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에세이 표제를 통조림 설교와 자연산 설교로 택한 것은 조선일보 조용헌 씨의 살롱(996, 조선일보 2015.6.29자 신문)의 표제에서 얻어 온 것이다. 조용헌 씨는 칼럼을 쓸 때에 기존자료에 있는 내용을 해석한 칼럼은 통조림이라 하면서 이것은 깡통에 들어있는 자료를 이용해서 쉽게 쓴 것이니까 값이 싸다고 하고,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서 그물로 직접고기를 잡아서 요리로 하는 것은 자연산이라 하면서 이것은 자기가 직접 채취한 것이고 또 흔하지 않기 때문에 꽤나 비싼 값이라고 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칼럼도 그런 의미에서는 통조림 칼럼일지도 모른다. 남의 설교집과 남의 예화집을 보고 설교를 작성하는 목회자의 설교는 재론의 여지없이 통조림설교자이다. 통조림은 자기가 노력해서 취득한 것이 아니라 상점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어서 그것을 끌어내어 온갖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맛이 덜하다. 무슨 요리를 만들었든 통조림의 냄새가 풍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요사이 흔히 설교도 예화도 일체 컴퓨터에 다운을 받아서 그대로 강단에 올라가 외치는 자도 있다고 하는데 설마 그럴까하고 믿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참 목회자는 남의 설교나 예
70세가 되자 고려장을 위해 늙으신 어머니를 지게 위에 방석을 깔고 앉히셨다. 아들의 지게위에 앉은 노모는 산속 숲길이라 행여나 아들이 하산할 때 길을 잃을까 염려되어 손에 닿는 대로 나뭇가지를 짤라 길바닥에 계속 던졌다. 고려장으로 죽으러 가는 노모는 끝까지 모성애를 발휘했다. 만들어 놓은 움막 앞에 지게를 내리고 어머니를 안으로 잘 모셨다. 그 자식을 키울 때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입고 싶은 것 안 입고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고생 고생하면서 온갖 정성으로 키운 아들과 이별자리에서 한없이 눈물을 닦았고 아들도 산속에 어머니를 버리고 가는 애처로운 마음에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었다. 자식에게 버림받은 노모는 “얘야 내려갈 때 제발 길을 잃지 않게 내가 올라올 때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던져두었으니 행여나 길을 잃으면 나뭇가지를 보고 길을 찾아 잘 내려가거라!” 아들은 어머니께 몇 번 절을 하며 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사죄하고 내려오는데 뒤 따라온 아들이 아버지가 집어 던지고 간 지게를 지고 쫓아왔다. 아버지는 “내가 버리고 간 지게를 네가 왜 갖고 오느냐? 꼴 보기도 싫은 지게, 어서 벗어 던져라!” 그때 아들은 “언젠가 아버지도 고려장으로 산속에 모실 때
소금의 과다 섭취가 고혈압을 유발한다고? 그 반대이다. 고혈압 환자의 80%는 가벼운 고혈압에서 중급 정도의 고혈압으로, 순수소금(pure salt)과 순수물(pure water)을 한 달만 마시면 낫는다. 우리는 진정 매트릭스(Matrix)의 세계에 살고 있다. 소금과 고혈압의 진실을 추적해보자. 뉴욕 코넬 의과대학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의 공동 연구에서는 한 그룹의 고혈압 환자군에게는 소금을 적게 먹이고, 한 그룹의 고혈압 환자군에는 소금을 많이 먹였다. 그 결과 소금을 적게 먹인 환자군에서 소금을 많이 먹인 환자군에 비해 심장마비가 일어날 위험이 4배나 높게 나타났다. 1998년 3월 마이클 올드만 교수가 11,346명을 상대로 한 연구에 의하면 소금을 적당히 먹는 경우가 소금을 피하는 경우보다 심장마비를 크게 줄일 수 있음이 확인됐다며 “저염식은 오히려 고혈압 환자에게 위험하기 때문에 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소금을 줄이라는 권장사항을 빨리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일일 염분 섭취량을 1,000밀리그램씩 증가시키면 고혈압 등의 질병의 원인으로 한 사망률을 10퍼센트씩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영국 엑서터 대학의 연구진들이 6,4
