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종말론적 현상들 중 하나가 세계적 전염병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은 세상 끝에 있을 종말론적 현상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문자적 의미로 전달한 것보다는 상징적 그림 언어로 바꾸어 묵시문학적 환상의 틀로 바꾸어 전달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네 번째까지의 인 심판은 서로 다른 색상들의 말과 그 말 위에 탄 자들의 환상을 통해 종말의 현존성과 임박성을 강조한다. 첫 번째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활을 들고 흰 말 탄 자는 정복을 통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자라면(6:1~2), 사람들을 죽이는 붉은 말을 탄 자는 전쟁을 상징한다(6:3~4). 말을 탄 자는 전쟁 후에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극심한 기근을 상징한다(6:5~6). 마지막으로 네 번째 청황색 말은 죽음을 상징한다(6:7~8). 네 말 탄 자들의 환상은 평화, 전쟁, 기근, 죽음이 인간의 이기적 죄악의 결과로 인간 스스로 되받은 인간재앙이 인류 역사에 일어났고 앞으로 더 극단적으로 일어날 것을 통해 이미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이 땅에 도
방문상담을 하는 ‘건강가정사’들은 사회복지나 가정학, 여성학 등의 교과목 이수 외 체계적 가족 방문 및 가족 상담 관련 훈련을 받지 못하고, 사례관리자 또한 개인초점의 사례관리에 익숙하여 가족초점의 사례관리나 상담개입에는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상담을 통한 변화에 상담사 변인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효과적인 방문 가족 상담을 할 수 있는 상담사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족방문상담을 할 때는 기본적인 의사소통 외에 방문상담의 상황 및 대상에 적합한 상담접근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경원외 2인은 방문대상자의 유형을 ‘지지호소형’ 과 ‘문제해결형’ 및 ‘정보/조언요구형’으로 분류하고, 유형별 ‘표준 상담중재’를 제공하였다. 해결중심 라이프웨이 상담사는 방문대상 자를 ‘고객형’과 ‘불평형’ 및 ‘방문형’ 중 한 유형으로 분류하고, 고객형은 ‘은혜사건’ 혹은 ‘예외상황질문’을 사용할 수 있다. 불평형은 ‘대처질문’과 ‘임재질문’으로 개입할 수 있다. 그리고 방관형은 ‘자기관심질문’과 같은 질문 기법으로 피상담자의 강점 혹은 자원들을 찾아내거나 해결의 작은 단서들을 도출할 수 있다. 이처럼 상담사는 방문대상의 특성이나 가족환경,
부부싸움은 곧잘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시작되는데 산으로 올라갔다가 건너지 말아야 할 강까지 이르기도 한다. 왜 싸움이 시작되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싸움이 커지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됐다고 말하는 부분들은 대부분 시초의 갈등 때문이 아니다. 싸우다 중간에 던져진 말 때문에 더 열 받고, 그 반동으로 화나서 한 대꾸가 더 큰 싸움으로 이어진다. 이혼도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직접적 원인 때문이라기보다는 싸워가는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면서 헤어져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교회의 갈등도 시작을 따지면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한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별일도 아닌 작은 불씨가 초가 삼간을 다 태운다. 별일도 아닌 시작에 뒤따라오는 반응이 갈등의 방향을 결정한다. 일하며 상사에게 스트레스를 있는 대로 받던 남편이 집에 들어와 애들 시끄럽다고 짜증을 부린다. 들어오자마자 짜증인 남편에게 서운해서 대뜸 애들한테 해주는 게 뭐 있는데 성질이냐고 되받아친다. 졸지에 나쁜 아빠가 된 남편은 너는 잘하는 게 뭐가 있냐고 한 방을 날린다. 그렇지 않아도 육아에 살림에 지치고 자존감이 바닥이던 아내는 내가 너 때문에 이러고 산다고 원망을 한다. 열 받은 김
네덜란드의 아동 문학가 안나 왈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 있다. 스티븐 바우터루드 감독의 ‘테스와 보낸 여름’이다. 이 영화에서 매우 인상 깊게 볼 수 있는 것은 샘이란 소년이 죽음과 외로움에 대비해서 훈련하는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섬으로 간 샘은 그곳에서 ‘지구에 마지막 남은 공룡은 어떤 마음이었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부터 자기보다 나이 많은 부모와 형이 먼저 죽은 후에 혼자 남아서 외로움을 겪게 될 것을 상상한다. 이것을 미리 극복하려고 일주일 동안의 고독 훈련 계획을 세우고 해변가에서 실행에 옮긴다. 수영을 하거나 게를 친구 삼아 대화를 하며, 섬을 배회하면서 정해 놓은 시간을 혼자 보냈다. 이 영화는 샘이 고독 훈련보다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며 더 멋지고 좋은 추억을 많이 쌓겠다고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만 어린 소년의 고독 문제를 다뤘기에 특이하고 관심을 끌게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과 감정을 가졌기에 정도는 다르더라도 다양한 고독감을 경험하게 된다. 대화할 한 명의 친밀한 친구조차 없거나 반려자를 잃고 난 후의 지독한 외로움과 허전함, 직장이나 공동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감을 가지는 것,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낙오자
