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가운데 영적 성장의 침체와 더불어 교회부흥의 어두운 미래가 예상된다. 적잖은 목회자들과 교회의 중직자들은 이 문제로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현재의 현실이다.어떤 영역에서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는 장애물이 있기 마련이다. 교회성장이라는 고지에 도달하는 데에도 적잖은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장애물을 무사히 통과한 자 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장애물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장애물의 정체성에 대해 면밀히 연구하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교회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첫째는 심리적 장애물이다. 교회성장의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무엇보다 숫자에 대한 고정적인 생각이다. 숫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만이 중요하다는 태도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숫자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구원받은 영혼임을 명심해야 한다. 작은 교회가 최선이라면 극단적으로 말해 가장 좋은 교회는 한 사람이 모이는 교회일 것이다. 크던지 작던지 교회의 사이즈가 문제가 아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대해 얼마나 헌신하는 것이 이슈의 초점이 돼야 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이야
아주 오래 전 썰렁한 유머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63빌딩에서 한 가족이 떨어졌는데 모두 다 살았다. 이런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정답은 이렇다. ‘아버지는 기러기 아빠, 엄마는 새 엄마, 아들은 비행청소년, 딸은 날라리였다.’ 이게 90년대에 유행하던 썰렁개그다. 그런데 요즘은 냉소적인 유머가 판을 친다. 몇 년 전, 병맛이란 말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병맛‘이란 ‘병신 같은 맛’의 준 말로 ‘어떤 대상이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다. 당시에 인터넷에는 병맛만화가 뜨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이말련 시리즈’에 이런 만화가 나온다. 어느 현대인이 필수품인 차가 없어 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차를 사러 갔다. 경차를 고르는 그에게 판매원은 안전이 중요하다며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중형차를 선택했더니 대형차가 들이받으면 위험하다고 한다. 대형차를 사더라도 트럭이 와서 충돌하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이 사람은 결국에는 25톤 덤프트럭을 샀다. 그리고 신나게 달리다가 무궁화호 열차와 충돌한다. 이야기는 ‘안전하고 튼튼한 대중교통 기차를 애용합시다-철도청’이란 어이없는 결론으로 막을 내린다. 한 마디로 어이없음 그 자체다. 그런데
2015년 6월 26일. 미국은 드디어 항복했다. 스스로 청교도 신앙 운운하며 기독교 정신 위에 세워진 나라라고 자랑하던 그들,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로 부러움을 샀던 그들이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동성 결혼 합법이라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 방망이 소리가 전 세계로 울려 퍼졌다. 2013년 36개 주에서 허용된 동성 결혼이 이제 미국 전체에서 허용된 것이다. 성소수자의 인권, 권리, 보호라는 그럴듯한 인본주의적 명분의 배후는 오직 사탄이다. 그래서 육적이기 보다 영적이다.성경에서 분명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언급된 것을 인권 또는 구원, 보호라는 이름하에 그들을 동정하는 교계의 여론들이 조금씩 의식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일부 교단에서는 동성 결혼을 허용하고 목사가 그들의 결혼 주례를 서기까지 하였으니 오늘의 결정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세속적, 육체적으로 오염된 미국의 기독교 사회는 성경책은 있으나 그 진리는 없는 집단으로 변질되어 왔다. 그러면서 수면 아래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던 죄악의 소극적 행동들은 이제 수면 위로 당당히 나와 적극적으로 그들의 더러움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화 속에서 남의 말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기 전에 나의 생각과 판단을 결정해 버리면 모든 인간관계의 ‘적신호’ 오고 만다.더욱 중요한 것은 좋은 미래를 기대하려거든 상대방을 이해하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모든 일에 올바른 사리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 사물을 바로 보고 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한쪽 편에 기울어져 있으면 상대편을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판단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특별히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남은 전부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해버리면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모자라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물을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혼돈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판단은 쉽지만, 가치판단은 어렵기 때문이다. 왜 가치판단이 어려우냐? 판단자의 주관과 감정,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 악에서 떠나 선한 일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쫓으라.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 중 하나는 ‘기쁨 없는 수고’일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참교육이 포기된 시절을 보내고 취직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간 직장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황폐함 속에서 소외와 갈등과 불안을 안고 살아야한다면 너무 불행하지 않을까? 20세기 초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 도입된 이후 생산은 증대됐지만 자동화로 인해 인간은 소외 가운데 자기 노동의 결과를 발견하지 못하게 됐다. 수세공과 제작이 있던 과거에는 어떤 성취를 이뤘지만 이제는 한 자리에서 매우 단순한 한 가지 일만 해야 한다. 쉬는 시간외에는 늘 혼자 자기의 자리를 지켜야 하니, ‘기쁨 없는 수고’란 말이 생기는 것이다. 사무직은 조금 나을까? 작은 톱니바퀴 같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동은 하지 않지만 성과에 대한 압박과 동료들과의 무한 경쟁 그리고 소위 명퇴와 같은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은 그들 역시 ‘기쁨 없는 수고’를 하게 만들었다. 행복한 노동을 위해서는 직장 선교를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성경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였지만 동족을 돕고자 이집트인을 살해한 일로 미디안 땅으로
