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예술가가 전하는 말이 내 가슴에 찡하게 와 닿았다. 그것은 “예술가는 직업이 없다”는 것이었다. 예술을 직업으로 삼는다고 일반인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거리가 아주 먼 고백이었다. 직업이 없다는 그 예술가의 뒷얘기를 들어보니 과연 그들에겐 직업이 없다는 말이 이해되었다. 예술은 예(藝) 자체를 사랑하는 행위다. 예술가는 예술을 팔자고 출산(出産)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무용이든 간에 그 자체들을 사랑해서 이것 끝나고 나면 누가 돈 주겠거니 하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화가 이중섭 화가인들 그렇지 않았겠나. 그가 죽은 뒤, 그의 그림값이 나간 것은 화가와는 별 문제였었다. 순수한 예술정신! 그것을 사랑해서 그것을 하다보니 밥도 옷도 생긴 것이다. 그것이 직업으로 보인 것은 순전히 사람들의 부산물적 착각이다. 적어도 예술가의 철학은 그렇지 않은가 싶어 주제 넘게 내가 정리해 주는지도 모른다. 가령 산 속 숲에서 날아가는 백조가 아름다워 자기를 잊은 채 즐기고 있는 감미자(甘味者)에게 어떤 장난꾸러기가 찾아와서 백조가 날아가는 횟수를 잘 헤아려 보라 하고 그것을 한 번 볼 때마다 돈을 10만원 지불하겠다 했더니 이 감미자는 한
“이 사건 공소사실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되므로, 형사소송법 제 325조 후단에 의하여 피고인들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하고, 형사소송법 제 440조 본문에 의하여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서울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판결서 낭독에 이어서 “이 무죄 사실을 언론에 알리기를 원합니까?”의 질문에 대답은 “예, 40년 전 일이지만 이제라도 알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0분도 안되어 재판은 끝났다. 투옥시켜 재판받을 때와 비하면 정말 아쉬움을 남긴 시간이었다. 40년 전 긴급조치하에서 다 기록할 수 없는 사연은 두 번의 중정압송과 극심한 조사 후 검사의 심문을 거쳐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고 8개월간 2차에 걸쳐 고법에서 결심공판 끝에 부장판사는 집행유예선고 후 최후진술을 물었다. “본인은 문 닫으려는 세 교회를 찾아가 고생하며 목회하느라 이제 와서 생각하니 친족들에게 전도 못한 죄가 통렬하게 느껴집니다!”고 대답했다. “옥중에 갇혔을 때에”(마25:36) 속죄를 위해 친족과 수감자들 200여명에게 최선으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전도에 힘썼다. 세상 재판관 앞에서 최후 진술한 것처럼, 언젠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침례교단 문인들의 문예지 목산문학지에 계인철 동역자가 부탁하기에 아래와 같은 에세이 두 편을 보냈다. 한 편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몇 일 뒤에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집행을 당할 그리스도인 사형수가 살날은 불과 이삼일 밖에 없는지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해 놓고 갈 일이 무엔가 생각했었는데. 도무지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형수 수감 독방에서 무엇을 하겠는가? 봉사하고 싶어도 봉사 받을 자도 없고. 그는 마침내 험하게 쓰던 자기 수감방을 깨끗이 하자고 생각한 뒤 바닥과 벽을 천정을 마르고 닳도록 닦고 문질러 광채가 나는 방으로 만들어 놓은 뒤 전기의자에서 마지막을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한편 에세이의 내용은 또 이런 것이었다. 나의 어머님은 촌노였고 일자 수식하되 귀로만 들은 예수천당 신앙으로 살다가 가셨던 모친인데, 교회마루바닥에 뒹구는 폐지처럼 된 낡은 성경책을 그냥 두고 보기에 민망해서 집으로 가져와서 어떻게 이 성경책을 대우할까 생각 끝에 묘안이 떠올랐지 뭐야?! 어머님은 그리스도 가정인 내 집에도 귀신 쫓아낼 양으로 성격책장을 한 장씩 찢어서 벽에도 붙이고 대문에도 붙였던 것. 왜냐하면 성경에 예수 이