오래 애용하던 성경책이 너무 낡아지거나 취급부주의로 망가져서 영 볼품없이 되어 버린 마치 폐지처럼 되었을 때, 이 성경책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이따금씩 받을 때가 있다. 이런 난처한 듯한 질문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구 다룰 수 없지 않느냐는 경건심에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 대답도 안하고 있는 나를 향해 소각 처리하는 것이 차라리 성경책에 대한 예우가 아니냐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자 하기도 한다. 성경책도 오래 지나다보면 형편없이 되어 버릴 때도 있는데 혹자는 그럴수록 그것을 가보(家寶)로 여겨 대물림하려고도 한다. 갈기갈기 찢어진 성경책에 대한 이런 처리곤란을 지금은 고인이 되신 나의 90세 노모님께서 생전에 지혜롭고도(?) 경건하며(?) 신앙적으로(?) 해결하시던 현장을 나는 목격했었다. 마침 어머님 곁에 정말 폐지 처리장에 넣어야할 만큼 너덜너덜 갈기갈기 여기저기 찢기고 떨어져나간 못쓰게 된 성경책이 있었다. 많은 손자들 등살에 성경책이 수난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님은 성경책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곧 능력이라는 등식(等式)의 신앙을 갖고 계셨다. 무식한 유식(有識)신앙의 소
1. 우리도 주님께 드려야 한다. 한 농부의 젖소가 쌍둥이 송아지를 낳았다. 한 마리는 갈색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흰색이었다. 농부는 너무 기뻐서 아내의 손을 잡으며 “여보,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축복하셔서 두 마리의 송아지를 주셨소. 우리가 다 갖지 말고 한 마리는 잘 키워서 하나님께 드립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내는 “두 마리 중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소”라고 물었지만 남편은 나중에 결정하자며 미뤄 두었다. 1년의 세월이 흘러서 그중 한 마리가 그만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농부는 풀이 죽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어떡하지! 하나님의 송아지가 그만 죽고 말았어!” 여기서 왜 죽어버린 송아지가 하나님의 것이어야 할까? 어쩌면 우리도 이 농부와 같이 산 송아지는 우리가 취하고 죽은 송아지를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것은 아닌지요? 좋은 것은 우리가 취하고 못한 것으로 하나님께나 다른 사람에게 드리지 않는지요! 주는 자가 복이 있다면 우리도 최우선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자연으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예수님으로부터 구속의 은총을 그냥 받았으니 우리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율
전혀 오염되지 않고 소식(小食)만으로도 고 영양을 섭취하면서 암, 당뇨, 비만 등 각종 불·난치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식품! 이것이 바로 현대인이 찾는 이상적인 먹을거리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먹을거리에 대한 말씀이 분명히 나와 있다. 현대의학으로 해결되지 않는 질병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회복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생식’이다(창1:29). ‘생식(生食)’이란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먹는다’는 뜻이다. 열을 가하거나 인공 첨가물을 넣지 않고 일체의 가공이 없는 순수한 상태의 자연식 자체를 먹는 행위를 말한다. 대표적인 생식인 대체식(alternative)은 식품의 생명력을 최대한 지니고 있으며 몸의 자연 치유력(Homeostasis)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하우(knowhow) 에너지가 들어 있다. 대체식은 최고의 생명식이다. 생명력이 부족한 식품을 주로 먹게 되면 인간의 장기는 피곤함을 느끼게 되고 원기도 부족해져 허약체질이 되기 쉽다.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에 아무리 영양을 강화해도 이것은 생명력이 없는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 인체의 세포까지 생명력을 보내줄 수는 없다. 대체식(alternative)은 장기의 기능을 빠르게
6·25전쟁이 3년을 끌고 마침 휴전이 된 1950년도 중후반 시절, 나는 그때 중학생시절을 보냈다. 극심한 가난과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다. 나의 용궁침례교 모교회만 해도 3개월간 인민군의 임시 지휘소로 징용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3년 전쟁을 치르고 휴전이 된 그땐 목회자가 귀했다. 한 목회자님이 두 교회를 담임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목회자님이 오전엔 이곳 교회에서 예배인도하고, 오후에는 저곳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그때 교통수단은 자전거가 유일했다. 만약 비라도 와서 강물이 넘치면 교량이 없는 시절이라 목회자는 한곳 예배만 인도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모교회만 해도 목회자님이 못 올 때가 많았다. 