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악처로 유명하다. 소크라테스 일화 가운데 스승의 결혼생활을 잘 아는 제자가 결혼에 관하여 “꼭 결혼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결혼해라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될 것이고, 좋은 아내를 만나면 행복할 것이다. 둘 중에 하나이기에 결혼해라.” 그러자 힘든 삶을 아는 제자이기에 “선생님은 그런 악처를 왜 버리지 않고 함께 사시는 겁니까?”라는 질문에 소크 라테스의 대답이다. “훌륭한 기수는 원래 사나운 말을 좋아하는 법이다. 내가 그것만 길들이면 세상에 못 할 것이 없다.” 어버이날 즈음에 지난해 천국에 가신 장모님을 보고 싶다는 아내와 함께 부모님을 모신 곳에 가는 길이었다. 아내의 고향인 논산을 지나가다가 옛날 아내를 만나려고 새벽에 논산역을 찾아갔던 기억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그때 그랬는지 몰라.” 농담 삼아 던진 말에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나 혼자 주님께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랬어?” 투정 섞인 목소리에 “그 결과로 예쁜 두 딸을 선물로 받지 않았느냐?” 며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의 말대로 아내는 혼자 살았어도 자신의 일을 잘하며, 더 많은 일을 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며 살았을 것이다. 요
현대 사회는 역기능으로 오염된 부분이 많다. 물질만능주의, 생명경시풍조, 인간의 이기로 발생하는 환경오염, 폭력과 전쟁 등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 만들어 내는 것들이 결국 인간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이렇듯 사회와 환경이 오염되면 그 안의 가족들도 역기능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사회가 오염되면 가족이 오염되고, 가족이 오염되면 사회가 오염된다. 사람이 오염되면 환경이 오염되고 환경이 오염되면 사람이 오염된다. 이처럼 이 모든 것이 상호작용을 하는 순환 관계로 볼때 인간과 사회, 그리고 환경을 한 생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많은 부모가 자신들은 건강한 부모, 또는 보편적인 부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대에 걸친 역기능 체계와 함께 오염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이 오염되어 있다고 직면하는 부모는 드물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아이를 양육함에 있어서 아이의 감정이나 자아경계선, 그리고 인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약육강식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공부라고 생각하여 공부를 시키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부모의 마땅한 의무요 책임으로 여긴다. 어떤 부모는 공부를 강요하는 것은 고사하고 직접적으로 아이에게 언어나 신체적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핫 플레이스(Hot Place)’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핫 플레이스’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나 장소를 말한다. 경리단길, 홍대, 문화비축기지 같이 비교적 알려진 장소를 말하기도 하고, 동네의 맛있는 빵집이나 맛집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핫 플레이스는 그냥 자연스럽게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이들의 유명세 뒤에는 플레이스 브랜딩이라는 기법이 숨어 있다. 플레이스 블랜딩이란 특정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여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장소가 단순히 기능적인 공간으로만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꼭 가고 싶은 대상이 되도록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창출하는 활동이다. 일례로 고속도로 휴게소는 여행객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장소지만, 이 휴게소에 맛집이 라는 의미가 부여되고 브랜드화 됐을 때, 여행이 아니더라도 휴게소 음식을 먹으러 방문 하는 장소로 새롭게 재탄생하게 된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된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이 플레이스 브랜딩에 사람들의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혹자는 반드시 사회적 거리를 지켜야 하는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오랜 기
만약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실체로 대치됐다면,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는 부수적인 성질들 안에 존재하게 되는가? 만약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형되는 실체의 교환이 이뤄진다면, 역으로 그리스도의 본질적 실체는 외부적으로 보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껍질(accidents)이 떡과 포도주의 껍질로도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가 되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가 되는 오류를 인정하게 된다. 칼빈은 화체설의 이런 철학의 오류를 명확하게 지적했다. “그들은 떡과 본질이 그리스도로 변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는 그 백색을 그 본질과 결부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찬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여전히 하늘에 계신다고 말한다.” 화체설을 주장하는 가톨릭교회 역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화체설의 성서적 근거는 주의 만찬에 대한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에 있다. 아퀴나스는 주의 만찬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단죄하고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길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런 점들에 대해 유의하지 않고 그들은
