웅 사무엘도 어느새 힘없는 노인이 됐다.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늙으매라는 말로 시작된다. 너무 빨리 늙었다. 어머니 한나에 의해 잉태됐다는 것과 어린 시절에 대한 분량에 비해 사사와 선지자, 제사장으로서의 사역 분량이 너무 짧다.

 

미스바 집회 이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승했다는 말씀을 하자마자 바로 은퇴를 준비한다. 물론 이후에 아예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적인 사역은 여기가 끝이다. 앞으로는 사울과 다윗으로의 왕정 승계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런데 이게 사무엘의 사명(使命)이다.

 

왕을 세우고 왕정의 기초를 닦는 일 외에 다른 인생 이야기는 없다. 왕 세우는 일도 사무엘 입장에서는 기쁨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과 백성들의 요구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 그런데 이런 게 사명이다.

 

사명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게 아니고, 싫어도 하는 것, 사무엘은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명에 충성했고, 위대한 다윗 왕조를 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년의 사역이 그의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요구였던 왕을 세워 달라라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생각대로 할 때가 더 많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이게 나라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은 대를 이어 사사가 된 사무엘 자녀들의 부당한 판결을 빌미 삼아 사무엘에게 제도 개선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요즘 말로 이게 나라냐?” 그러고 일어난 것이다. 좀 불편한 진실은 선한 선지자 사무엘이 자녀교육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사사의 주 업무가 재판(裁判)인데 사무엘의 아들들이 뇌물을 받고 엉터리 판결을 했던 모양이다(3).

 

아들들이 백성들을 불편하게 한 것, 사무엘이 자녀교육에 실패했기 때문일까?

희한하게도 성경에 사무엘의 아내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도 없다. 어머니 한나의 열심이라면 며느리를 아무나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사무엘이 어릴 적부터 성소에서 지냈으니 길거리에서 만난 아무개도 아닐 텐데 성경은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녀교육은 아무도 함부로 큰소리칠 수 없는 문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이 내린 부정적인 평가는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사무엘 자녀들 입장도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들은 아들들대로 인생이 따로 있는데 사무엘의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그저 그의 아들들’(3), ‘당신의 아들들’(5)이라고만 불리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무엘이 위대한 분이라는 것이 자랑이기는 해도 누구 아들로 사는 것은 부담일 수 있다. 큰 나무 그늘 밑에서 주눅이 들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 그들은 아마 늘 비교당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을 것이다.

 

또 어쩌면 사무엘의 아들들은 왕정 제도 도입을 위한 이념 싸움의 희생양일 수도 있다(5절 참조). 요즘 식으로 심하게 표현하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니 아예 제도를 바꾸자는 것인데 그들의 목적은 왕을 세우는 것이고 사무엘은 반대했기 때문에 자녀들이 타깃이 됐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짐작 정도이지만 어쩌면 사무엘 아들들의 잘못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침소봉대(針小棒大)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원래 싸움은 상대방의 작은 흠집도 키우기 때문이다. 여하튼 왕을 세우고 싶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게 나라냐?’라며 사무엘 아들들의 문제를 집중 거론한다.

 

제도 개선 요구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사 체제의 비효율성을 문제 삼고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한 것은 제도를 개선하자는 것이다. “모든 나라와 같이”(5), 주변 국가들이 다 왕이 있는 것은 맞고, 왕정 제도가 나름 효율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주고 국가 경영을 책임있게 하라는 제도라 국가 통제에 효율성이 있고, 강한 군사력을 길러 안보를 튼튼히 하는데에도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이 없는 사사 체제,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면 그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지도하고 평상시 재판을 담당하기에 국가 통제에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 또 상비군도 없다. 긍정적으로는 열두 지파평등체제, 특정 지파나 사람이 독재하지 않고 자기 지역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것, 이게 하나님이 원하신 체제인데 장로들은 이 체제로는 발전이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게 인본주의(人本主義)이고,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사무엘도 기뻐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끝없는 비탄으로 사무엘은 왕정 제도가 가진 폐해를 장황하게 설명한다(10~18). 사무엘이 비판한 내용을 보면 너희 아들들이 강제로 군에 입대해야 하고, 강제 부역을 하게될 것이다. 너희 딸들도 노예처럼 될 것이고, 너희 곡식과 양 떼와 노예를 빼앗기거나 세금 탈취가 심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고집스럽게 왕을 요구한다. 마치 탕자가 자기 분깃 달라고 조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탕자는 다 탕진한 후에 품꾼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 사무엘의 신랄한 비판이 솔로몬 시대에 현실이 된다. 솔로몬 시대에 궁중의 하루 식량이 밀가루 30, 굵은 밀가루 60, 30마리, 100마리였다(왕상4:22~23). 이 돈이 다 어디서 나오나? 세금이다. 솔로몬은 왕궁 짓는 데 13, 성전 짓는 데 7, 무려 20년 동안 물질과 노동력을 착취했다. 왕정 폐단의 극치였다. 결국 이 왕정 제도의 폐단이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분열되게 한다. 사무엘의 우려대로 된 셈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경제적 정치적 안정은 얻을지 몰라도 노예 같이 살게 된다고 했다.“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17).

 

사실 이스라엘은 절대 왕정이 되면 안된다. 하나님이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이 독재하지 못하도록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셨다. 최고의 왕이었던 다윗에게도 간음(혹은 성폭행)하고 살인교사 했을 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다. 또 통치의 효율성을 운운하며 인구조사를 실시하려 할 때는 전염병으로 막으셨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제도 개선 요구보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순종의 자세 회복이 더 시급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반항

백성들의 선택을 하나님은 반항으로 여기셨다(7). 그들이 왕을 세우려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를 불안해하는 것,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보다 인간 왕이 통치해야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건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를 불신앙하고, 하나님을 무능한 늙은이 취급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을 화나시게 한 셈이다.

 

하나님이 무능하시나? 아니다. 전능하시다.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한 걸 깨닫지 못하고 머리를 쓴 게 왕정 제도였다.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여겼지만 실수였다. 믿음이 없어서 차선책으로 왕을 세워 안심하자고 한 것이다.

 

그들의 기대대로 왕이 이스라엘을 잘 보호하나? 다윗왕과 히스기야 등 지극히 일부를 제외한 다른 왕들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하게 했다. 정권 유지를 위해 강대국의 우상들을 끌어들이며 나라 꼴을 다 망쳤다. 왕들은 무기력했다. 번번이 전쟁에 패하고 나라를 패망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왕이 실패할 때마다 진짜 왕이신 하나님을 그리워한다.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갈망한다. 시인의 노래를 보라.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24:7~8).

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생긴 게 메시아 사상이다. 메시아(Messiah), ‘기름 부음 받았다는 뜻의 구원자, 이상적인 왕, 이사야 9:6~7을 보면 메시아를 왕이라고 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인 동시에 왕이시다. 동방박사들도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2:2)라고 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도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붙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우리의 왕이시다(2:9~11).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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