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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한 말로 거룩한 진리 드러냅시다”

교회에서 쓰는 말┃이복규 지음┃248쪽┃13000원┃새물결플러스

지난 2016년에 출시돼 현재 170만 부를 넘어선 언어의 온도라는 책이 있다. 저자의 주장처럼 말과 글에는 나름의 온도가 담겨 있다. “괜찮아같이 상처를 어루만지고 격려하는 따뜻한 말이 있는가 하면 나 좀 내버려 둬같은 격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뜨거운 말도 있다. 얼마 전 한 대학 커뮤니티에 누군가 위로를 기대하며 올린 글에 조용히 죽어라는 짧지만, 얼음처럼 차갑다 못해 송곳 같은 댓글로 인해 급기야 글 작성자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도 있다.

 

같은 의미를 전달하려고 해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말을 써야 한다.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울 때 제일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존댓말이라고 한다. 우리말이 가진 특성상 점하나 조사 하나만 바뀌어도 완전히 다른 온도의 말이 되기도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언어야말로 인간 실존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 준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글로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지식수준, 관심사 상황판단과 대처 능력뿐 아니라 정서적 건강성과 비전 등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예배와 교제의 언어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의 이성, 감정을 포함한 전인격을 담은 경배행위이다. 그러니 경우에 합당한 말이 필수이다. 온 우주의 주인이자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경우에 맞지 않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엄청난 불경일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크신 사랑으로 오래 참아주시니 말이지 구약시대 같으면 그 자리에서 경을 칠이 아니겠는가.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도 포함한다. 물론 교회에서 교제의 많은 부분은 성령의 교통을 통해 성도 간에 이뤄진다. 여기에는 사랑에 기초한 나눔, 위로와 격려가 필수이다. 그러므로 한 교회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그 교회가 하나님을 어떤 수준으로 섬기는지, 성도 간에 사랑의 수준이 어떤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자연스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언어에도 창조의 능력이 있다. 실제로 많은 실험에서 식물, 동물을 포함해 사람 역시 사랑과 격려, 신뢰의 언어를 통해 열매를 맺고, 건강히 자라고, 균형 잡힌 건강한 인격체로 자라게 됨이 증명됐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바른 언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잡기란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든 생각은 책으로 쓸 만큼 교회가 잘못 사용하는 말이 많았나?”였다. 저자의 주장을 원인별로 다시 정리해보면 우리가 교회에서 잘못 사용하는 언어는 첫째, 국어에 대한 무지, 둘째 신학적 오해, 셋째 관습적인 사용에 기인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책에서 언급한 예를 들면 어법상으로는 다 찾으신 줄 믿고가 아니라 다 찾으신 줄 알고” “교회 창립이 아니라 교회 설립”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저희(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목사가 자신의 아내를 지칭할때 사모(또는 부인)”가 아니라 아내” “되어질 수 있기를이 아니라 되기를이 맞는 표현이다.

 

신학적 오해의 예는 모임 장소를 표시할 때는 “00교 회라고 쓰는 것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므로 “00교회 예배실()” 또는 각 건물이나 장소에 붙여진 별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제안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갑니다가 아니라 예배당 갑니다가 더 맞는 표현이다. “예배 봐주기로 했다” “예배 보러 간다라는 표현은 예배가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에서 구경꾼이 아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참여자라는 의미에서 함께 예배드린다” “예배드리러 간다가 적절한 표현이다.

 

관습적인 오류는 국어에 대한 무지와도 연결된 경우가 많다. 저자가 든 예중 하나는 증경(曾經)” 이다. 이 말은 국어사전에도 없고, 사회에서도 쓰지 않는 말이다. ‘일찍이 겪은이란 뜻으로 교계에서 이전에 총회장을 지낸 분에 대해 예우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전 총회장이라고 쓰는 것이 쉽고 더 좋겠다고 제안한다. 원래 의미로 볼 때 교회에서 흔히 할렐루야(하나님을 찬양하라!)”를 인사말이나 환영의 말로 사용하는 것과 아멘(참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을 대답처럼 사용하는 것 부적절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찬송가에서 오용된 부분, 어려운 한자, 외래어 표현과 관련한 설명을 더 하고 있다.

특히 부록에서 한국어의 특징, 글쓰기에 대해 자세히 다룬다. 이는 저자가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의 상당 부분이 올바른 국어 사용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동의한다면 신학적 오류에 기인한 부분들을 제외한 많은 문제는 교양의 문제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교회 지도자들의 교양을 높이는 것이 교회에서 올바른 언어사용을 위한 중요한 과제가 된다.

 

우리는 현재 민주화 과정에 적잖은 대가를 지불하며 학습된 시민의식과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진 세대의 등장, 문화적으로도 K-, K-드라마, K-시네마가 세계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성장해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의 교양과 언어는 어떠한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연 세상과 시대를 구원으로 이끄는데 적합한 수준인가 아니면 세상의 교양과 상식의 기준보다도 수준 낮음으로 인식돼 정작 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귀 기울지 않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적어도 필자가 경험해 아는 하나님은 몰상식한 분이 아니다. 다만 초상식 적인 분이시기는 하다. 우리의 몰상식, 무교양을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초상식과 초교양으로 포장하는 아전인수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가 될 테니 말이다.

침례교는 신약교회를 모델 삼고, 회중주의를 표방한다. 침례교 이상의 구현 정도, 수준은 성도의 성장수준만큼 가능하다.

 

그런데 목회자의 수준만큼 성도가 성장하기 때문에 목회자의 역량, 교양의 수준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 목회자가 부지런히 교양의 수준을 높이고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종종 권위적인 목회자들이 소위 막말을 하는데도 많은 사람이 따르는 경우가 있다. 진실성이 담보된 삶이 전제됐거나, 영적 능력이 탁월해서 용인됐을 수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수용하는 성도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이로 인해 얼마나 큰 피해가 있는가?

무엇보다 목회지도자가 기초 교양을 높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적 교양을 높여야 한다. 그렇다고 번지르르한 말, 신학적으로 정교한 용어로 수놓은 언어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말은 얼마나 정교하고 탁월했나? 그들은 이를 연마하기 위해 한평생을 오롯이 바치고 이를 자랑삼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언어 속에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자신들의 욕망이 깊숙이 똬리 틀고 있다고 가차 없이 폭로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시는 희생과 사랑이 담기지 않은 언어는 자신의 지식과 판단의 옳음과 많음을 자랑하고, 그것을 권력 삼은 욕망의 언어다. 정교한 논리와 다양한 지식, 귀에 달콤하고 신박한 표현으로 치장된 말과 글에 속지 말자. 목사의 말, 성도의 말, 교회의 말은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 진리를 경우에 합당한 말로 담아내야 한다. 진리를 살아내는, 진리에 순종하는 대가가 지불되는 말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말과 글은 위선이며, 사기일 뿐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언 25:11).

박찬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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