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 옷장에는 수 십 개의 넥타이가 걸려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넥타이수가 그렇게 되었다. 준 사람의 고마운 마음을 생각해서 거의 한 번씩 매어 본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특별히 애호하는 넥타이가 있다. 무슨 넥타이를 맬까하고 넥타이 걸이를 살펴보면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딱 하나의 넥타이에 손이 간다. 바로 그 넥타이를 늘 자주 맨다. 왜 그런가? 그냥 좋기 때문이다. 매고 나서 거울을 바라본 나의 행장이 그 넥타이 때문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 넥타이는 천이 부드럽고 칼라풀한데다가 무슨 그림인지 모르나 디자인이 잘되어 있고 목에 걸치고 내리면 내 배꼽 위를 살짝 덮는 길이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아내가 말 한다. : “또 그 넥타이요?”라고. 그런데 아뿔싸 어떻게 한담? 이 넥타이의 수명이 다 한 것 같다. 우선 천이 맥이 없이 늘어지고 목에 매어 봐도 반듯하지 못해서 마치 피다가 떨어지려는 장미꽃 마지막 모습 같았다. 나도 이젠 이 넥타이와 이별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버려야지! 그러나 어디에다 버린다냐? 이 넥타이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설교할 때나 결혼식 주례할 때나 하여간 귀한 시간에 꼭 나의 목에 걸려 있어서 나도 좋
하나님과 함께라면 너무 늦은 법은 없다. 인생을 재건축하기에도 늦는 법은 없다. 석가모니는 80세에 열반에 입적하셨지만 모세는 왕궁에서 왕자로 40년 끝에 살인자가 되어 애굽에서 미디안 광야로 추방되었고,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로 40년이 지나 드디어 80세가 되어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 120세에 느보산에서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켰다. 유행어로 80세에 데리러온 저승사자에게 대답한 말이 무엇이든가?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갈데아 우르에서 떠나 100세에 이삭을 낳고 175세에 부름을 받을 때까지 가나안에 축복을 누렸으며 복의 근원이 되었고, 공자는 73세에, 소크라테스는 70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여호수아는 70세에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 영도자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토지를 분배한 후 110세에 죽기까지 사명을 감당했다.30세경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울 청년은 바울 사도로 67세 가까이 죽을 때까지 지상충성을 다한 고백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독일 라이프찌히 선교사로 간 54세의 목사 선교사아들이 이미 그곳간지도 15년 세월이 흘렀고 가끔 고국부모 찾아오길 그래도 여느 선교사보다는 잦은 셈이다. 부자간에 갖고 있는 목사 철학 때문이다 부모도 선교의 제1대상이라는 생각이 아들선교사 목사의 선교관이기 때문이다. 그 선교관에 아내도 동의해 준지가 아예 선교지 떠날 때였다. 독일에 무슨 선교사가 필요하냐면서 사람들은 선교 지원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듣고 보면 동남아의 어떤 나라 못지않게 선교가 필요한 곳이 바로 유럽이요 그 중에도 유럽 선진국이라는 데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문화에 젖어 있을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근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관점에서 아들 목사 선교사는 그놈의 문화의 벽을 넘어 "알 예수님(Naked Jesus)"을 소개하는 복음사역지로 일하고 있지요.그런데 이름도 빛도 없이 아비목사인 내가 아들선교사의 후원회장(?)이 되어 15년을 돕고 있다. 모금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유럽선교의 필요성을 말하고 애써 모금한 선교헌금을 매달 꼬박꼬박 보내는 마치 쪼들리는 사장님이 직원에게 봉급주는 기분 같기도 하다. 