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개최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K집사 가정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고 집으로 초대했다. 방문해 기도한 후에 갑자기 강사가 K집사 부부에게 당황할 말을 던졌다. “이 집 부부는 자녀를 왜 이렇게 심히 미워한데요?” “강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끔찍이 사랑할뿐더러 교육에 대한 열정도 대단합니다.” 아내가 민망해하며 분위기를 바꾸려하자 “틀림없이 어느 자녀를 미워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알려주시니 말하는 겁니다.” 강사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같은 뜻의 말을 전해줬다. 그러자 놀라운 것은 K집사 부인이 그 말을 인정하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둘째 딸을 외국에 입양시키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습니다. 이래선 안되는 줄 알면서도 얘가 워낙 힘들게 하고 미운 짓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싫어지고 미워지더라구요.” 나는 담임 목회자로 이 가정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자녀 문제가 이토록 심각한 상태인 줄은 그때서야 알게 됐다. K집사의 둘째 딸은 태어날 때부터 10개의 손가락이 모두 붙어있는 장애를 가졌었다. 그 손가락 하나하나를 분리해서 정상인처럼 만들기 위해선 병원 수술비 부담도 엄청나게 컸을 뿐더러 가족들 고통도 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2:10) 목회 사역을 한 곳에서 오래 했습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도 이젠 하나, 둘씩 퇴직해 서로 연락하고, 왕래하며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아버지!”하며 따라다니던 손주도 이젠 많이 자라서 어느덧 초등학생이 됐습니다. 늘 부교역자를 두고 사역해오던 제가 작년에는 교회 내의 행정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부교역자 없이 혼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역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 잡다한 여러 일들도 많아졌습니다. 즉, 예를 들어 겨울철에 교회 현관에 있는 화목 난로에 들어갈 땔감들을 구해오는 일부터 시작해서 그것들을 주중에 절단하고, 청소하는 일까지 매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차량 관리나 쓰레기 분리수거, 심지어는 주중에 소망회 차량 봉사를 하는 등. 어떤 때는 소망회 차량 봉사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원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나도 할아버지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 뒤따르는 부속적인 생각이 “혹시 이렇게 은퇴할 때까지 차
사라 윈체스터(Sarah Winchester)의 남편은 소위 그 유명한 ‘윈체스터 총’을 만들어 팔아서 큰 부자가 됐으나 1918년 유행성 감기에 걸려 죽은 후 부인 사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로 이사했다. 사라는 고통과 슬픔 중 강신술에 대한 오랜 관심으로 말미암아 죽은 남편을 접촉할 수 있다는 무당을 찾아가게 됐다. 무당은 그녀에게 “당신이 계속 집을 짓는 동안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라는 그 무당의 말을 믿고 이미 17개나 방이 지어진 미완성의 저택 한 채를 사서 이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집을 지어갔다. 이 건축비는 무려 500만 달러나 됐다. 당신 하루의 인부 임금은 50센트(500원)였다. 오늘날 하루 임금을 50불로 계산할 때 화폐가치가 100배가 됐으니 건축비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 저택은 방이 150개, 욕실이 13개, 문짝이 2,000개, 벽난로가 47개, 창문이 무려 10,000개나 됐다. 그리고도 사라 윈체스터는 80년 이상 건축을 계속할 수 있는 건축자제를 남겨 뒀다고 한다. 그 집은 단순한 관광명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내가 그곳을 구경하러 갔을 때
이집트 하면 고대문명의 신비를 간직한 태양의 나라로서 인류 최초의 농경이 이뤄진 나라 중 하나이고 B.C 3000년경 인류 최초의 빵을 만든 나라 아닌가. 그런데 지금 국민 8000만 명에 이르는 이집트는 세계 최대 밀수입국으로 전략가는 바람에 온 국민이 굶주리고 있다. 왜 농경 국가가 밀 생산을 못하는가. 농업 경시 풍조다. 밀 생산을 가볍게 봤던 것이다. 주식인 밀을 대신에 딸기, 멜론, 수박 등을 재배해 그것을 판돈으로 밀을 수입하겠다는 정책을 폈다. 전 농림부장관 유세프 왈리의 정책이었다. 밀의 나라는 오직 제일 먼저 밀부터 생산해서 많은 빵을 만들 수 있어야 했다. 딸기나 멜론이나 수박은 간식은 되어도 주식이 못 된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와 같은 영적 영양실조와 기아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무슨 이유인가? 성경에서 나오는 말씀의 결핍 때문이다. 성경 설교가 없어졌다. 대신에 ‘딸기 설교’ ‘멜론 설교’ ‘수박 설교’가 행해지고 있다. 그것들은 주식이 아니잖나. 빵이 주식 아닌가? 밥을 마다하고 딸기만 먹으며 살고 있나. 당연히 영양실조 아닌가. 생명이 없는 타 종교에는 수다한 종교 행사가 요란스럽다. 그들은 내어 놓을만한 진리가 없기 때문에 갖가지
