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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목회, 비전은 분명 있습니다”

회성교회 김창수 목사

 

김창수 목사가 회성교회에 부임한 것은 2014년 1월이다. 그가 부임하기 2년 전에 건축된 교회는 마치 방주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주변의 논밭을 바다 삼아 항해하는 듯한 느낌을 풍겨왔다. 교회에 들어서자 밭일을 하고 있던 김창수 목사가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땀 흘리지 않고는 목회가 쉽지 않은 시골교회이니만큼 김 목사 또한 베테랑 농촌교회 목회자의 풍모를 선보였다.


그는 처음 회성교회에 부임했을 당시 적응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회성교회에 오기 전 김 목사가 했던 장애인 사역 또한 쉽지 않은 일이건만 농어촌 교회만이 가진 특색으로 인해 기존과는 전혀 다른 목회를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교인들도 내가 하는 목회의 여러 부분들이 안 맞았던 것도 있고 때로는 갈등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부분들을 교인들과 맞춰가면서 지금까지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삶으로 교회의 문턱을 낮추다 
김 목사는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일부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방문하는 사랑방과도 같은 교회를 꿈꾼 것이다. 교회에 복음을 들으러 오지 않더라도 이 지역 가운데서 교회가 하나의 소통의 장이 되고 관계성을 형성하는 그런 공간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것이 목표였다. 특히 거주민의 평균연령이 60~70세인 지역의 특성상 현재 48세인 김 목사가 무작정 위에서 가르치려드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먼저 ‘생수 사역’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기로 했다. 농촌의 경우 보통 새벽 4~5시에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그렇게 한참을 일하다 보면 아침에 떠온 물이 미지근하다못해 뜨거워지는 일이 다반사이다. 
김 목사는 지역주민들을 위해 냉동창고를 지어 생수를 얼려 논밭에서 일하는 주민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편한 복장에 자전거를 타고 주민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희노애락을 나누는 것, 그것이 교회 문턱 낮추기의 시작이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기에 앞서 힘든 일은 무엇인지, 자녀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올해 농사는 어떠한지를 물으며 주민들과의 만남을 지속했다. 그렇게 오랜 관계를 맺은 후에야 “예수님 한번 믿어보시죠”라며 전도를 시작했다. 


김 목사는 스스로도 이러한 접근방식이 제대로 먹힐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의 모교회인 삼광교회 김범일 목사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교회가 지역사회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은 물론 꼭 필요한 존재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신앙훈련으로 무장된 김 목사는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감당해 나아갔다. 

 

 

함께 웃고 함께 울라
농어촌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에게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생존일 것이다. 교회에서 받을 수 있는 사례비는 극히 제한적이라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해결하는 목회자도 적지 않다. 김 목사는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에 의존하지 말고 직접 농업에 뛰어들 것을 결심했다. 이는 생계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아픔을 알려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김 목사는 농촌 지역 사람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어떠한 것들이 그들에게 필요한지를 몸으로 체득하며 그들을 이해해나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젊은 김 목사에게 지역주민들도 점차 의지하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정보력은 물론이고 농기계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는 일에도 비교적 수월했기에 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주민들이 아픔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주민들은 마음의 문을 점차 열었고 그렇게 교회의 문턱은 점차 낮아져 갔다.


농어촌 교회의 또 다른 고민 가운데 하나는 계속되는 이촌향도와 고령화로 인해 늘어가는 장례일 것이다. 회성교회도 이러한 고민에 항상 직면해왔다. 젊은 세대들은 자녀교육이나 직장 때문에 이사를 떠나고 김 목사가 부임한 첫해만 해도 장례를 6차례나 경험했다. 하지만 장례를 통해서도 주님의 역사하심은 쉬지 않았다. 장례식을 통해서도 전도가 일어났던 것이다. 김 목사가 장례예배를 집도했던 가정에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고 훗날 집사 안수를 받는 사람도 나타났다. 

 

“내게 목회 비전이 무엇이냐 묻는 분들이 계시지만 사실 어떤 목회를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목회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 같은 죄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내고 살아내게 하는 것 그것이 저의 비전이고 사명인 것 같습니다. 교회와 목회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금과 빛이라고 하는 개념을 단순히 복음적인 방향에서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증명해 나가는 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합니다.”

 

 

김장으로 펼쳐진 주님의 사랑
회성교회에서 유명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김장 사역이다. 조그마한 시골 교회에서 김장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은 금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더니 기독교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오며 아름다운 미담으로 지역 내에 자리 잡고 있다. 


회성교회의 김장 사역은 한 권사의 잘못된 계산에서 시작됐다. 김장을 해서 판매를 해야 하는데 그만 김치가 남아버린 것이다. 


