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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영 목사와 함께하는 창세기 여행 14
유수영 목사 제주함께하는교회

창세기는 인류 첫 가정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농사를 짓고 아벨이 양을 치는 동안 아담과 하와는 무슨 일을 했는지, 이들 외에 다른 자녀가 또 있었는지, 고정적인 날을 정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지(혹은 창 4:3~5의 예배가 처음 드린 예배인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이 거의 없습니다. 아쉽지만 성경이 이야기해 주는 내용을 읽으며 상상을 보탤 수밖에 없죠. 


첫 아이 가인은 자연스럽게 아버지 아담이 해 오던 농사를 거들었을 겁니다. 식구가 늘면서 식량도 많이 필요해졌을 텐데, 더 많은 수확을 위해서는 당연히 일꾼이 더 필요하죠. 아벨은 양을 치는 일을 했습니다. 농사와 목축 모두 처음 가정에 꼭 필요했겠지만, 중요성에 있어서 목축이 농사를 따라가긴 어려웠을 겁니다. 인류가 하나님 계명을 준수했다면 노아 홍수 이전에는 고기를 먹지 않았을 테니까요. 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래도 양의 쓰임은 많았을 겁니다. 털을 얻거나 젖을 짜고,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 수도 있었겠죠. 그래도 생존에 필수적인 양식을 위해 일하는 가인이 아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게다가 아버지 아담과 훨씬 더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가업을 이어받고 있는 셈이었으니 당연히 더 많은 권위가 주어지고 자부심도 있었겠죠. 그런데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과정에서 이런 자부심이 무너지고 맙니다. 가인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을 겁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5)


두 사람 예물 가운데 아벨이 드린 예물만 하나님께서 받으셨는데요, 창세기 저자는 이것을 예물만의 문제가 아니라 예물 드린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가인 생각도 같았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은 충격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거절당한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아담에게 수없이 들었을 것이고,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해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던 아담의 발자취를 똑같이 밟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둘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제물을 드렸다는 점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가령 두 아이가 있는데, 한 명이 노래를 잘 부르고 다른 한 명이 그림을 잘 그린다면 둘 중 누가 낫다고 해야 할까요? 우열을 따질 수 없으니 각자를 따로 칭찬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노래 잘 부르는 아이만 훌륭하다고 추켜세우면 어떻게 될까요? 두 가지 면에서 그림 그리는 아이는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제껏 그려 온 그림이 노래만큼 가치가 없다는 열등감에 빠지거나 자기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을 느끼게 되겠죠. 가인이 느낀 감정이 꼭 그랬을 겁니다. 오랜 시간 아담과 함께 땀 흘리며 쌓아 온 자기 인생이 단숨에 무너지는 기분이었겠죠. 그 자리에서 얼굴빛이 확 변할 만큼 가인은 크게 화났습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화를 냅니다. 무언가를 빼앗겨서, 이루고자 하는 일에 실패해서, 다른 사람 말과 행동이 못마땅해서 화가 납니다. 사람이 내는 화의 수를 다 헤아려 본다면 아마도 전 세계 인류만큼 많은 수의 노여움이 있겠죠. 세상에 있는 모든 화를 포괄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내가 무시당해서’일 겁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사람이 화내는 까닭이 저마다 달라도 그 동기는 거의 같습니다.


내 소유, 내 생각, 내 목표, 내 감정, 내 상황이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누구라도 화가 납니다. 지금 가인 마음이 딱 그렇죠. 그리고 그의 분노는 정확하게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은 존재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가인이 화내는 진짜 상대는 아벨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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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유산을 넘어 다시 희망의 깃발을 듭시다!
존경하는 침례교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전국의 3500여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저는 교단의 내일을 가늠할 중요한 길목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게 미래를 열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30년 전 우리 선배들이 눈물로 심었던 그 거룩한 씨앗을 기억해야 합니다. 30년 전, 우리에게는 ‘거룩한 야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3000교회 100만 성도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외쳤던 구호는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침례교회가 한국 교회의 희망이 되겠다”는 당찬 선언이었으며, 복음의 능력으로 시대를 돌파하겠다는 영적 결기였습니다. 그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 교단은 한국 교회사에 부흥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열정의 거룩한 불씨는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104차 총회에서 ‘부흥협력단’이라는 아름다운 동역의 저력을 통해, 개교회주의를 넘어 ‘함께하는 부흥 목회’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며 우리는 ‘상생’이라는 침례교만의 독특한 저력을 확인했습니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