황성옛터는 바벨론으로 대치되고 봄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하늘 천국으로 대치해보면 어떨까. 내가 황성옛터 유행가를 즐겨 부르는 이유는 요한계시록 18장의 멸망하는 바벨론과 19장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대비시켜 있기 때문이다. 우선 황성옛터 가사 전체를 실어본다. 제목 : 황성옛터(1930년) 작사 : 왕평 작곡 : 전수진 노래 : 이애리수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이뤄 /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끌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쇠락해 버린 황성옛터를 찾은 나그네의 서러움이 극에 달하지만 별 수가 없단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며 있노라”는 나그네였다. “이몸은 흘러서(?) 옛터야 잘 있거라” 작별하는 나그네였다. 우선 계시록 18장의 패망하는 바벨론을 보자. 도무지 바벨론은 무
대학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그의 글이 잊혀지지 않는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소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oard)는 서커스 장소에서 일어난 화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커스 주인은 불을 끄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해 맨 먼저 만난 광대를 붙잡고 빨리 동리에 나가서 화재 진화를 요청하라고 했다. 이 광대는 서커스 준비로 이미 무대 연기를 위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을 벗을 여유 없이 곧장 동리로 달려가 “불이야!” 하면서 서커스 장에 불을 꺼 달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광대의 행동이 연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마음껏 박수를 치며 웃었다. 광대가 더 광분하고 불을 꺼 달라고 소리쳐 호소할수록 사람들은 그 열렬한 연기에 더욱 크게 웃었다. 결국 서커스 장을 태운 불길은 온 동리를 덮쳐 불 속에 파멸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 휘황찬란하게 아름다운 천국에 이를 때에, 우리를 통해 구원받은 수많은 영혼들이 몰려나와 나팔 들고 환호하고 영접하는 아우성을 들으리라!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성령을 받아 모신 우리의 지상과업은 예
침례교회의 시작과 관련해서 여러 많은 해석과 주장들이 있었지만 우리 교단에서 대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학설은 크게 3가지로 보고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세우신 신약교회가 최초의 침례교회였다는 계승설과 영국 청교도 가운데 분리파들이 성경연구를 통해 시작했다는 영국 청교도 분리파 후예설, 마지막으로 침례교회를 세운 영국인들이 재침례교회의 신앙과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세운 재침례교 영향설이다. 이와 관련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이를 통해 침례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해 온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 발간된 세계 침례교회사(김용국 저,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37000원)는 침례교회의 뿌리와 함께 침례교회의 역사를 영국과 미국, 유럽대륙, 한국을 중심으로 비중있게 다뤘다. 이에 본보는 침신대 김용국 교수(사진·신학과)에게 이번 책에 대한 궁금한 점을 들어봤다. ◇세계 침례교회에 대해 어려운 일을 하셨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정리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 “과찬의 말씀이지만 칭찬을 해주시니 힘이 납니다. 이번 책을 출판한 것은 신학교 교재로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침례교 목회자에게 침례교회 역사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여겨 집필하게 됐습니다.” ◇ 침