그때 목회자님이라 해도 학문을 겸비한 것이 아니라 일찍 예수를 믿고 오직 성경과 믿음 그리고 사명 하나로 원시목회를 했었다. 그나마 목회자님이 못 오실 경우 대체 안은 무엇인가? 전화도 없는 시절이라 오고 못 오고 간에 통소식이 없다. 예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목화지가 저곳에서 이곳에 도착 안하면 그냥 못 오시는 가 보다 하고 그때 나이 드신 집사님이 날 보고 “혁봉아, 네가 오늘 말씀증참(證參)해라” 하신다. 즉 설교하라는 것인데 그땐 설교를 말씀증참이라고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해방이 되고 요사이는 ‘야소교’라는 서양종교가 극성을 부린다고 하는데 너희들 지붕 모서리나 종각대 꼭대기에 십자가 막대기 달아놓은 교회당에 가지말라!”고 배 선생은 성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배 선생은 지금 명선교회 배성태 목사의 할아버지로 생각된다. 듣고 있던 국민학생들은 소곤소곤 거렸는데 누군가가 예배당에 나가는 학생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부친의 가르침 따라 공자를 제일 높은 분으로 믿었다가 어머니를 따라 절간에 가서 큰 부처상외에 칠성단에까지 28번의 절을 하고 절에 팔린 불자가 됐다고 으스대는 때였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친구들이 여기에 예수쟁이가 있으니 그냥 둘 수 없다고 나뭇가지를 찍어서 두들겨 패니 박만규 학생은 산 숲으로 뛰어올라 사라졌다. 그런데 그 때 처음으로 야소교와 “십자가 나무 막대기”란 말을 들었고 그 후 다른 동리를 지나다 보면 나무 막대기 십자가를 달아놓은 집을 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10세쯤 되었을 때까지 공부에 취미를 못 붙이고 있었다. 여름에는 수영과 다이빙, 우럭잡이, 봄과 가을에는 산에 올라 과
내가 부자교회라 함은 재정이 넉넉한 교회를 이름하고 가난한 교회란 그렇지 못한 교회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 부자교회는 자본주의적 교회이고 가난한 교회는 자본주의 바람을 못타고 뒤쳐진 교회라는 설명을 덧붙여 본다.내가 굳이 이런 구분을 하는 이유는 두 종류의 교회의 목사의 설교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르냐고?부자교회 자본주의적 투자 많은 교회의 설교는 화려하고 풍요로운데 비해 가난한 교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부자교회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저 목사님이 어쩌면 저렇게 유식한 지성인일까 하는 생각이 들고, 가난한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어쩌면 저렇게 빈약한 설교를 하는 무식한 목사일까 하는 등의 대조가 되어 버린다.그도 그럴 것이 부자자본주의적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정치, 문화, 경제, 시사, 연예, 오락, 스포츠 등에 관한 지식이 물씬물씬 풍겨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 담임 설교자 목사에게는 각 분야의 부목들이 즐비하다. 분야별 부목이 있다. 정치 분야 정보를 제공해 주는 전문 부목 곧 비서가 있고 하다못해 스포츠 분야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비서 부목도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협
석가모니는 40여 년간 중생을 제도했으나 “자기와 인연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보응을 받아야지 용서받을 길은 없다.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 등 삼세를 구원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개인전도를 많이 하셨고, 12제자, 70문도, 다락방의 120명 제자, 승천시의 500문도, 4,000명과 5,000명에게 떡 먹이고 설교, 어떤 때는 무리 수만 명이 따라 다녀 밟힐 만큼 되기도 했으나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제자들은 다 달아나고 사도 요한만 십자가의 골고다 동산까지 따라왔었다. 오순절 후에 베드로의 설교에 한번은 3,000명 다음은 5,000명이 결신하는 열매를 보였다. 목회를 시작한지 53년에 접어드는데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전도했고 복음을 여러 가지로 전했는데 한 사람의 생명이 고귀한 것을 깨달은 사건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죽을 줄도 모르고 물에 빠진 초등학생을 구하려고 얼음물에 뛰어들었던 그 때가 일평생 뼈저리게 잊혀지지 않는 절박한 체험교훈을 되새겨 본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