그런데 선교사 목사아들이 한국에 한 달 체류하다가 그의 딸 혜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3)오래전에 읽은 “야테스의 물웅덩이”를 새해가 들어 더욱 뼈저리게 느낌이 왔다. 사람이 우선 알지 못해서 주님의 축복을 만끽하지 못한다. 알지 못해서 청춘을 허비하고 노경에 쓸쓸하게 사는 것을 특히 노숙자들 전도에서 발견한다. 부산 주님의 교회의 실버모임에서 설교를 하면서도 더욱 깨닫게 되었다. 2~300여명의 노인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없이 살아온 그들은 마치 야테스의 후예와 다름이 없었다. “야테스 물 웅덩이”(Yates Pool)는 미국에서 유명한 석유매장지로 알려졌다. 야테스 씨가 소유한 목장으로 저당권을 설정하고 원금과 이자를 갚기에 힘들었고 목장에서 나오는 작은 돈으로 옷가지나 식료품을 사기도 어려워서 가족생계는 국가보조금으로 지탱했다. 한번은 석유회사로부터 지질조사단이 그 지역으로 와서 야테스 씨에게 그의 땅에 석유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시굴정(Wildcat well
대학교 3학년 때 쓴 졸업논문 세미나의 주제는 “사랑의 법”중의 리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석학의 “Love and Law”를 폴 람세이(Paul Ramsay) 교수가 평가한 내용을 본인이 연구한 것이었다. 50년이 지나도 니버 석학은 칼 발트나 에밀 부룬너와 불트만 보다 저에겐 높이 평가된 20세기의 신학자요 목회자요 개혁자요 예수의 모형의 삶을 보인 주의 종이라 생각된다. 당시 나의 논문은 쓰고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수난도 하나님의 사랑에 범주로 본 니버 교수의 옥스퍼드 강의 (Lectures) 일부분을 아래와 같이 살펴본다. “사랑은 바로 본뜻대로 사랑이다. 사랑의 단어는 확실히 그것과 인간 자신과의 관계를 위해 마땅하게 사용되지 않고 있다. 사랑에는 부주의한 사랑, “수난의 사랑” 자기희생적 사랑이 있다. 사랑은 부주의함엔 틀림없으나 사랑보다 더 주의 깊고 조심성 있고 융통성 있게 분명한 것은 없다. 또 사랑은 모든 수난을 참고 견딤에는 틀림없으나 역시 그 가운데서 기뻐하고 또 다시 기뻐한다. 사랑은 자기 욕구에 대한 희생과 이웃에 대한 선행과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즐거워한다….” 그렇다. 유치원 화상원아 박호
“6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7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요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백세 인생’ 노랫말이다. 휴전선(DMZ) 대북방송에 내보낼 정도로 화제이다. 사람은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한다. 물론 사람의 생사화복은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수명 동안 몸을 건강하게 돌보는 것도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병장수의 욕망은 오늘날 생명공학의 신기원을 이루었지만 성경에 있는 120세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런 시점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 먹을거리의 중요성이다.전혀 오염되지 않고 소식(小食)만으로도 고 영양을 섭취하면서 암, 당뇨, 비만 등 각종 불·난치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식품. 이것이 바로 현대인이 찾는 이상적인 먹을거리이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먹을거리는 태초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전인 치유의 복음서인 성경에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먹을거리에 대한 말씀이 분명히 나와 있다. 현대의학으로 해결되지 않는 질병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회복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생식’이다.‘생식(
