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가족 모임이 있을 때 서로의 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덕담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가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 가정의 자녀들의 외모를 칭찬하며 관례적으로 하는 말들 중에 “야,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잘 생겼구먼” 하는 농담이 있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의 부모들은 오히려 마음 뿌듯해 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물지만 어떤 분들은 이러한 농담을 불쾌해 한다. 심지어 정색하며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면 모임의 분위기가 자못 썰렁해지는 부작용이 따라오곤 한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기 자녀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대단히 기뻐하기 마련이다. 자녀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가 그 자녀들을 낳고 키운 부모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제 간에도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이 노래를 잘 불러서 각종 음악콩쿠르의 대상이라도 탄다면 스승은 누구보다도 이를 기뻐하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간혹 이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못난 스승들도 있긴 하다. 제자가 너무 잘 해서 혹시 자신의 영역이나 자리까지 넘보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제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에 있어서 전통주의와 새 관점주의자들의 관점의 문제점들을 살피고 그 새로운 대안으로써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론을 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그 예로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시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기에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관점에서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갈라디아서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이로써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론을 넓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Ⅲ.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신론적 측면의 구원 신약성경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구약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유대교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쉐마를 고백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이 구절은 유대 사상의 토대였는데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구약성경에 놓인 기초 위에 건축했
퇴직한 후에 몇 타 교단 신학교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았다. 그 중 어떤 곳에서는 필자가 연구하거나 가르친 분야가 아닌 사도행전과 요한복음, 교회사, 설교학 등을 요청해서 나는 교재를 찾고 교안도 새로 만들어야 했다. 나는 서점은 물론, 도서관과 장서(藏書)를 가진 친구의 서재에 까지 가서 관련 분야의 책을 섭렵했다. 필자가 검토한 책 중에는 제목과 장정은 그럴듯한데 문장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고 심지어 주(註)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여기저기서 따온 글을 짜깁기 한 책도 있었고, 방대한 분량의 책에 색인(索引)을 달지 않아서 저술로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내용면에서는, 어떤 책은 내용은 말 할 수 없이 좋았으나 너무 이론적이어서 교재로는 적합하지 못했고, 어떤 책은 분량이 많아 감당할 수 없었고, 또 어떤 책은 저자의 교리적 신학적 편견이 심해서 어떤 이론이나 인물을 지나치게 선양하거나 배척하는 등 편협한 견해를 드러낸 것들도 있었다. 좋은 책이 많았지만 교재로 쓸 만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심사숙고 끝에 선택한 일부 교재는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 교재로는 평택대학교 피어슨연구소가 펴낸 피어슨 박사(Arthur T. Pierson)의 ‘신
웨슬리는 그 바쁜 시간 속에서도 책 읽을 시간을 스스로 만들었다. 환경과 여건을 뛰어넘어 책 읽기를 감당했다. 의지적으로 책 읽기에 마음을 모았다. 분명한 것은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책 읽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더더욱 분명한 것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책벌레들이었으며, 하루하루 모든 일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는 대학생활에서 400여 권의 책을 읽었으며, 그렇게도 분주한 전도자의 생활 중에도 일생 동안 1000여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그는 한마디로 독서광이었으며, 책벌레였다. 목회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책을 읽는 것이 목회자들에겐 생활이 돼야 한다. 아무리 해야 할 일이 많아도 책 읽는 시간만큼은 확보해야 한다. 사람이 책을 많이 읽어서 좋은 지식을 소유하면 그것이 눈빛으로 비치고 얼굴에 나타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목회에서도 빛을 발휘할 수 있고, 목회의 열매로 드러나기도 한다. 웨슬리는 아주 부지런한 독서가였다.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는데 보통 많이 읽은 것이 아니라 책에 빠져 있었다고 할 정도로 많
하나님은 교회를 향한 모든 계획은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시고(1:4), 우주가 아들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고(1:10),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피로 죄 사함과 구속과 은혜를 받고(1:7)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화목을 이루게 됐다(2:16). 성자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죄사함’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제시된다. ‘구속’의 개념은 애굽의 통치 아래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된 출애굽 사건을 통해 예표했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성취됐다. 이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복종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였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 은혜는 새 삶이 시작된다는 약속과 함께 주어졌다. 이에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8)라고 말한다. 에베소서에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그리스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하는 이른바 우주적 기독론이 서신 전반에 걸쳐 강조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뛰어나신 분
