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장 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의 생애를 좌우한다. 생각의 여하, 마음먹기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 수십 년 전 미국 뉴저지주 역에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이 내렸다. 그의 이름은 에드윈 바네스였다. 그는 대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의 파트너가 되길 원했다. 에디슨의 회사를 찾아간 그는 직원에게 자신이 에디슨의 파트너가 되겠다고 했지만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바니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에디슨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갔다. 에디슨은 그가 회사의 청소부와 설비 수리공을 맡도록 허락했다. 바니스는 이 자리에서 몇 년 동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디슨의 제품판매원들이 새로운 발명품을 비웃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바로 구술기록기였다. 사람들은 비서가 기계보다 유용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자 바니스는 일어서서 “제가 해보겠습니다. 저는 팔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청소부에서 판매원으로 변신했다. 한 달 동안 바니스는 뉴욕 전역을 돌아다녔다. 오랜 노력이 마침내 빛을 발했고 그는 7대의 구술기록기를 팔았다. 그리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당신의 진실된 칭찬 한 마디와 격려는 다른 사람의 ‘삶의 보약’이 된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귀한 보배’이다. 린칭쉔은 대만의 유명한 작가이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그는 장난기 많은 학생이었다. 학업 태도와 품행은 늘 선생님들에게 실망과 반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국어 선생이었던 왕위창만 유독 그를 인정해 주었다. 자신이 휴가를 갈 때면 린칭쉔에게 국어를 가르치게 했다. 왕위창은 린칭쉔에게 “국어를 수 십년 가르친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너는 큰 인물이 될 거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의 이 말에 린칭쉔은 감동했다. 그는 분발하여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어느 날 양고기 집을 지나던 린칭쉔에게 낯선 사람이 인사했다. 그는 20년 전 그들이 만났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린칭쉔은 한 신문사 사회부 기자였다. 경찰서에 취재 나간 날, 도둑이 잡혀 들어왔다. 경찰은 “이 도둑이 여러 차례 범행을 저질렀지만 이번에야 검거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그 사명을 회피하지 않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신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공산화의 위험으로부터 막아내고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었던 맥아더 장군은 ‘책임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후에 위대한 인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맥아더는 귀족 가문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공을 세워서 이름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가르쳤기에 늘 강한 승부욕과 야망을 보였다. 평범해 보이는 것을 얕잡아보거나 무시했다. 1923년 젊은 맥아더는 미국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활용해 큰일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병 부대와 광산에서 근무하게 됐고, 이런 무미건조한 일을 맡았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여기에서 어떤 발전 가능성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대부분의 일을 소홀히 처리했다. 이후 그는 1년 동안 필리핀으로 파견됐다가 다시 미국 엔지니어학교로 발령받아 연구를 하게 됐다. 그는 연구가 지루하고 싫었다. 오히려 백악관의 화려한 사교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맥아더는 자신의 커리어와 사명을 완전히 잊고 사교의 즐거움
하나님의 은혜로 아담은 독처하지 않게 됐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하와를 통해 그 말을 옳게 여겨 죄를 지었다. 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하와가 참자기라면 죄를 지은 이후의 자기는 거짓자기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스스로 참이라고 여겼던 거짓자기를 버리는 일이 구원이다. 구원은 자기의 죄(거짓자기)를 인정하고 참자기를 찾는 것이기에 거짓자기를 버리는 것은 곧 참자기를 찾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회개라는 것은 죄 아래 있는 인생이 자신의 죄를 깨달아 원래의 에덴을 회복하는 신앙고백이다. 에덴으로 가는 길은 십자가로만 가능하다. 거짓자기는 교묘히 자기 자신도 속이는 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거짓자기)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지도 않고 달렸다고 여기고 평생을 살기도 한다. 더욱이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갖고 십자가가 빠진 율법에 매여 살며 마치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것처럼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바벨탑을 쌓는다. 이들의 특징은 복음에 율법을 섞는 일이다. 복음으로 거듭났다고 여기고 율법으로 살자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이 땅에서 복 받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신앙을 보면 복음으로 구원받았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미국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어렸을 때 말을 잘하지 못했다. 가끔 말할 때면 항상 어리숙한 모습을 띠었다. 친구들은 그를 뚱딴지라고 놀렸다. 그러나 해리슨은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자 점점 많은 사람이 그를 덜 떨어진 아이라고 여겼다. 집 앞에는 해리슨이 얼마나 멍청한지 보려고 하는 아이들이 자주 찾아오곤 했다. 어느 날 아이 한 명이 5센트와 10센트짜리 동전을 바닥에 놓고 해리슨에게 둘 중 하나만 가지라고 했다. 해리슨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5센트의 동전을 선택했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아이들이 모두 해리슨을 비웃었다. 5센트와 10센트 동전을 구분 못 하는 바보라며 웃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해리슨을 볼 때마다 이런 장난을 치며 비웃었다. 