천지창조 세쨋날 주님의 역사하심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현재의 추세로 나아간다면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먼저 멸종하게 될 것이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가 내 놓은 암울한 전망이다. 현재와 같은 낮은 출산율을 방치할 경우 마지막 한국인은 2750년에 사망하고, 마지막 일본인은 3011년에 태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는 먼 미래를 내다본 인구 예측이어서 추정에 많은 불확실성이 있으나 다른 변수들도 감안해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단순한 엄포만은 아니다. 한국은 인구 노령화에 출산율까지 낮아지고 있는데다 여성들은 갈수록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13년 출생률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인구 1000명당 8.6명이 태어나 전년 대비 9.9%나 급감했다. 여성 1명이 일생 동안 1.187명의 아기를 출산 세계에서 다섯째로 적다. 이런 추세가 이어질 경우, 북한과의 통일이나 상당한 이주민 유입이 없다면 한국인은 2750년 자연적으로 멸종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현재 5141만여 명인 인구가 이번 세기 말에는 2000만 명으로 줄어들고, 부산에선 2413년, 서울에선 2505년에 완전
부족한 사람이 금년 현대시선 신인 문학상 수필부분에 당선이 되었다. 무슨 늦은 나이에 신인 문학상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감사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 보면 아직 우리 동네에 TV는 고사하고 라디오도 아직 그리 흔 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농한기가 되면 우리 집 안방은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공간이었다. 가끔은 기나긴 겨울밤 간식으로 찐 고구마와 동치미 무를 쭉쭉 쪼개서 잡수시면서 담소를 나누시곤 했는데 아주 가끔은 감자떡이나 무 설기 같은 별미를 해서 나누어 드시던 모습이 눈에 아련하다. 그럴 때면 할머니들에게 유일한 낙이 한 가지 있었는데 옛날 이야기책 읽는 것이었다. 눈도 어두우시고 한글을 잘 모르시던 할머니들이 책을 읽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읽어드리면 할머니들은 읽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책읽기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할머니들 앞에서 책을 읽어드리면 너무 좋아하셨고 고마워하셨다. 나는 그게 좋아서 밤늦은 시간까지 이야기책을 읽어드리곤 하였다. 그때 읽었던 책은 주로 명사십리, 장화홍련전, 콩쥐밭쥐. 어사 박문수, 을지문덕, 강감찬. 장끼전. 별주부전
싱그러운 푸른 나무숲에서 벌써 여름의 서곡처럼 메미의 울음소리가 청아하게 들리는 계절이 이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와 가뭄으로 인하여 지금 고통의 강을 건너고 있다.요즈음에는 요란한 천둥번개라도 함께 하는 소나기가 그리운 날이 많아지고 기다려진다고들 말한다. 삶의 괴로움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우리 국민들은 메르스에도 절망 대신 희망을 찾아 이 혹독한 사막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이러한 아픈 현실 가운데 우리의 이웃 사역의 현장에서의 소식 중에는 소천이라는 메시지가 교단지나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로 슬픔의 전갈을 받은 적이 요즈음에 많았던 것 같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소식은 성경적으로 생각하면 슬픈 단어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쓰는 별세(세상을 하직한다)나 작고(고인이 됐다)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천국으로 불러 가셨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된 길인가,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이별의 슬픔은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삶의 괴로움으로 남는다. 얼마전 신학의 동산에서 젊은 시절의 구약학 교수님. 인생을 침신에서 후학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 고고한 학자의 모습으로 기억되시는 스승님이 미국의 이역 만리에서 소천
얼마 전 한국의 무슬림 신도들이 한국을 무슬림의 나라를 만든다는 명분의 하나로 태극기를 등에 걸고 결사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슬람의 세력의 한국 침투는 매우 전략적이다. 지난 2005년에도 한국이슬람연맹에서 출판한 ‘한국이슬람50년사’에는 이들의 선교전략이 소개되고 있다. 첫째, 사원 건립, 현재 있는 서울 중앙서원을 비롯해 9개의 이슬람 서원, 4개의 이슬람 센터와 50여개의 임시 예배처소를 점차적으로 확대하고 한다. 2015년 7월 초, 전국적으로 이슬람 예배처소는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됐다. 농촌까지 파고 들어가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둘째, 국제 이슬람학교, 설립, 무슬림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한 교육시설이라는 명목으로 영어로 가르치는 초등학교, 유치원 및 어린이집을 만들어 어려서부터 이슬람을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저렴한 가격에 운영된다면 많은 한국인 부모들이 자녀들을 그곳으로 보내고 싶어할 것이다. 셋째, 이슬람 문화센터 건립, 이슬람 문화센터를 다와 센터라고 부른다. 문화센터에서는 많은 이슬람국가들이 언어교육부터 시작하여 상설 이슬람 교리강좌 등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 이슬람을 뿌리내리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전쟁과 기근, 지진과 같은 징조가 있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며, 배도와 함께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대환란과 천년왕국을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장으로서 본다. 교회시대의 정점은 휴거이며,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실한 제자들은 ‘공중에서’ 만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여실 것이다. 이렇게 참된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지면, 적그리스도가 7년 동안 악마적 통치를 시작하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땅위에 쏟아진다. 이러한 대환란 기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이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군대와 함께 재림하셔서 주님의 원수를 모두 처부순다. 그 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며,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다.세대주의 종말론은 기독인들로 하여금 미래의 어떤 시점(예수의 재림시점)에만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서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도록 만들었다. 1992년 10. 28. 휴거설을 주창했던 다미선교회나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