최진희 가수가 불러서 큰 유행을 일으킨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가 있다. 나는 이 노래를 애창한다.어떤 모임에서 목사도 한 곡조 빼세요. 하고 요청하면 보라는 듯이 서슴지 않고 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하면 모든 사람들이 감동하면서가수로 나가도 출세했을 것이라고들 하는데. 그 노래 가사를 말하면 이렇다 :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율법)은 알 수 없어요. 사랑(율법)으로 눈 먼 가슴은 진실 하나에 울지요. 그대 작은 가슴에 심어 준 사랑(율법)이여, 상처를 주지 마오, 영원히.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율법)의 미로여” “사랑 자리에 ”율법“을 대치하고 ”진실“ 자리에 ”복음“을 대치해서 불러보면, 이게 유행가인지 복음송인지 분간하지 못한다.목사가 유행가 한 곡조를 빼고 싶을 때(?) 유행 가사를 그대로 옮기기는 어려운데 복음으로 편작(編作)을 하면 내 마음도 꺼림이 없고 듣는 이도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사랑의 미로”를“율법의 미로”라는 제목으로 크게 바꾼 뒤에 가사를 정리하면 아주 복음적인 해석이 나온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의 표시인 율법 앞에서 꼭 그것을 지켜보려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하건만 인간이 유약해서 지킬 수 없는 절망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가끔 선후배 군인들의 얘기 중에 “최전방에서 전방 초소를 서는 병사의 목이 북한 군인에 의해 잘려 달아나고 몸만 뒹구는 일이 있다”고 했다. 나는 나이 28세에 신대원 학업과 도안교회 목회를 중단하고 국방의 의무를 위해 고향으로 가던 중 두려운 마음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소개로 김천에 내려 용문산 기도원에 올랐다. ‘믿음’방에 투숙했는데, 나와 같이 작은 방에 합숙한 이성환 씨는 반신불수로 왜관에서 왔는데 방앗간을 하고 있다고 했다.자기 말로는 여자관계로 미군과 싸워 그결과 팔은 오그라졌고 다리는 굽힐 수 없는 편 다리가 되었다고 했다. 군 입대 준비를 위해 한 주간 금식기도를 하려고 올라왔는데, 그가 자꾸 예배하고 기도해 달라고 해서 첫날은 회개, 다음날은 구원, 셋째 날은 병 고침에 대해 예배하고 말씀을 전한 후 불쌍히 여겨 치유기도를 간절히 해주고 앞산 위에 올라 기도하고 위의 두 말씀
별 두 개를 단 사단장(師團長)이 사병대열에 끼어있고 일등병 사병이 사단장 사열대 위에 앉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이렇게 구성된 사단전투력이 전투에서 승전할 수 있으랴. 어떤 군사학자가 조심스럽게 전해 주는 말이 있었다. 상당수의 사단병력이 손실되어도 사단장이 살아 건재한 사단은 전투할 수 있으되, 사단장이 전사하거나 적군에게 포로 되어 갔을 난경에 처한 사단은 깨어진 사단이라고 했다. 사단장은 절대적인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러도 사단장은 보호받아야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사단장을 예우하는 것이고 그 예우는 사단병력을 통솔할 수 있는 카리스마 인정이며 그 카리스마의 작동이 사단으로 하여금 전투에서 승전하게 한다는 것이다. 높은 사람은 높은 데로 예우를 받아야하고 낮은 사람도 낮은 데로의 예우를 받아야 한다. 신분에 걸 맞는 대우가 예우이다. 신분은 자리(position)와 일(duty)로 구성되는 것인바, 신분예우는 그 사람의 자리와 일을 존중한다는 것이겠다.때마다 느끼는 나의 소감은 주례자 예우가 영 소홀하기 짝이 없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말인고하니 양가 혼주들이 손님맞이 하기에 여념이 없다보니 주례자에 대한 관심은 전무 하다
새해에 접어들면서 대학시절 영문과에서 읊은 영국여인 쉐리의 유명시 “비가”(Lament,悲歌)가 왜 떠오르는가? 7X9=63이 지나고 모세의 나이로 접어들어서인가! 오 세상이여!아 인생이여!아 시간이여!오 이제 마지막 발걸음에 올라옛날 섰던 자리보고 소스라치며그대 청춘(prime)의 영광 언제다시 오려나?오 결코 이제는 다시 오지 않으리!낮과 밤으로부터환희는 달아나고새 봄도 여름도서리흰 겨울도비탄으로 내 지친 가슴그러나 환희에로는오 결코 이제는 영영 오지 않으리 쉐리(1792~1822, Percy Bysshe Sheiiy) 시인은 200년전 안타깝게도 이 비탄의 시처럼만 30년을 살았지만 그녀의 초상화가 곱고 우아하고 정숙하며 지성적인 여인으로의 쓴 시도 낭만주의 기풍이 넘쳤다.“오 세상이여! 아 인생이여! 아 시간이여!”라고 첫머리의 외침이 한해를 보내고 새해의 문턱에서 7X9는 63세로 살아온 나에게 질문을 던져준다. 새해는 모세의 시내산 나이가 되니 더욱 그렇다. “세상이여”(Oh world)정말 다사다난했던 세상이었음을 보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종교적으로나 개인과 가정, 국가와 민족, 국제적 경쟁과 군사적 대립 및 IS같은 폭도집단의 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