모두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라고 해리슨은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동전을 고르라고 할 때마다 언제나 5센트짜리 동전을 들고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본 해리슨의 어머니는 “5센트와 10센트를 구분하는 법을 일러줄 테니 나중에 그들이 또 너를 놀리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아끼는 것은 곧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기억하라,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로 시간을 중시해야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이치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당장 지금과 오늘을 값지게 살아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시간과 관련한 신이 둘이 있다. 첫째는 제우스의 아버지와도 이름이 같은 크로노스이다. 크로노스라는 신이 관장하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자연적인 시간, 물리적인 시간, 일상적인 시간, 해가 뜨고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고, 2024년이 가고 2025년 새해가 오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생로병사의 시간,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그저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순환되는 시간, 캘린더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그게 다 ‘크로노스’이다. 즉 크로노스라는 신이 관장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가 있다.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 즉 카이로스라는 신이 관장하는 시간이 있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같은 일상적인 시간이 아니고 특별한 시간을 말한다. 의미 있는 시간, 결정적
바울의 종말론의 일관성 바울의 종말론이 그의 사역기간을 통해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즉 바울은 미래의 재림에만 강조점을 두었고, 묵시사상(默示思想)에서부터 성장하여 구원의 현재적인 완성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 강조점을 둔 소위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 견해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는 서신을 통해 볼 때 대조가 된다기 보다는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바울의 초기 서신을 보면 바울은전도설교에서 성도들에게 미래를 환기시켜 주면서(살전 1:10) 유대 묵시사상과 거의 유사한 재림론을 펴는 한편(살전 4:13~5:11, 살후 2:1~12) 믿는자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로 특정지워진 성도의 행위에 대해서도 말했다(갈 2:20). 또한 고린도 교회와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죽음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고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고후 5:1~10) 재림시에 완성될 종말을 강하게 강조하고 (롬 8:8~15, 고전 15:12~58) 주님의 기도문처럼 “주께서 임하옵소서”라고 말했다(고전 16:22). 로마의 옥중서신에서 쓴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안’
성경의 현장에서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무심코 지나칠 수 없다.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 속에 예수님의 형상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언급된 우슬초는 신앙인들에게 익숙한 식물 가운데 하나이다. 히브리어로 ‘에조브’, 아랍어는 ‘자아타르’라고 부르며, 헬라어로 ‘히솝’이라 불리는 것을 우리말로 ‘우슬초’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사실은 ‘우슬초’는 실제와 전혀 다른 오역이다. 한국의 식물사전에서 우슬초를 찾아보면 ‘그 생김새가 마치 소의 무릎처럼 생겼다 하여 우슬초(牛膝草) 또는 쇠무릎 풀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는 성경에 언급된 ‘에조브라’는 식물 자체가 없다. 그러니 ‘우슬초’로 번역해 부르기 보다는 ‘에조브’라고 그대로 써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 우슬초(에조브)라는 실체를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성경을 기록한 그 땅에 거주했던 사람들에게 우슬초(에조브)가 어떤 의미로 인식되고, 또 어떻게 그들의 생각이 식물에 투영돼 성경에 나타났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성경의 주인공들에게 우슬초(에조브)는 ‘겸손’ 또는 ‘비천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이었다. 그 단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는 성경 사건의 배경이 되는 풍습, 자연, 지형, 그리고 식물들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의 자연환경과 매우 다른 지역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로뎀나무’는 그런 것 가운데 대표적인 하나라고 말씀드린 바 있다. 또한 로뎀나무는 성경 현장답사를 하면서 우리를 가장 놀라게 만드는 것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대부분 성도들은 로뎀나무를 느티나무나 소나무처럼 아주 커다란 나무로, 그래서 많은 그늘을 만들어내는 나무로 생각한다. 아마 주일학교에서부터 그렇게 가르치고 배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도서에서 로뎀나무를 느티나무처럼 그려놓은 것을 보고 ‘책을 펴내는 곳에서, 저건 아닌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로뎀나무는 히브리어로 ‘rotem’(영어로 white broom)이라고 불리는데, 묵다, 속박하다를 의미하는 ‘rotena’가 어근이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빗자루를 만들던 싸리나무와 흡사한 모습으로, 1.5~3m까지 자라며, 우기가 끝나갈 무렵인 2~3월에 마치 안개꽃과 같은 흰 꽃을 피우게 된다. 이스라엘에서는 해안지역의 모래 구릉지, 산지, 브엘세바 지역(남방), 그리고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사람은 내면이 강해야 우뚝 설 수 있다. 세계 당구대회에서 1위 자리에 올랐던 자넷 리는 세계 당구스포츠계를 평정했지만 그녀의 지난 삶은 무척 기구했다. 4살 때 종양을 앓았고, 11살 때는 다리의 악성 종기로 고생했다. 12살 때는 척추병으로 서 있을 수 없고 걸을 수도 없었다. 허리를 굽히지 못해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13살 때 의사는 그녀를 위해 등쪽에 금속 받침대를 설치해 줬고, 두 개의 강철봉을 용접해 설 수 있게 도왔다. 그 후 그녀는 어깨 이두박근 근육염과 목 디스크 등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거쳐야 했는데 그때마다 생사를 오가는 힘겨루기를 해야 했다. 자넷 리는 어둠 속에서 묵묵히 활로를 찾았다. 18살이 됐을 때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바꾼 당구를 만나게 됐다. 승부욕이 강했던 자넷 리는 아주 빠르게 이 운동에 빠져들었다. 매일 10시간 넘게 연습했다. 가장 완벽한 드라이버 핸들을 잡기 위해 그녀는 매일 밤 잠자기 전 플라스틱 테이프로 자신의 손을 표준 자세로 고정시켰다. 기상과 목욕 시간에도 예외가 없었다. 맹훈련은 그녀의 운명을 성공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