이에 권사는 김 목사에게 김치 한 박스를 주며 계산을 잘못해서 김치가 남았다며 가져가라고 했다. 마침 그 해는 김 목사가 가는 곳마다 이곳 저곳에서 김치 한 박스씩을 줬기에 김치 냉장고가 차고 넘쳐 김장을 안해도 될 정도로 김치 풍년인 상황이었다. 김 목사는 그 권사가 한 해 동안 얼마나 땀을 흘리고 수고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권사를 도울 수 있을까라고 고민했다. 그러다 대학 은사에게 김치를 받은 이야기를 했다. 그 교수는 “김 목사는 참 복이 많네. 도시는 김장을 못 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은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김 목사는 또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음 날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누가 김치가 필요한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6가정이 김치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고, 김 목사는 계산을 잘못해서 김치가 많이 남아버린 권사의 가정에서 김치를 사비로 구입해 6가정에 보냈다. 


한 권사의 잘못 계산된 김장에 하나님께서 회성교회에 귀한 선교의 비전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6박스의 김치는 또 다른 사역의 시작이 됐다.


이 일을 경험한 후 김 목사는 자신의 신앙 스승인 김범일 목사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을 고난이나 고통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일을 할 때마다 축복이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말이다. 새벽기도 내내 이 말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던 김 목사는 교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복 받을 짓을 한 번 해봅시다”라고 도전했다. 김 목사는 이 당시를 회상하며 우리도 미자립 교회라서 힘든데도 교인들이 내가 하자고 하니 “목사님이 하자고 하면 해야죠”라며 나서는 모습에 너무 감사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시작된 김장 사역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첫 해 2000여 포기의 김장을 해야 했다. 처음 해보는 것이라 여러 가지 재료가 준비되지 않았고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데 그 부족함에서 회성교회의 김장 사역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임을 경험하게 되는 여러 간증 거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절인 배추를 씻는데,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새로 전도를 받아 나온 교인을 통해 지역 소방서에서 소방차에 급수를 실어 교회 김장에 사용한 해도 있었다. 이밖에도 너무나 많은 간증 거리가 생기면서 이 사역이 하나님께서 부족한 종에게 원하시는 사역임을, 그리고 그 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고백할 수 있었다.


농어촌에서의 김장은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한 집이 김장을 할 때 자그마치 3일이 걸리는 대공사나 다름없는 일이다. 때문에 김장 품앗이는 농어촌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연례행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김 목사는 농촌의 품앗이 문화를 기억하고 김장 품앗이에 주목했다. 김 목사가 이집 저집에 김장을 도와주고 교회 김장은 맨 마지막에 하며 모두를 초청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지 않는 주민들도 교회에 오도록 문턱을 낮추는 결과를 낳았고 식사 대접 등 여러 방면에서 그들을 섬겼다. 특별히 김 목사는 교회 김장을 수요일에 맞춰 행하며 자연스럽게 지역 주민들이 수요예배에 함께 할 수 있도록 했다. 


회성교회의 김장 사역은 지역주민들이 교회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돕는 한편 사정이 어려워 김장을 할 수 없는 목회자 가정을 돕는 일석이조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회성교회의 김장 사역에 함께하기 위해 얼굴도장이라도 찍어야 한다며 허리 수술을 미룬 지역주민도 있을 정도로 이 행사는 지역에서 인기가 만점이다. 이렇게 시작한 회성교회의 김장 사역은 첫해 10박스에서 지난해는 교회와 선교사까지 합해 70여 곳에 김치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김치 한 박스에 25㎏정도이니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젊은 목회자들이여 이곳으로 오라
김 목사는 농어촌 교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통해 지금 돌아보니 전도가 됐고 또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해나가시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도 함께 김장을 하며 필요한 만큼 담아가고 가능하다면 총회장님과 교단을 대표하고 침례교의 영적 거장들을 모시고 목회와 삶에 힘든 미자립 교회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에게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함께 드리는 일들을 꿈꾸며 기도하고 있다.


김 목사는 농어촌 교회가 힘든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만큼 농어촌 교회도 좋다고 자신했다. 발상을 바꾸면 이곳에서의 목회가 마냥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재정적인 부분, 자녀 교육적인 부분 모두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라는 어찌보면 좀 무식해보일 수도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면 그 믿음이 아무리 무모해보일지라도 가정을 살려낸다는 것을 자신의 체험담과 함께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젊은 목회자들이나 목사 지망생들에게 농촌으로 갈 것을 강권했다. 

 

“시골은 분명 비전이 있습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다 떠났지만 그들이 다시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버텨야 합니다. 그러니 농촌이 어렵다고만 말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젊은 목회자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김제=범영수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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