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성 베드로 성당에 가면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유일하게 자기 이름을 새겼다는 대리석 조각품 피에타(Pieta)가 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끌어 안고 처연한 모습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대리석 조각품인데 어떻게 구겨진 옷, 근육과 핏줄까지 이렇게 섬세하게 묘사될 수 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떤 조각을 공부하는 학생이 망치와 끌을 들고 저 한 부분을 좀 더 다듬으면 좋겠다고 달려든다면 정신 감정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테텔라스타이(다 이루었다)”를 외치신 주님의 죽음 앞에 무언가 우리의 공로를 좀 더 보태야 완전한 구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고 영원히 속죄됐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겠다고 한다. 무엇을 남기셨다는 말인가? 나치 독일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순교자 본 훼퍼 목사는 독일 교회가 능력과 영향력을 잃어버린 원인중 하나는 값싼 복음(cheap gospel)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라 했는데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하셨다.
과학이 발달해 인공 심장, 인공 관절, 인공 줄기 세포까지…. 웬만하면 다 만들어 내는데 아직까지 피는 못 만든다. 피검사를 통해 피의 구성과 생명체의 신비와 몸속에 질병을 알아내지만 여전히 피에 대한 신비는 무한대로 남아있다.지구상에 모든 제사는 피를 요구한다. 가장 고귀한 생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죄인에게 피의 제사를 요구하셨다. 구약 수천 년 동안 죄인들은 황소의 피, 양의 피를 바쳤다. 3.1절 독립만세를 회상하다 인터넷에서 일본 군인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담은 사진들을 보게 됐다. 닭 모가지 치듯 조센징의 잘리운 머리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수십개 목을 잘라 긴 빨래 줄에 곶감처럼 매달은 사진, 일본도로 내리칠 때 피가 튀지 않도록 뒷목에 수건 덮은 사진, 총검에 찔리기 직전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진, 여성의 음부에 총질하여 처참하게 널 부러진 사진, 시술대 위에 구불거리는 창자를 꺼내며 해부하는 사진도 있다. 지금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이토록 수많은 우리 선조들의 피가 뿌려졌다는 것을 우리 후손들은 얼마나 실감하고 있을까? 공분과 함께 가슴이 아려온다.5년 후 이 땅은 동족상잔의 6.25 전쟁으로 다시
맥베스의 비극의 후예들영문학과 4년째 누구나 골머리를 앓는 영문학의 최고봉은 셰익스피어(Shakespeare)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나마 재미있게 넘기지만 대비극의 하나로 “To be or not to be”의 햄릿(Hamlet)을 배울 때는 인생의 심각성을 깨우치나, 맥베스(Macbeth)는 데칼트가 언급한 “권력욕”(Will to power)의 허상을 쫓다가 결국 파멸하는 비극으로 끝맺는다. 오늘날도 권력에 거머리처럼 더덕더덕 붙었다가 똥배불러 큰집(교도소)로 떨어지고 비참하게 종국을 맞는 맥베스의 후예들을 본다.스코틀랜드의 용맹한 장수 맥베스는 왕이 될거라는 마녀의 예언에 현혹되어 아내와 짜고 사촌인 던칸(Duncun) 왕을 엘진(Elgin) 전투에서 살해하고 왕좌에 앉으나 최강의 권력자가 된 부부는 행복은 커녕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린다. 마음속의 재판관인 양심이 죄책감이라는 무서운 형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드디어 3년 후 던칸 왕의 장자인 말콤(Malcolm)에게 자신도 살해되어 결국 “맥베스의 비극”으로 종말을 맞는다.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욕의 희생물로 최후를 마친 맥베스는 많다. 인간의 탐욕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력욕의 후예는 성경의 사울왕과 징