1950년대에 초등학교에서는 회충 제거 약을 무료로 공급해 줬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변변치 못한 영양섭취에 그놈의 회충이 갉아먹으니 아이들의 얼굴은 거의 노랑 색깔이었다. 그때 학생들에게 나눠주신 알약은 대게 5개 정도였다. 저녁은 굶고 밤에 회충약 5개를 다 먹고 아침에 회충이 몇 마리가 나왔는지 담임선생님에게 필히 보고케 했다. 홍길동? 6마리요. 김춘배? 4마리요. 박석태? 10마리요. 권혁봉 2마리요. 출석부를 보고 호명하고 결과 보고를 듣는 장면이 일제말엽 잔재 군국주의 시대의 끝머리임이 틀림없다. 학생들은 약간 창피스럽게도 여겨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많이 나왔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내 경우엔 어머님의 의학 지식이 문제였다. 어머님은 회충이란 놈이 배 안에 있어서 식욕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그놈이 밥 먹자고 하니 식욕이 당겨서 밥을 많이 먹게 되는데 만약 회충이 싹 죽어 없어지면 식욕감퇴가 된다는 것이 어머님의 의학지식이었다. 그러니 회충 한 마리 정도는 둬야만 식욕도 당기고 또 그놈이 씨를 퍼트려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참으로 우습고 가엾은 어머님의 의학지식에 따라 나는 5개 중 1개의 알약은 먹지 않았다. 이런 의학지식은 나의 어머니뿐만 아니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서신 서두에 말씀했다. 옛날 읽은 십자가의 글이 떠오른다. 영국 에딘버러(Edinburgh)시의 프린스 거리에 있는 어떤 예술품 가게에 한 신사가 십자가의 그림 앞에 움직이지 않았다. 십자가의 그림을 보며 움직이지 않는 것은 십자가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바람에 그에게 치밀어오는 고통을 감내하며 참고 있었다. 그 때 한 거지 아이가 옆에 서서 지켜보며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하여 얘기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사람은 예수님이고 죄 없이 양손과 양발에 대못으로 박히고 머리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고 있지요! 그 앞에서 눈물로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와 여인들이 함께 있지요. 죄 없으신 예수는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여기 모인 우리들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지요!” 듣고 있던 신사는 감격에 찬 거지의 차분한 얘기에 큰 깨달음을 받고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게 된 후에 복음의 증인이 됐다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3절 전반부 평행하는 구절의 처음 두 단어는 동일하다. 마소라 본문의 첫 단어인 ‘바티흐바드’(וַתִּכְבַּד)는 그 동사 원형의 뜻이 ‘무겁다’이고, 두 번째 단어인 ‘밀하마’(מִלְחָמָה)는 그 뜻이 ‘싸움’이다. 연구자가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하자면 “싸움이 버거웠다”로 볼 수 있다. 위 대부분의 번역도 서로 간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번역을 하고 있다: “치열해지다”, “격렬해지다”. “press hard upon”, “grow fierce”, “go sore against”, “go hard against”, “wurden hart gegen.” 다만 개역개정의 “패전하다”는 지나치게 의역한 경우다. NRSV의 “press hard upon”이 연구자의 사역과 가장 가까운 번역이다. 세 번째 단어에서는 ‘사울’앞에 붙는 전치사에 차이가 보인다. 사무엘상 31장 3절에서는 ‘엘’(אֶל), ‘~에게’이며, 역대상 10장 3절에서는 ‘알’(עַל), ‘~맞서(against)/ ~위에(upon)’이다. 사울에게 닥친 싸움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뉘앙스의 세밀한 차이를 살리자면, 전자는 “싸움이 사울에게 버거웠다”, 후자
마지막으로 기술의 결합과 정보통신에 의한 영향력이 인간의 본질적 모습과 정체성에 어떠한 결과를 미칠지 주목하며 지속적인 담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에서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전은 우리에게 편리함과 효율성을 증가시키는 순기능을 감당하는데 반해 정보와 기술을 소유한 집단에 의한 왜곡현상과 빠르고 복잡한 기술의 변화에 동참하지 못하거나 소외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서적, 정신적 문제의 위험을 동반하는 역기능이 나타난다. 4차 산업혁명의 기술 중심주의 행동양식은 기계적으로 산술화된 모델을 인간의 행동방식과 삶에 적용시키려는 시도에서 그 위험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가치와 역량을 삶의 총체적인 관점에 근거해 판단하기보다는 조직이 정해놓은 기계적인 산출근거에 의해 평가해 기계와 같이 획일적으로 동기화함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목적과 추구하는 가치와 상치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기술의 활용과 발전은 사람이 수단이 되어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위한 성경적 의미의 수단과 연결될 때 그 가치와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은 인류 역사의 진보에 기여하는 목적을 추구