“바람 부는 겨울에도/ 따뜻하게 웃어주고/ 내 마음 쓸쓸한 날은/ 어느새 곁에 와서/ 기쁨의 불을 켜주는 꽃, 반세기를 동고동락한/ 동백꽃을 바라보 며/ 나도 이젠/ 한 송이 동백꽃이 되어/ 행복하다” 1976년에 ‘민들레 영토’를 첫 시집으로 엮었던 이해인 수녀는 38년 후인 2014년 나이 70에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이라는 시집을 냈다. 그녀는책 서문에서 “겨울 추위 타지 않고 밝고 환하게 꽃으로 웃어 줄 줄 아는 동백, 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열매를 잘 익혀 멋진 기름을 짜게도 하기에 그 일생이 참 아름답다”며 “필 때도 질 때도 아름답고 고운 동백꽃처럼 한결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사무엘서를 읽으며 사무엘도 ‘동백꽃을 닮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엘상 12장에는 “사무엘이 늙었다”는 말을 세 번 쓰고 있다(8:1, 5, 12:2). 마치 등장하자마자 늙고 바로 퇴장하는 느낌이다. 물론 그러고도 사울 왕과 다윗 왕을 기름 부어 세우고 왕을 가르치고 선지자를 육성하는 일을 계속한다. “이젠 늙었다”, 상투적인 거짓말처럼 보이는 이 표현은 역설적으로 사무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의 핵심 사명은 세대교체, 즉 새 시대의 출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생겼고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이 창조될 때 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연발하셨는데 지금도 하나님께서 지구를 보시면서“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실까? 하는 물음표가 붙는 것을 왜일까? 현재 우리가 사는 지구는 화석연료사용으로 인한 공기 오염과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리고 지구의 기온은 상승하고 육식을 위해 나무숲을 베고 초지를 조성하면서 사막 화가 가속화되고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다. 필자는 설 연휴를 지나고 난 뒤에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쏟아져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울산제일일보에 쓰레기 줄이기 위한 범시민 운동이라도 벌이자는 글을 썼었다. 쓰레기 줄이기 운동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외식이나 매장방문은 줄고 인터넷 주문과 배달 주문이 증가하면서 택배와 배달 식품 포장용 스티로폼 박스나 포장용 비닐 쓰레기가 급증했다고 한다. 재활용 쓰레기로 분리해서 배출하지만 재활용 쓰레기 수출이 막히면서 전국에 120만 톤이상의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보도
나는 많은 목회자들에게 상담을 강의했다. 그중에는 하루, 몇 달, 또는 몇 년을 학위나 자격증 과정으로 만났다. 목회자들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수치심은 상상 이상으로 크고 그 가족과 소속된 교회는 역기능적인 에너지가 많이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의 목적은 그 역기능의 구조에서 순기능의 구조로 바꾸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수치심은 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나의 또 다른 내담자그룹인 가정폭력가해자(법원에서 치유프로그램 수강 명령이 내린 치료그룹)나 알코올중독자들의 수치심과 같은 것이었다. 수치심은 거짓 자기를 만들어 내는데 그 역할로 목회자나 봉사자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역경과 고난 속에서 받은 하나님의 소명을 무시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소명이 자신의 상처를 가리기 위한 합리화이고, 목사라는 직분이 거짓 자기로서 실제의 참 자기가 아닌 그림자 역할만을 한다고 하면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 목사는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극단적으로 참과 거짓을 나누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역기능이든 순기능이든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치유의 과정을 거치며 모든 판단과 선택은 자기 자신이 하게 된다는 것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나누기 전에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생각해서 호세아 4:6을 중심으로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고 있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2)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히는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6)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넘친다. 지난 원고까지는 3번째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위의 4번째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 중 하나가 우리가 지금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호세아 4:6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두 사람의 마라아는 누구누구란 말인가? 그 첫 마리아는 성경이 말하는 마리아이고 그 다음 둘째 마리아는 로마 카톨릭이 섬기는 마리아다. 전자는 진짜이고 후자는 가짜이다. 성경의 마리아를 보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의 수태를 예고했었다. “보라 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온통 의아했던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의 보충 설명이 따른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 지리라”(눅1:35) 마리아는 즉각 순종했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38) 성경에서 말하는 마리아는 단순하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서 수태를 수용한 마리아다. 그 뒤 성경에서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호칭됐다. “성경에는 이 마리아에 대해 ‘주님의 어머니’ ‘예수의 어머니’ ‘그 어머니’ ‘네 어머니’ 또는 ”내 주의 모친” “그 모친” “예수의 모친”이라고 불리다.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리운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분명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러온 사실은 없다. 성육
전 국민이 코로나19로 대구가 생지옥 같았던 지난해 3월, 직접 트럭에 타고 대구 시내를 돌며 마스크를 나눠준 영화배우가 있었다. 바로 김보성씨다. 한 번도 아니고 같은 달에 또 다시 대구로 달려갔던 김보성씨는 ‘의리의 사나이’로 소문난 배우다. 그로 인해 한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의리 신드롬’에 빠질 정도였다. ‘의리’ 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즉 인간의 기본 인성 이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런 기본적 인성인 최소한의 의리마저 다 무너진 듯한 전쟁이 일어난다. 그 전쟁이 바로 암몬과의 전쟁이다. 형제국과의 전쟁 요단강 동쪽 나라 암몬은 요단강 서쪽 해안가의 블레셋과는 달리 사실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안 되는 나라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형제국이기 때문이다. 암몬은 모압과 함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 세웠고,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 세웠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신23:7)고 했고,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신2:19)고 했다. 서로 미워 하거나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사실 형제가 어릴 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