세계적인 발명품은 번개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들이 많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발견한 뉴턴의 만유인력. 천둥번개에 놀란 프랭클린의 피뢰침이 그런 것들이다. 50년 전 천막을 치고 이단취급 받던 개척 교회에서 오늘날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룩한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도 어느 날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번뜩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1차원의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선(線)은 현미경으로 보면 이미 면(面)을 지니고 있다. 2차원의 면도 3차원의 이미 공간(空間)속에 지배를 받고 3차원의 입체(立體)도 입체를 만드는 순간 4차원의 무한한 시공간(視空間)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4차원은 영혼의 세계이기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3차원의 세계는 4차원의 영적인 무한한 세계에 이미 들어와 있고 지배를 받게 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3차원은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히11:3에 말씀에 근거한다. 4차원의 영성이란 생각, 믿음, 꿈, 말 등 4가지 요소를 잘 다스리고 훈련하는 영성이다.(1) 생각 :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 생각은 시공간의 지배를 받지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인류를 구원하고 역사를 바꾼 주예수 그리스도의 피땀 흘리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기도응답의 영원한 표상이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우리가 한때 기쁨이 충만했고 은혜와 평강이 넘쳤는데 지금은 냉랭하고 공허하며 미지근하고 쓸쓸하게 되었다면 사무엘이 말한 “기도하기를 쉬는 죄”(삼상12:23)부터 먼저 회개할 것이다. 호흡과 같은 기도에 태만한 것은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지 않은 것 못지 않게 통찰하고 다시 얍복 나루터에 나아가 천사와 씨름하는 기도로 승리하여 영적 환희와 감격이 넘치고 충만한 응답의 체험을 만끽해야 하지 않겠는가?가끔 우리 앞에 나타나는 문제들은 언제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기도하여 응답받으라는 적신호이다. 문제나 한계는 그대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믿음으로 승화시키고 은혜와 축복의 통로이며 기적을 안겨주는 하나님의 방법이다.근심, 걱정, 염려, 심험, 병고, 환란, 좌절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은 우리로 무릎을 꿇게 하고 막힌 문을 열고 돌담을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 첫번하신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였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믿음은 회개를 전제로 하고 회개는 믿음을 수반하는 것으로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앞뒤와 같다고 한다.성경에서 예수님의 돈궤를 맡은 가룟유다에게 돈의 탐욕으로 “사단이 들어가니”(눅22:3) 몇 번이나 회개의 기회를 준 스승 예수를 배반하고 은 30냥에 팔아넘긴 후 회개치 않아 “스스로 목매어 죽어”(마27:5),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온지라”(행1:18) 저주의 최후를 맞게 되었다.오순절 이후 예루살렘교회는 부흥일로에 있었으나 때론 사도들이 투옥되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그 와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과 교회, 성령과 베드로 사도를 속인 죄로 교회당 안에서 죽어 장사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죽을 죄를 저질렀으니 교회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합니다. 선한 동기에서 시작한 봉헌이었는데 물질의 탐욕이 우리를 범죄케 했으니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회개하며 고백했더라면 비참한 죽음을 맞지 않았으리라.회개치 않는 자에 대해 예수님은 경고했다. “이에 가서 저보다 악한 귀신
성대하게 치뤄지는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취임식을 지켜보면서 5년 전 손 흔들며 그 자리를 떠났던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이 크로즈 업됐다. 그 어느 누가 몇 개월 뒤 부엉이 바위 위에서 뛰어 내릴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대통령의 자리는 분명 축복의 자리임에 틀림없지만 그 자리는 또한 저주의 자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역사의 교훈을 받는다.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모세를 통해 그 땅이 얼마나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인지를 소개한 뒤 그 곳에서 백성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키는가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음을 가르쳐 주셨다(신명기11장).