상담사로서 매년 자격증 재발급을 위해 들어야 하는 과목 중 하나가 윤리학(ethics)이다. 상담을 하면서 옳고 그른 것도 구분을 못해서 매년 수업을 반복해야 하는가, 이 재미없는 과목을 굳이 또 들어야 하는가 투덜대기도 한다. 하지만 해를 거듭해 갈수록 윤리적 삶의 강조가 상담과 사역에 얼마나 중요한지 통감하곤 한다. 아주 약간의 판단 착오가 내담자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고, 잠깐의 느슨함이 법정 싸움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담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의 윤리 강령이 적용된다. 돕고자 하는 선한 의도로 시작된 상담이 자칫하면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기본윤리는 물론 성경이 기준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주님 앞에 어떤 모습이 바른가는 우리를 디자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정확한 기준을 제공한다. 그래서 윤리학은 이미 말씀에 뿌리를 둔다. 하지만 상담의 윤리강령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상황에 조금 더 구체적이고 법률적인 틀을 제공한다. 상담의 윤리학에서 가장 강조되는 원리 중 하나는 비밀유지(confidentiality)의 원칙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같지만 비밀
요한의 인자 기독론(5)에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상황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변호하기 위해 하신 인자 말씀에 담긴 의미를 살펴봤다.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죽고 멸망하는 존재라는 것과 그들은 인자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야 예수님이 바로 그 인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마감하는 상황에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건과 관련해 하신 예수님의 인자 말씀의 의미를 살펴본다. 헬라인들이 찾아왔다는 제자들의 보고를 받은 예수님은 그의 사역의 궁극적 국면 곧 그의 죽음을 언급하는 기회로 삼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예수님은 헬라인들의 요청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 대신 그것에 의해 촉발된 상황에 관한 신학적 해석을 제시한다. 예수님이 그들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헬라인들에게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의 길을 통과해 가셔야 한다(11:24). 지금까지 예수님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해오셨다(2:4
아내와 나는 요사이 사사기서를 시작하는 아침 QT를 하고 있었다. 본문을 읽고 약간의 해설을 나눈 뒤 기도로 들어갔다. 내가 처음 시작한 기도는 아래와 같았다.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나라가 극히 위험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마치 태풍 앞에 흔들리는 촛불 같습니다. 이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제발 보호해 주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기도 중인데 아내가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 “왜 촛불을 보호해 달라는 거요, 촛불은 꺼져야 돼요.” 나는 당황했다. 기도 도중에 이거 무슨 변이냐 싶어서 눈을 뜨고 아내를 바라봤다. “예수 이름으로 이만 기도드립니다.”라는 마무리도 못한 채 나는 아내에게 “왜 촛불이 꺼져야만 되나요.”라고 하니 아내가 서슴지 않고 말을 받았다. “광화문에 가보세요. 태극기와 촛불이 싸우지 않소.” 나는 아내의 첫 발언에 아차 이거 시사 문제구나 하고 느꼈다. 평상시 이미 알고 있지만 아내는 소위 우파에 속하는 국민의 한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좌파에 속한 국민의 한 사람도 아니지만. 아내는 나의 오늘 기도가 썩 잘못된 것이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아내는 촛불은 좌파들의 상징이고 그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의 이 말씀을 대학 시절에 세상사와 인류 역사로 살펴볼 때, 납득이 잘 되지 않는 메시야 예수의 말씀이었다. 이 세상의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나 학생들이나 직장인들과 정치인이나 모든 사람들 중에 우선 나부터 섬기기에 대접받기를 마땅하게 좋아하며 기뻐하지 않았든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서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는가?”로 물으니 그들은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주님 곁에 가장 가까이 섬겼기에 좌우에 앉는 자리를 요구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알지 못하는구나. 나의 좌우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고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는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대답하셨다. 이러한 대화를 들은 열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