이성(理性)은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알아내는 힘이다. 논리적 개념적으로 생각하는 힘으로 본능, 충동, 욕망 등에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 도덕적 법칙을 만들어 따르도록 의지와 행동을 규정하는 자율적 도덕적 의지의 능력을 이성이라 한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반면에 인간은 본능적인 감정을 절제하고 진위, 선악을 구별하여 바르게 판단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한다. 감성(感性)은 사전적으로는 자극에 대하여 느낌이 일어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5관(五官) 눈, 코, 귀, 혀, 피부 다섯 가지 감각 기관(感覺器官)이 타인의 감정 등 외부로부터의 모든 감각적 자극을 받고 그에 반응하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이성이 논리적이고 지식적이라면 감성은 감정적이고 정서적이라 할 수 있다. 상품을 광고할 때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디자인이나 색상으로 모성애를 자극한다거나 여성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을 감성적인 마케팅이라고 하고 상품의 품질이나 경제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을 이성적인 마케팅이라고 한다. 사람은 이성적이라야 하지만 감성도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이성 감성뿐만 아니라 영성(靈 性)도 있다. 영성은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그 할아버지는 여러 명의 손자들을 두고 있었 다. 옛날 한 마을에 옹기종기 살 때의 형제자매들이 모여 사는 고로 자연히 그 할아버지 밑에 손에 닿는 손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 많은 손자들 중에 유난히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손자가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찾아와서 할아버지와 씨름을 하자고 조르는 여섯 살 박이 둘째 아들의 셋째 아이였다. 마루에서 할아버지와 손자 놈은 한판 씨름이 벌어졌다. 할아버지가 이길 경우, 손자 놈은 아주 절망적인 기분으로 되돌아갔다가 내일을 기약하자는 식이다. 그런데 이 조손(祖孫) 사이의 씨름의 승자는 거의 손자였다. 10번 씨름하면 한 두 번은 할아버지가 승자이고 나머지는 손자가 승자이다. 승리한 손자는 기고만장하다 힘센 할아버지로부터 자기의 씨름 솜씨를 인증받기 때문에 여러 손자 놈들 사이에서도 당당히 기가 살아있다. “내가 할아버지를 이겼다” 그러나 사실은 할아버지가 져 준 것이었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 턱이 없다. 그것을 알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나는 이런 광경을 보노라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장면이 생각난다(창 32:13~32). 에서 형을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가서 두 아내를 취해 자수성가한 동생 야곱이 금의환향
‘단장의 아픔’이란 말이 있다. 중국 진나라 때 ‘화온’이란 사람이 배를 타고 촉나라로 가던 중 장강 삼협을 지날 때 시종한 사람이 숲에 들어 갔다가 원숭이 새끼가 너무 귀여워 덥석 안고 배를 탔다. 그것을 본 어미 원숭이가 뒤따라 나섰지만 배가 떠나자 험한 강가를 울부짖으며 따라간다. 백 리를 넘게 가서 배가 강기슭에 닿자마자 어미 원숭이는 즉각 배로 뛰어들어 새끼 원숭이를 껴안지만 금세 죽고 만다.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 궁금해서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여러 토막으로 끊겨 있었단다. 너무 기를 쓰고 애를 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말이 ‘단장(斷腸)의 아픔’이다. 이게 많은 어머니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날마다 자식 걱정하며 사는 어머니, 본문에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상황에 처한 한 어머니가 등장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다 뒤늦게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만 낳게 해주신다면 그 아들을 바치겠다고 서원했기에 젖을 뗀 후 성소에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머니가 바로 한나 (Hannah)다. 그녀는 말만 번지르하게 한 게아니라 서원대로 행한다. 인간적으로는 정말 힘든 일이어도 약속이었고 또 은혜에 감사했기 때문이
울금은 진도의 특산물 가운데 하나로, '막힌 기운을 뚫어주는 황금색 음식'이란 뜻이다. 요즈음 매스컴에서도 육고기나 생선 요리뿐만 아니라 뇌건강과 항암효과에서부터 다이어트 식품으로 알려진 울금은 요사이 관심이 되고 있는 면역력 기능을 높여 준다고 알려져 있다. 울금을 자랑하고 광고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진도에서 특산물이라고 재배되는 작물 중에 하나로 울금을 넣어 만든 엿과 젤리를 구입하고 몇 개씩 포장해 나누며 전도하고 있다. 대부분 노년층으로 구성된 마을주민 분들은 집을 방문을 하거나 회관에 찾아가 만난다. 또 들이나 밭에서 계시는 분들을 만나면 사탕이나 과자 하나라도 드리며 말을 건네고 안부를 묻는다. 그래서 진도에 목회하며 생긴 습관 하나가 차 안에나 주머니에 사탕이나 과자들을 꼭 넣어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교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옛 팽목항인 진도항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아픈 추억의 장소이지만 먼 진도까지 찾아오신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요 장소다. 몇 년째 매주 한 번씩이라도 가면 언제든 새로운 분들을 만날 수 있다. 교회 청년과 전도를 나서며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하실 일을 기도하고 기대하는 시간은 새로운
