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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무오성 2-제한적(혹 기능적) 무오성의 문제점

쉽게 쓴 조직신학이야기 - 10
조동선 교수
한국침신대(조직신학)

제한적 무오성이란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필요한 복음의 내용에는 오류가 없지만, 그 이외의 진술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제한적 무오성의 진영에는 ‘믿음(복음에 대한 성경적 원리)과 실천(윤리)’은 오류가 없고 다만 구체적인 역사적, 자연 현상에 대한 묘사에는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좀 더 급진적인 주장은 성경의 역사적, 자연적 현상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성경은 구원에 대한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윤리적, 신학적 주장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한적 무오성의 옹호자는 ‘오직 성경으로’나 ‘성경의 권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뜻 보면 교회가 전통적으로 주장해온 성경의 완전한 무오성을 믿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한적 무오성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성경의 모든 부분이 성경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최종 권위가 될 수 없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20세기 후반 제한적 무오성을 주장한 대중적인 인물은 침례교 신학자 버나드 램와 스탠리 그렌츠 그리고 장로교 신학자 도날드 블러쉬 등이다. 이들의 제한적 무오성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칼 바르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구원의 신비를 전달하는 기능에서만 무오한 것이다. 


바르트의 제한된 무오성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란 표현을 사용하지만, 성경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계시 자체는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언이다. 계시와 성경 사이에는 존재론적인 거리가 있다. 성령께서 성경 텍스트의 선포 가운데 성경 독자를 실존적으로 만나주시고 독자가 하나님의 계시인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길 때 마침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즉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증언을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능하게 만드신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은 요한 계시록의 완성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매번 성경의 선포를 통해 실존적인 사건으로서 계속 발생한다. 하나님은 절대적 초월자이시며 역동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계시는 사건이지 인간의 언어로 글 속에 고착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증언인 성경은 무오하지 않다. 성경의 영감성은 성경 문자가 오류 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낸다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바르트나 제한적 무오성주의자는 성경의 축자 영감성을 부인한다. 인간 저자는 지식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자신의 세계관, 사회적 통념, 비과학적 사고방식을 통해 표현했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에는 과학적, 역사적, 윤리적, 신학적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히브리 종교의 본질에 관해 토라와 선지서 사이에 모순이 있으며 바울과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런 인간 저자의 신학적 오류는 성경의 인간적 저작권을 보장해 준다. 성경 텍스트가 확증하는 것은 모두 무오하다는 신념은 가현설적 성경론을 만들어내는 이단적 가르침이다. 최근에는 피터 엔즈가 바르트처럼 성경의 오류는 성경의 성육신적 특징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이 인간 저작권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될 수 있는 신성한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는 바르트의 성경론은 그의 기독론에서 비롯됐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신성이 성육신의 과정에서 죄성이 있는 인간성과 연합했지만,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인성이 실제적인 죄를 범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인간의 저자에 의한 증언으로서 태생적으로 오류를 품고 있지만, 성령은 성경 독자를 그 오류 사이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향할 수 있도록 오류 없이 안내할 것이다.


그렇다고 바르트가 오류가 섞여 있는 성경이 교회에 무익하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령이 오류가 있는 성경 텍스트를 성경 독자의 삶 속에 의미 있게 적용하시기 때문에 성경은 유용하다. 더구나 성경의 권위는 기독교의 다른 신학적 권위(교회, 교황, 신학자, 교단, 교회의 전통….) 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계시에 대한 일차적이며 직접적인 증언이며 다른 기독교의 신학적 권위는 이차적이며 간접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확증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무오성과 성경의 본질적인 무오성을 부인하면서 바르트의 성경론에 영향을 받은 제한적, 기능적 무오성이 정말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성경의 권위에 부합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첫째, 성경은 그 언어에 있어 무오한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호흡해 내심으로 즉, 영감을 받은 결과물이 글로 기록된 모든 성경임을 분명히 했다(딤후 3:16. 성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라페는 문서를 의미함).


둘째, 사람이 반드시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불신자라도 과학적, 역사적 현상을 사실대로 전달할 수 있다. 만일 인간 저자가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능력에 의해 오류를 범할 상황에서 보호받았다면 그의 글이 오류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할 이유가 없다.


셋째,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취하신 인성은 처음부터 죄성이 없으셨다. 그분의 죄 없는 인성은 성령과 자기 신성의 역사로 죄를 범하지 않은 삶으로 귀결되셨다. 마찬가지로 인간 저자들의 불가피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그들의 증언을 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처음부터 인간 저자들이 영적인 부분과 비 영적인 부분(역사, 자연 현상….)에서 계시된 진리를 어떤 왜곡도 없이 기록하도록 하셨다.


넷째, 제한된 무오성 혹은 기능상의 무오성은 잘못된 신론,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론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 제한된 무오성의 지지자는 인간 저자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통제와 인간 저자의 완전한 자의식이 서로 충돌 없이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강풍의 힘에 의해 배가 흘러가듯 성령의 강력한 감독과 인도하심으로 인간 저자는 하나님의 계시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로 정확한 계시를 기록한 것이다(벧후1:21).


다섯째, 제한된 무오성은 성경보다 인간 이성을 최고의 권위로 만든다. 어거스틴이 지적한 대로, 성경의 한 부분이 거짓되다고 믿는 순간부터 성경의 독자는 자신이 믿기 어렵거나 행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오류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에 대한 메시지는 온전히 참된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여섯째,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 영역에서 구원에 대한 것과 그 외에 대한 것을 분리하지 않는다. 성경의 모든 것이 영감 되었다면, 성경이 언급한 이신칭의에 대한 진술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 현상에 대한 진술도 참된 것이다.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 그들의 결혼, 그들의 자녀인 아벨의 순교,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 등 구약이 기록한 사건들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셨다. 구원 역사가 이 역사적 사건들 안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