요한복음은 이스라엘의 메시야(그리스도)로 오신 나사렛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이신 것이 입증되었음을 그보다 더 명확할 수가 없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1:1~3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느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뒤에 인용된 요1:14과 요20:28과함께 신약 성경 전체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는 말씀이다.이 구절들은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로고스이시며 이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을 성경 속에 명문화해 두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요1:10,11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자기 땅인" 이스라엘에 사람으로 오셨고 또 "자기 백
그런데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대속 제물은 죄가 없는 존재여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가 있다. 마태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이 예수라는 분이 이 요구를 충족시키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마태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마리아가 낳은 이 아들이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이라고 증언하고 있는가? 그 예수가 장성해 놀라운 기사와 표적들을 행하였기 때문인가?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옳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를 오래 따라다니더니 제자들을 대표해서 그분께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고백을 가야바의 뜰에서 완벽하게 뒤집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붙잡히실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아예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마태는 무슨 근거로 사7:14의 “임마누엘”이 바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나사렛 예수라고 말할 수 있었는가? 그 해답은 그 예수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그가 직접 만나 보았다는 사실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가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그 임마누엘이라고 주장하는 복음서를 마태가 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가 그분의 부
목회자보다 더 나은 평신도. 이 생각은 목회를 하면할수록 더 진해져 가는 생각이다. 진실로 난 우리 성도들이 존경스럽다. 그들 믿음에 늘 감탄한다. 그런데도 난 오늘 목회자란 이유 하나로 그들 앞에 선다. 대체 뭘 가르칠 게 있다고? 되레 그들로부터 배워야 할 내가? 이 생각은 지난 주 심방한 한 가정에서도 확인했다. 30대 젊은 나이에 오랫동안 깊은 병치레로 몸과 마음이 지칠 법도 한데, 이미 몇 차례 수술로 이젠 병원 가는 것조차 겁날 텐데, 얼마 후엔 또 신장이식수술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런데도 그 앳된 얼굴에 밝은 미소와 깊은 평안을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위로하러 간 심방이었지만 위로는 내가 받고, 힘내시라고 간 심방이었지만 힘은 내가 얻고, 기도해드리러 간 심방이었지만 격려는 정작 내가 받았다. 그녀는 내 덕분에 평안을 얻었다지만 솔직히 그녀 덕분에 내가 평안을 얻었다. 예배하는 내내 그녀는 나 때문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지만, 난 그 모습 때문에 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뭐지? 과연 난 그럴 수 있을까? 저 상황에도 저런 평안함 가질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 믿음은 목회자인 나보다 훨씬
하나님은 어느 시대든지 이렇게 일꾼들을 들어 쓰셨다. 웨슬리는 영국에서 신앙부흥운동을 시작하여 현재의 감리교회 토대를 이룬 창시자이다. 영국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는 책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웨슬리 자신이 많은 글을 쓴 작가였으며, 수많은 책을 저술한 저자이기도 했다. 또한 웨슬리 자신도 열성적인 독서가였다. 22세에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후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는 ‘홀리클럽(Holy club)’을 이끌었는데, 이 모임은 웨슬리의 지도로 경건한 삶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그들은 성경과 고전을 연구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며 옥스퍼드 감옥의 죄수들을 방문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삶을 행동으로 성실하게 보여 줬다. 영국의 복음전도자 웨슬리는 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다. 어머니의 기도와 가르침 덕에 어려서부터 경건생활에 힘쓸 수 있었지만, 그는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진 못했다. 그러던 중 미국 조지아 주 선교여행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후 모라비안 형제단의 집회에 참석하게 됐다. 그리고 그때 어떤 사람이
로마서 8장 11절에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부께서 성령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주도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몸의 부활도 성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이루실 것이라 함으로 우리의 구원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협동사역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 영으로 말미암아”의 속격은 현재에 내주하시는 성령과 미래의 부활간의 연속성을 나타낸다. 바울은 11절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너무 쉽게 표현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와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주한다”를 두 번씩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부활 생명을 성령에 의존적이고, 거룩한 성령에 흡수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이는 삼위일체적인 방향에서 기독교 신학을 몰고 갈 수 있는 신 개념의 긴장이 이미 이 구절들에서 분명히 내재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은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26절) 마음을 살피시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27절).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성자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34절). 여기서 우리(교회)를 위해 기도 가운데 역사하시는 삼위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