버림받은 아이가 안전하게 생존하려면 자신의 부모를 이상화하고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분열시켜야만 한다. 이렇게 분열된 자신의 한 부분은 사실 자신이 받아들기를 거부한 부모의 일부분이다. 아이는 이렇게 분열되고 금지된 자기를 다른 사람들, 즉 자신의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상처를 주는 부모의 목소리를 자신의 내부로 투사하게 된다. 이 말은 아이가 원래 자신의 부모로부터 들었던(상처가 되는 부정적인 말) 대화를 자동으로 계속 자신의 내부에서 듣게 된다는 것이다. 긍정적 이미지를 받든 부정적 이미지를 받든 아이는 자신이 부모에게서 양육을 받은 대로 자신을 본다. 오랫동안 거짓 자기를 자신으로 동일시하다 보면 자신의 진정한 감정, 필요, 욕구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즉, 수치심이 내면화가 된다. 진짜 자기와의 의식적인 접촉은 차단되고 진짜 자기는 존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순종은 사랑을 통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다. 이는 실제적인 참 자기로서의 건강한 생명이 자녀나 타인에게 흘러 그 대상들도 역시 참 자기로서 건강하게 소통하게 되는 교류를 말한다. 순종이 강요되는 가운데 그와 같은 규칙에 의해 ‘좋은 아이’(거짓 자기가 기능을
설교 속에 성경이 묻혀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고 교리 속에 성경이 갇혀버리자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졌다. 매끄러운 설교는 맛이 없다. 빛 좋은 개살구가 맛이 없듯이 너무 세련되게 조직된 설교에는 예수의 인격이 유기체도 남지 못하고 분산되어 보인다. 갈기갈기 설교 조직 속에 흩어져 버린 예수가 전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옛날부터 침례교회는 신조주의(信條 主義)가 아니라 고백주의라고 했는데 주변으로부터 침례교회는 신학 부재가 아니냐는 항의가 있었다. 마침 오래 전 게재된 침례신문에 김승진 침신대 명예교수가 “신앙고백과 신조(신경)”란 주제로 글이 생각나 다시 읽어보면서 너무나 속 시원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나의 호흡이 순해진 것 같다. 침례신문에 게재된 글을 간과할 사람도 있을것 같아서 여기에 전부를 그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메우고 싶었다. 이것은 표절이 아니잖는 가?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으면 이단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글귀인 사도신경 그 자체가 이단분별의 잣대가 될 수 있습니까? 왜 꼭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사무엘서는 사무엘(Samuel), 사울(Saul), 다윗 (David)에 이르는 통일왕국의 건설 과정을 서술한 책이고, 핵심인물은 다윗이다. 그래서 제목이 ‘다윗 사’나 ‘이스라엘 왕국사’가더 어울릴 것 같지만 히브리 성경이 제목을 ‘사무엘 서’라고 한 것은 핵심인물 다윗마저도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서는 한 수단일 뿐이며, 다윗이라는 통일왕국의 절대 왕도 사무엘이라는 예언자의 시각을 통해 그 인생 또는 역사적 의미가 조명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 같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는 한 사람이 받은 은혜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민족 선택이 늙고 무자한(자식이 없는) 아브라함 (Abraham)으로부터 시작되고, 출애굽의 역사도 갈대 상자에 태워 나일강에 버려진 모세(Moses)의 출생으로부터 시작되며, 통일왕국을 이루는 이스라엘 역사도 마찬가지, 자녀가 없어 한 맺힌 한 여인의 탄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찌보면 한 집안의 일상사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당신의 구원사를 진행시키신다. 그저 아이 하나를 낳고 싶다는 부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상사가 구원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에브라임(Ephraim) 산지 라마다임 (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을 “자칭 사도”로 그의 사도직을 조롱했다. 적대자들로부터 사도직에 대한 의심을 받았던 바울은 당대에 거짓 사도들로부터 자신을 구분하였다. 바울이 제시한 참된 사도와 거짓 사도를 구분하는 대원칙은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자인가,’ ‘아닌가’ 이다. 바울은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파송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복음 전파의 소명을 받아 파송된 자임을 강조한다(갈 1:1, 11~12).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복음의 계시와 이방인 선교에 소명을 받고 파송 받았다면, 거짓 사도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위임을 받고 파송된 자들이다. 바울이 거짓 사도들과 구분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신약이 기록되던 원시 기독교 시대에 12사도와 바울 사도 외에도 다른 사도들이 있었거나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희사한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서 “사도”라는 명칭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에 관해 물음에 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로 번역한 아포스토로스는 아포(~로 부터)와 동사 스텔로(내가 보낸다)가 결합해 파생한 “~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의 명사이다. 고대 헬라어 문헌에