오스본 목사는 미국 오클라호마 주 포카세트 근방 농장에서 태어났다. 13형제 중 7번째 아들로 태어나 농장에서 자라면서 시골학교에 다녔다. 12살 때 형은 몇 일전 그가 먼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나를 데리고 믿음의천막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데리고 갔다. 찬양할 때 피아노를 쳐 달라는 부탁에 기꺼이 승낙했고 복음전도자의 초청시간에 나는 즐겁게 회개했다. 그날 이후 나는 비록 농장에서 일하다가 늦게라도 예배에 참석했지만 어떤 땐 예배에 불참했기에 여러 번 울었다. 영적 갈망 가운데 오래된 대리석 바위에 엎드려 기도할 때 나는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한 없이 울었고 그 때 주님의 복음을 위한 부르심을 느꼈다. 15살 때 부흥사를 따라 천막집회를 도왔다. 이제껏 농장에서 일해 온 것보다 훨씬 넓고 큰 책임과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고향과 부모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두 해 반을 부흥사를 따라 다니다가 드디어 캘리포니아 로스 바노스 집회에서 데이지 아가씨(Daizy)를 만났고 이듬해 18살이 되던 해에 결혼했다. 1944년 봄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드디어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듬해 아들이 태어난 후 교회를 사임하고 인도 선교사로 갔으나 기후와
휴식이란 무엇인가? 병을 고치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휴식(rest)이 필요하다. ‘휴식’이란 가장 오해하기 쉬운 단어이다. 휴식이라면 흔히 술이나, 커피, 홍차, 소다수와 같은 자극성 음료를 마시며 앉아 있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휴식이란 그런 의미의 휴식이 아니라 모든 활동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움과 고요함 속에서 쉬는 휴양을 말한다. 휴식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평화이며,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자아의 원기를 회복시키는 것을 뜻한다. 휴식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다시 신선해지는 것이다. 휴식(rest)이란 단순히 다리를 포개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자세로 앉아 있으면 발에 피를 공급하는 동맥에 많은 영향을 주어 혈액의 순환을 약화시키게 된다. 다리를 포개고 앉으면 심장에도 부담을 주므로 두 발바닥이 바닥에 닿도록 해야 한다. 면역학적으로 휴식한다는 것은 전신에 피의 순환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구두나, 내의나, 벨트나, 스타킹 같은 것을 죄어 입고 있다면, 앉아 있던 누워있던 그것은 휴식이 아니다. 최선의 휴식을 위해선 벗어야 한다. 만약 옷을 입어야 한다면 느슨하게 입어야 한다. 종종 사람들은 “나는 쉬어야만 한
“형, 강도야!” 옆에 한 이불 속에 잠자던 아래 동생 명도가 두렵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얼떨결에 들으니 부엌에서 “바스락, 땡그랑”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한 나머지 가만히 소리를 들으니 부엌을 뒤져서 무엇을 먹는 것 같았다. 약간 안심을 한 나는 불을 켜고 문을 열고 나가니 강도가 아니라 남루하게 옷을 입은 거지가 발견되었다. 그 때는 대학시절에 남녀동생들과 함께 얼마동안 자취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초가지붕 전세집이 홍도동 언덕 위에 외따로 있었으니 거지가 지나가다 찾아온 것이었다. 한 밤중에 남의 집 부엌에서 밥 뒤지는 것이 어쩐지 불쌍한 생각이 들어 저녁 먹고 남은 밥과 반찬을 갖고 그를 데리고 들어와 이왕이면 추운 날씨라서 방안에서 먹게 했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허겁지겁 다 먹어치웠다. 나는 그에게 이왕 들어왔으니 이불에 들어와 잠자고 가라고 했는데, 동생들은 나의 하는 처사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큰 이불이라 우리 셋이 늘 같이 덮고 잤는데, 그 날 저녁은 우리가 잠든 후 그가 이불 속으로 내 옆에 끼어 들어와 함께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시간 전에 얼굴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
그렇게도 잘 들리던 우측 귀가 먹통이 되었다. 하나님이 두 귀를 주신 이유는 한귀가 사고 났을 때 비상용으로 두신 것이었다. 콧구멍이 두개인 것도 감기가 걸려 코가 막힐 때 한 콧구멍만 막히고 다른 콧구멍으로 숨을 쉬라는 하나님의 인체조직에 관련된 섭리이다. 두 눈이 있는 이유도 그렇고 양팔 양다리가 있는 이유도 그렇다. 하여튼 내 경우에는 우측귀가 먹통이 되어 좌측 귀로 듣긴 하는데 아무래도 두 귀로 듣는 것만 못하다. 결국엔 나머지 한 귀도 못쓰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노인의 귀가 어두워지는가 그 이유는 알고 보니 무슨 대오(大悟)나 한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아래와 같이 시로 썼다 : 제목 : 노인이 귀 어두운 이유 노인이 귀 어두운 이유는 세상소리 이제 그만 들으라한 것. 보청기는 왜 달고 있느냐 무슨 소리 더 들을려고. 세상소리 듣고자 하거든 관세음(觀世音)하라. 소리는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하늘 귀 돋우어 하늘소리 들어 보게나. 사람 사노라면 물리치기 보다는 차라리 받아들임이 더 평안할 때가 많다. 공격보다는 방어자세가 더 전략적일 때가 많다. 공격이나 방어나 간에 다 전투에 필요한 양면이지만 살다보면 “아니요, 싫소”보다는 “예, 좋