돈이 주는 혜택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은 그래서 그 돈을 벌려고 그렇게 애를 쓴다. 그런데 정작 그 많은 돈을 번 뒤에 그 돈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많다.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을 조사한 보고서는 놀랍게도 그 복권 때문에 알콜 중독자가 되고, 이혼하고, 심지어 자살하는 불행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실은 복권 때문에 행. 불행이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복권과 상관없이 평소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더 나누고 베풀면서 행복을 이어갔고, 평소 원망과 불평 속에 살던 사람은 횡재한 뒤에 앙
중학교에 들어간 내 자녀가 초등학생보다 작으면 속상합니다. 나이에 걸맞게 외형이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키는 대학생만큼 커서 밥은 많이 먹는데 생각이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성장(Growth)은 인체의 외적인 뼈와 내부 장기. 근육 등의 부피와 크기를 의미하나, 성숙(Mature)은 인간의 내면적인 인격과 성품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장과 성숙은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성장만 하고 성숙이 안되면 거인증(巨人症)이 되고, 성장 없이 너무 빨리 성숙되면 조숙증(早熟症)이 됩니다. 성장할 시기에 성장하고 성숙할 시기에 적절히 성숙할 수 있어야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습니다.신앙생활에도 성장(成長)과 성숙(成熟)의 밸런스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연조가 길어지면 그에 걸맞게 자기 자리에 설줄 알아야 하나, 성장은 했는데 성숙에 못 미치는 성도를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특징은 2가지입니다.첫째는 영적인 양식에 대한 배고픔을 모르고 먹어도 밥 대신 젖만 소화시킵니다.둘째는 삶속에서 이웃을 사랑하거나 양보할 줄 모르고 시기와 질투 속에 원망하고
1. 성내지말라“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목사가 사모와 아이들에게 큰 소리치고 분을 못이겨 물건을 파괴하는 소리를 문 밖에서 듣던 우편배달부가 아무래도 부부싸움이 길어질 것 같아서 문을 열고 들어가 목사가 던져버린 막대기를 집어들어 주면서 “목사님, 더 부셔요!”하고는 깨어진 것보다 더 좋은 가재도구를 들어서 그 앞에 놓고 얼른 갔다. 성난 목사는 그만 보따리 싸서 나갈 마음이 풀리고 기도에 들어갔는데 통회와 자복의 기도 끝에 큰 은혜를 받아 가정도 화목하고 교회도 놀랍게 성장했다고 임철수 목사가 서울교회 집사수련회에서 한 얘기가 기억된다.서울교회에 부임 후 한 번은 운영위원회가 격렬한 논쟁 끝에 저녁 12시를 넘긴일이 있었는데 격론을 담임목사가 말리지 않았다고 오히려 나를 공격했어도 충청도에 10년 산 경험으로 ‘서산, 당진’으로 엿가락 늘어지듯이 참아 잘 넘겼는데 유치원 화재 이후 언젠가 토론이 길어져 결국 불똥이 또 나에게 튀었다. 듣다 못해 ‘혈기 핏대’가 분노로 치밀어 그만 탁자를 한번 치고 말았다. 그런데도 두세사람이 계속 무엇이라 주고 받으며 말꼬리를 이었다. 이왕
제사를 거부하는 며느리와 갈등을 겪다가 상을 뒤엎은 뒤 자식을 만나지 않는 어르신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다. 며느리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처럼 귀찮게만 느껴지는 제사인데…. 어르신은 조상님들을 존경하고 대접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최근 새벽 시간 레위기를 묵상하면서 430년 종살이하던 히브리민족을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왜 그토록 많은 제사 절기를 정해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하셨을까를 생각했다.번제, 소제, 요제, 거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왜 그렇게 까다롭게 이건 먹어라 저건 먹지마라 음식을 구분하셨을까? 왜 일상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일들을 그렇게 일일이 간섭하셨을까? 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지명하여 특별한 옷을 입히고 먹는 것 입는 것 심지어 보는 것까지 구별시켜 교육을 시키셨을까?레위기가 모세5경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발견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본심이 숨어있다. 그 속에 하나님의 광야훈련 핵심교안이 박혀있다. 그 교육이념을 모르면 며느리가 차리는 제사상처럼 따분하고 지루한 일이 된다. 소아시아 7교회 중 가장 많은 일과 섬김과 사랑과 믿음이 충만했던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님은 가장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