넷째는 방문상담사 돌봄과 성장을 위한 자문 제공이다. 방문상담은 교회의 목양적 방문이나 사회적 방문의 경우 모두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와 격려 및 필요한 지원과 돌봄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가치 있는 사역이자 전문적인 활동이다. 하지만 낯선 곳을 찾아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만 아니라 호의적이지 않은 여러 가족 구성원들이나 관리되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무거운 이슈들을 다룬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크고, 신체적·정신적으로 에너지를 소진(burn-out)시키는 힘든 작업이다. 자신들의 상담교육이나 훈련의 범주를 벗어나는 이슈에 직면하거나 상담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더 악화되는 경우 상담사로서의 부적절감 등으로 혼란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느 전문 상담사도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슈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한계와 전문성에 관한 회의를 경험할 때가 있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방문상담사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그들의 속마음을 들어주고 공감하며 위로와 격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많은 경우, 경제적 보상도 충분치 않거나 자원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경험을 오래 지속하기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들의 이름에 대해서 관여와 배려해주심이 있다. 사가랴의 아들 이름을 천사를 통해서 “요한”으로 미리 알려주셨는가 하면(눅 1:13) “고귀한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의 이름을 더 크고 위대한 ‘열국의 아버지’ 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시기도 했다(창17:5). 또한 개인적으로 특별히 이름을 불러주신 사례들도 있다. 호렙산 근처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러간 모세나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던 사무엘을 밤중에 각각 부르시고는 사명 이나 장차 될 일을 말씀해주셨다(출3:4, 삼상3:10).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이름을 기억하시며, 불러 주시며, 다윗처럼 존귀하게 만들어주시기도 한다(대상17:8).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름을 귀중히 여긴다.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지위, 업적, 생애 등을 반영하는 것으로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후세까지 명예롭게 되길 바란다. 그렇기에 목회자들도 교인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며 불러 주어야 한다. 나의 경우엔 대심방시 교인 자녀들의 이름을 갑자기 잊어버려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몇 번 이런 일을 겪은 후엔 메모지에 이름을 적어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주인공은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퇴장이 더 중요하다. 어떤 주인공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리얼하게 연기하다가 불행하게 퇴장하는가 하면 어떤 주인공은 해피앤딩으로 등장할 때보다 퇴장이 더 아름다운 주인공도 있다. 미국의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할 정도로 전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막강한 자리이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은 전 세계인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미국 46대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며 엄숙하게 취임식이 진행되는 현장에 전임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를 부정 선거라며 바이든 당선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다가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 난동 사건이 발생하면서 트럼프는 오랜 전통을 깨고 취임 식에 참석하지 않고 백악관을 떠나는 대통령답지 않은 모습을 연출했다. 만 75세의 고령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4년간 재임한 것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신사답게 승복하고 취임식에서 축하의 악수를 하고 물러났더라면 멋진 모습이었을 텐데 왜 저렇게 비신 사적이고 명예롭지 못한 퇴장의 길을 택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는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이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