“십자가로!”(Ⅱ) “한 전도사, 내 배 두들겨봐!”해서 다가가서 두드려보니 “통통 둥둥”소리가 났다. “한 전도사가 나에게 시킨대로 오늘 문막교회 가서 설교하고 저녁은 국수(냉면)를 주는 대로 세 그릇 다 먹었더니 배가 너무 불러서…” 언젠가 훌륭한 선교사가 되려면 한국인 영혼을 사랑하고 한국말 잘 배우고 음식도 주는 대로 잘 먹어 한국 문화에 적응해야 된다고 충고했었다. 나는 그가 십자가를 지는 모습에 눈여겨 보았는데 과연 일동 선교사가 되셨다. 군대시절 원주군인 복지센터에 근무할 때, 하다윗(David Howle) 선교사는 농담으로 목사님을 “목사놈”이라 부르곤 했다. 혹시 나를 만날 때나 김학준, 심영근 전도사를 만날 때 “한 전도사놈, 김 전도사놈, 심 전도사놈”이라 해서 처음에는 ‘선교사치고 교양 없이 잘못 배웠다’고 생각했으나 그 후는 ‘그러려니’하고 웃었다. 그가 선교사로 나와 연세대에서 한국어를 2년간 배울 때 말이 서툴고 발음이 잘못 나와서 목사님을 “목사놈, 목사놈” 이라 해서 큰 실언을 했었는데 농담으로 가끔 “전도사놈”이라 했으나 전도사놈의 “놈”이 안되어야겠다는 경종의 말로 나는 이해하고 받았다. 주일 학교 때부터 그 교회 다닌 소위
어렵고 배고픈 가난한 장곡교회에 부임하셔서 철없는 저희들을 위해 섬기셨던 목사님. 목사님 사택에 양식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 먹어 치워도 한번도 “없다”소리 안하시고, 목사님은 드시지 않고 “나는 금식중이다.”하시면서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제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 서울로 떠날 때 목사님의 자상한 보살핌은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서울 갈 차비는 있는지 목사님도 없는 형편에 챙겨 주시고, “침례는 받고 가야한다”하시면서 자신은 전도사라 집례 할 수 없기에 이웃교회로 함께 가서 어린 나를 위해 찬송 불러주시고 꼭 안아주시면서 기도해 주신 말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딜 가든지, 아무리 어려워도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는 꼭 해야 한다”고 당부하시던 그 소리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떠나시다니요. 안정되고 성장한 장곡교회를 떠날 때 모든 교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 어려운 개척 교회를 세우기 위해 대천으로 떠나셨던 목사님. 한 사람, 한 사람, 눈물겨운 수고와 땀을 통해 이렇게 아름답고 큰 교회를 세우시고 욕심도 없이 깨끗하게 후임자에게 위임하시고 어려운 농아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나의 집 구리시 교문중학교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뻗혀있는 가로 벽에 두어 사람이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몇 년 전 가로 벽에 페인트칠한 것이 비바람에 바래어져서 희미해진 몰골이 보기가 미웠던 차에 구리시에서 손을 보기 시작해서 페인트칠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색 바랜 가로 벽에 페인트칠을 해나간 뒤를 보니 아름다웠고 마음이 시원하기도 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청년 두어 사람이 큰 붓을 페인트 통에 덤벙 적시었다가 꺼내어 벽에 다가 척척 바르는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청년, 그대는 페인터(painter)요”라고 내가 던지니 말에 청년은 힐끗 나를 보긴 했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말했다. “청년은 화가요”라고 알아 듣게 말했다. 그제야 청년은 화가는 무슨 화가라고요, 그냥 페인트공인 데요 라고 자기 신분을 소개해 왔다. 나는 또 작업하고 있는 그에게 노인다운 설명을 했다. 화가는 영어로 painter, 즉 페인트칠 하는 사람이고. 당신은 페인트공이 아니라 화가라고 일러주었다. 그래도 그 청년은 화가는 따로 있고 자기는 그냥 벽에다가 페인트칠만하는 작업인이라고만 했다. 자기는 일당을 받고 고용된 페인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