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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그랬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이 가득합니다. 윤동주의 시구가 읊어지는 개천절 날 오후 시골에서 택배로 보내온 푸성귀가 있어서 바리바리 싸들고 근처에 사는 딸네를 갔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과일이랑 아이들에게 필요한 간식거리가 될 만한 식료품을 이것저것 바구니에 담다보니 분량이 꽤나 많다. 양손에 들기에는 조금 많은 분량으로 늘어나 종량제 봉투 두 개와 꽤 묵직한 박스가 하나가 되었다.

 

딸내미네 아파트 주차장에 가서 전화를 했더니 고 3짜리 외손녀가 전화를 받는다.

엘림아 할아버지가 짐이 좀 많아서 그러는데 주차장으로 잠간 내려와 줄래?” “한 참을 기다리니 둘째 외손자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다. 3인데 몸무게 세 자리수로 표시되는 거구다.

 

할아버지 옷을 갈아입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은 없는데, 할아버지는 엘림이가 내려 올 줄 알았는데 아론이가 나왔구나.”

네 할아버지, 누나가 저보고 할아버지 주차장에 오셨다고 가서 짐 받아오라고 해서 제가 왔어요. 이리 주세요.”

 

외손자와 짐을 나누어 들고 딸네 집에 가서 한 참을 있으려니 아이들 넷이 다 들어왔고 조금 더 있으려니 출근했던 딸 내외도 퇴근해서 왔다. 사위는 물류회사에 다니고 딸내미는 공무원 생활을 하는데 퇴근해 오는 꼴이 둘이 다 피곤에 젖어있다. 친정 애비 싸들고 간 반찬이 있으니 따로 저녁 준비는 안 해도 되어서 그러는지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딸 네미 에게 슬쩍 한 마디 건네 봤다. “오늘 짐이 많아서 엘림이에게 전화를 했더니 대답은 예하더니 주차장에는 아론이가 내려 왔더라. 누구를 보는 것 같지 않니?”

 

딸아이가 웃는다. 그러면서 아빠 내가 언제?” “네 엄마가 하도 심부름을 안 해서 이담에 너 꼭 닮은 딸을 낳아보라고 했던 것 기억해?”

사위가 끼어든다. “현진이가 그랬어요?” “아니야 아빠가 괜히 그려서. 내가 얼마나 말 잘 듣는 효녀인데.”

 

내 아이들을 키우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온다. 나는 아이들을 셋을 두었는데 위로 둘은 두 살 터울이고 막내는 여러 해 후에 늦둥이로 하나님이 하나 더 주셨다. 위로 두 아이를 키울 때의 추억이다. 부엌에서 일하던 아내가 큰 딸 에게 현진아 슈퍼 가서 파 한단 사다줄래?”

하고 대답을 한다. 그리고 이내 세호야! 엄마가 슈퍼 가서 파 한 단 사오래그래서 파를 사오는 쪽은 언제나 둘째 아들 녀석이었다.

 

엄마! 저 숙제해야 돼요.” “엄마 제가 다녀올게요.” 추억은 더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가서 내가 자라던 시절로 다다른다.

강원도 홍천 두메산골 사방이 병풍을 두르듯 산으로 둘러싸인 움푹한 마을이 나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오후가 되면 밤나무 그늘아래 매어놓은 암소를 마구간으로 끌어오는 일을 나에게 명하셨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곧바로 나보다 두 살 아래 동생을 불렀다.

 

종우야 엄마가 소 끌어오래.” 그 외에도 다른 심부름을 나에게 시키면 나는 의례 명을 받들어 동생에게 하명을 했고 내 동생은 의례 그렇게 하는 일인 줄 알고 착하게도 임무를 완수하곤 했다. “가게 가서 빨래비누 한 장 외상으로 달아놓고 가져 오너라.” “종우야 엄마가 가게 가서 빨래비누 한 장 외상으로 달아놓고 가져 오래.”

 

한참 세월을 지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소를 끌어오라는 심부름 시키시던 어머님도 안 계신다. 빈번히 드나들던 동네 점방도 지금은 사라졌다.

내 대신 심부름을 잘 해주던 동생도 멀리 사느라 일 년에 한두 번 만난다. 내 대신 심부름 시킬 일도 없다.

바라보니 누나가 할 일을 대신 해 주는 둘째 외손자 녀석도 듬직하다. 대답은라고 하고 동생에게 책임지우는 맏딸 외손도 귀엽다.

내가 언제 그랬어.” 앙탈부리는 사남매 어미가 된 내 딸도 예쁘다.

반종원 목사

수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